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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rticle

20세기 초 李王家 관련 金剛山圖 硏究

이영수

명지대학교

Published: January 2011 · No. 271·272 · pp. 20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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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논문은 金圭鎭(1868-1933)의 昌德宮 熙政堂 벽화와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나전가구에 시문된 李道榮(1884-1933)의 金剛山圖를 대상으로 20세기 초 왕실에서 금강산도를 수용하게 된 배경 및 왕실에 수용된 금강산도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br* 일제강점기에 금강산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적극적인 금강산 관광정책을 통해 조선이 新帝國의 일부임을 전 세계에 인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 금강산은 민족혼의 상징이라는 사상이 대두되었다. 昌德宮 熙政堂에 금강산도가 부착된 1920년은 3·1운동이 발발한 바로 다음해로서 민족적 기운이 어느 때 보다 창귈한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궁중 벽화의 주제로 금강산도가 채택된 것은 단순한 일제의 의도 외에 금강산이 지녔던 민족적 상징성과 대외적 효과를 인식한 이왕가의 입장이 적극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선회한 일제의 통치 전략은 물론 금강산 관광정책을 적극 계획하고 있던 일제의 의도와 맞물리면서 일제의 특별한간섭없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br* 20세기 초, 이왕가의 후원을 받은 김규진의 창덕궁 희정당 벽화는 직접적인 사생과 사진을 바탕으로 근대적 사실성이 반영된 금강산도의 새로운 면모를 창출해냈다. 본고에서는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그의 기행문과 스케치들, 그리고 당시 간행된 금강산 사진과의 관계 속에서 작가가 이루어낸 독자적인 영역을 살펴보았다.*br* 왕실용으로 전해져온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나전 의걸이장과 침대는 나전공 김진갑(1900-l972)이 1930년대 후반경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구에 시문된 금강산도에는 관재 이도영의 호가 명시되어 있어 회화사적으로도 매우 주목된다. 나전의걸이장에 시문된 〈금강산 구룡연〉과 〈만물상 삼선암〉은 이도영의 목판화에 보이는 각진 칼맛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나전침대에 시문된 〈금강산 만물상〉과 〈해금강입석의 송도〉는 반대로 부드러운 선과 세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함으로써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일본풍의 금강산 그림들 및 1930년대 선전 공예부에 유행했던 금강산도 문양들과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Keywords: 금강산도(Paintings of Mount Kumgang)이왕가(Yi Royal-Family)이도영(Yi Doyoung)해강 김규진(Haekang Kim Kyujin)창덕궁(Changdeok Palace)일제강점기(Japanese Colonial Ru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