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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rticle

關野貞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조사 연구, 그 성과와 한계

이종수

Published: January 2008 · · pp.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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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일제강점기의 고구려 고분벽화 조사와 연구는 동경제국대학 교수인 關野貞(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2년 강서 대묘에서의 벽화 발견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조직적인 벽화고분 조사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직후 朝鮮古蹟調査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br*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벽화고분의 수는 모두 28기이다. 이 가운데 1912년 강서 대묘 조사에서 시작된 1910년대의 벽화고분 15기의 조사가 모두 關野貞의 손을 거쳤을 만큼,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br* 關野貞의 벽화 연구가 지닌 특성을 살펴보면 그것 자체로 그 성과와 한계를 담고 있다. 먼저 그는 벽화고분의 命名이라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고분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그의 연구 논문은 해설과 함께 사진과 실측도, 모사도 등을 싣고 있어 자료로서 충실한 점에서 두드러진다. 정확한 실측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연구 방식은 근대적인 학문의 한 표준을 제시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또한 그는 조직적인 팀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엄청난 작업량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명민한 관리자로서의 면모와 함께 성실한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br* 한편, 학자로서의 자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채 고구려 고분벽화의 회화적 특성을 중국의 영향이라는 관점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이런 무리한 회화양식의 적용으로 인해 벽화의 편년 작업에서도 스스로의 논의에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연구가 식민지배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논문과 저서 곳곳에서 조선의 미술을 가치 폄하하는 표현들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br* 발굴과 함께 진행된 벽화 연구는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마치게 된다. 1930년대 이후 벽화를 발굴하는 일본인 학자들에게 조사 방법과 벽화 해석의 관점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발굴에 참여하지 않은 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br* 그가 연구한 대상은 고대의 벽화이지만 근대 학문의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조사 대상이 고대의 무덤이었다는 것은 근대적인 조사 방식과 더욱 대조를 이루어, ‘정체된 조선과 근대적인 일본’의 이미지 창출에 기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분벽화 발굴이 ‘사실적인’조사였다는 평가의 이면에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이 땅의 고적마저도 소유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의 시선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Keywords: 關野貞(세키노 타다샤 Sekino Tadashi)고구려 고분벽화(Goguryeo's ancient tomb murals)「조선미술사」(Joseon History of Fine Arts)고분의 命名(naming of ancient tombs)벽화 模寫(reproduction of mur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