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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rticle

唐代 7世紀 模印泥像 流行의 動因: ‘玄奘 역할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새로운 推動者를 중심으로

蘇鉉淑

원광대학교

Published: January 2025 · No. 326 · pp. 16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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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고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기존 문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7세기 후반 당대 모인니상의 출현과 유행의 動因을 새롭게 살펴본 것이다.*br* 흙을 재료로 틀을 이용해 像을 찍어내는 모인니상은 인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7세기 후반부터 당의 도성 長安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했다. 기존 연구는 모인니상의 유행을 직접 이끈 인물로 645년 인도에서 돌아온 玄奘을 지목했다. 이는 명문을 가진 모인니상들이 현장이 주로 활동했던 慈恩寺 부근에서 발견된 점, 그리고 현장이 ‘십구지의 소상[十俱胝塑像]을 만들었다’는 기록 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관련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십구지의 소상은 현장이 말년을 보낸 玉華寺에서 제작되기 시작했다. 십구지의 소상 이외에 현장이 주도한 俱胝畵像, 석가불상, 佛足石 등의 조상활동도 대부분 장안이 아닌 옥화사에서 진행되었다.*br* 그렇다면 장안에서 진행된 모인니상의 유행은 누가 이끌었을까? 본고는 고종의 유모 姬總持의 墓志를 새롭게 주목하고, 서역 승려가 제작한 모인니상의 틀[像印]이 황제로부터 그녀에게 하사되어 유통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왕현책이 660년 인도 菩提寺에서 받아온 4개의 佛印이 고종의 칙령으로 편찬된 『西域志(圖)』를 통해 유포되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br* 상술한 두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황권의 존재이다. 비록 황제의 역할은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존 유물이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모인니상의 출현과 유행이 당대 궁중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은 확실하다. 다시 말해 모인니상의 출현과 유행에는 현장 이외에도, 황제, 서역승, 궁중에서 활동했던 다양한 지위의 인물들이 중층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Keywords: 流行의 動因(Driving force behind a trend)새로운 推動者(New Ag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