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lection and Utilization of Korean Ceramics by the Yi Royal Household Museum: Focusing on the Colonial Nature of the Reproduction Ceramics Indust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문화유산융합학부 강사 (미술사학 전공) (Lecturer, Division of Cultural Heritage Convergence, Korea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1065/kjah.330.202606.006
Abstract
During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he reproduction ceramics industry developed in close relation with Korean ceramics collected by the Yi Royal Household Museum. In 1908 and 1909, the museum intensively collected Korean ceramics, and these collections later served as important prototypes for the production of reproduction ceramics. In particular, from 1914 to 1915, the Yi Royal Household Museum conducted surveys of kiln sites throughout Korea and invited the Japanese potter Suwa Sozan(諏訪蘇山) to construct a kiln in the Secret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and produce Biwon ceramics. This demonstrates that the museum’s collection was used not only for exhibition and research purposes but also as reference material for the production of reproduction ceramics.
Afterward,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ctively fostered the reproduction ceramics industry through the Central Industrial Research Institute and various production workshops. Samhwa Koryŏ Ware, Hanyang Koryŏ Ware, Hallangnyo, Kyeryong Yowŏn, and Hoeryŏngso produced reproduction ceramics based on the collections of the Yi Royal Household Museum and promoted them through the Joseon Art Exhibition. In particular, many employees from these workshops were accepted for exhibition in the crafts section of the exhibition and won special prizes. Furthermore,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Export Crafts Association in 1939, reproduction ceramics became one of the major craft products intended for export to overseas market such as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Ultimately, the Yi Royal Household Museum’s collection of Korean ceramics became an important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the reproduction ceramics industry and colonial craft policies. The museum’s collection served not only as prototypes for the production of reproduction ceramics, but also as a means of demonstrating the craft production capacity and economic value of colonial Korea.
Ⅰ. 머리말
국내 최초의 박물관인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은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에 개관하였으며,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으로 개칭되었다.1 이왕가박물관은 개관 이전인 1908년부터 진열품 수집을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도자기 역시 수집되었다.
이왕가박물관의 컬렉션에 관한 연구는 고려청자와 서화의 수집을 통해 박물관의 성격을 규명하거나, 한국도자 수집 목록을 바탕으로 고미술 시장과의 관련성을 고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2 한편 20세기 전반 재현도자 연구는 일제강점기 도자 정책과 재현도자 제작소를 운영한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3 조선총독부는 한일강제병합 이후부터 조선의 요업(窯業)을 식산산업의 하나로 인식하고, 관립 제작소와 민간 제작소를 통한 재현도자 제작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간 20세기 전반 제작된 재현도자는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연관되어 논의된 바 있으나, 자료의 한계로 인해 재현도자 산업의 전체적인 구조와 전개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컬렉션과 재현도자 연구는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양자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재현도자 가운데에는 이왕가박물관 소장 도자를 범본으로 제작된 사례가 다수 확인되며, 이는 박물관 소장품이 단순한 전시와 보존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4
이에 본 논고에서는 이왕가박물관이 수집한 한국도자가 박물관의 연구·교육 기능을 넘어 재현도자 제작에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수집 경향과 이왕직에서 직접 재현도자 제작을 추진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Ⅲ장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재현도자 산업을 어떠한 방식으로 장려하고 활용하였는지를 검토하고, 박물관 전시와 민간 제작소 지원이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산업정책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당시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Ⅱ.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수집과 재현도자 제작
1.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수집 경향
이왕가박물관에서 수집한 도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중 덕수품(德壽品)으로 분류되어 있고, 덕수품 중 한국도자는 총 1,928건이 확인된다. 고려시대 도자는 1,104건, 조선시대 도자 824건, 중국도자 677건이다. 이왕가박물관은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집중적으로 도자를 수집했다. 특히, 1908년과 1909년 다량의 한국도자를 수집한 이후, 1910년에는 수집량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1917년 이후 약 10년간 도자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7년부터 다시 도자 수집이 이루어졌으나, 이전과 달리 적게는 1건에서 최대 많게는 24건을 수집하는 등 소량의 도자만을 수집하였다(fig. 1).

특히 1909년 개관 이전 시기인 1908년에는 도·토기 구입 비용으로 38,828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박물관에서 진열품 수집 비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초기 소장품 형성에 있어 도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5 또한 이왕가박물관 수집 도자 중 고려청자는 1,104건으로 전체의 43%를 차지해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 이를 통해 이왕가박물관이 고려청자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6
이왕가박물관에서 고려시대 도자를 집중적으로 수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05년 을사조약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개성 일대를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로 활용하면서 유적이 훼손되고, 고려청자를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7 또한 1901년부터 시작된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을 계기로 철도망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각지의 유적이 파괴되었고,8 이 과정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1932년 이왕직에서 발행한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陶磁器部』에는 당시 이왕직의 차관이었던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 1859-1935)의 글을 통해 당시 유적에서 출토된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골동 시장에 유입되었던 상황과 이로 인해 이왕가박물관이 고려청자를 집중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9
1910년 1월 25일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에는 어원사무국 주사였던 이왕가박물관의 관료 이붕증(李鵬增)이 박물관 진열을 위해 고려자기 75종(種)을 매입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10 당시 이왕가박물관 설립과 관련하여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 주임과11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12 사무관 등 일본인 관료들이 박물관의 사무를 총괄하였음에도, 도자 수집의 실무는 조선인 관료가 담당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1910년까지 이왕가박물관의 도자 수집 과정에서 조선인 관료 역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고려자기가 골동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이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여 1908년과 1909년 한국도자를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주요 소장품을 확보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이 박물관 진열을 위한 공적 수집을 추진하였음을 보여주며, 박물관이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시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일본인 관료를 중심으로 도자 수집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13 한국도자 수집량이 급격히 감소된다. 이는 이왕직이 박물관의 새로운 진열품을 구입하기보다 기존에 확보한 소장품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운영 방침을 전환하였음을 시사한다.
2. 이왕가박물관의 도요지 조사와 비원자기(秘苑磁器) 제작
이왕가박물관에서는 1914년 진열품 구입과 더불어 전국의 도요지(陶窯址) 조사가 이루어졌다. 도요지 조사는 이왕가박물관 주임 스에마쓰 구마히코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일반적인 유적 조사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14년 4월, 스에마쓰 구마히코는 전라남도 장흥, 강진, 해남, 광주와 충정남도 부여군 일대에 소재한 고려시대 도요지를 조사하였다.14 이 조사를 시작으로 1914년 5월 16일에는 강진군 대구면(大口面)에서 고려시대 도요지를 조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폐기된 불완전한 도자기와 도편을 다수 수집하여 이왕가박물관에 보관하였다. 이 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도토(陶土)가 존재하는 토지를 발견하여 해당 부지를 매입하였다는 것이다.15
특히, 1914년 4월과 5월의 고려시대 가마유적 조사 이후, 스에마쓰 구마히코는 1914년 6월 1일 조사에서 수집한 도편(陶片)을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에 진열하고, 신문기자와 잡지사 기자들을 초청하여 새롭게 발견한 고려시대 청자요를 소개하고, 도편을 관람하게 하였다.16 이를 통해 고려 청자요의 새로운 발견이 당시 이왕가박물관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17
이후 1914년 6월 27일에는 3주간 경북지역의 달성(達城), 칠곡(漆谷), 영천(永川), 경주(慶州), 경산(慶山), 청도(淸道)와 경남지역의 밀양(密陽) 등의 유적을 방문하여 박물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참고 재료를 조사하였다.18
스에마쓰 구마히코를 중심으로 약 3개월간 이루어진 이왕가박물관의 도요지 조사는 전라남도의 고려시대 가마유적과 충청도, 경북지역의 분청사기 가마터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것으로 확인된다(fig. 2). 전라남도와 충청도, 경북지역의 도요지 조사는 이왕가박물관의 단순한 학술조사가 아니라, 도편을 수집하고 도토가 있는 토지를 매입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청자와 분청사기의 재현도자 제작을 위한 참고재료 및 자료 확보를 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왕가박물관의 가마터 조사에는 당시 교토(京都)에서 청자 제작으로 명성이 높았던 도공(陶工) 스와 소잔(諏訪蘇山, 1851-1922)이 이왕직의 임명을 받아 도요지 조사에 참여하였다.19 일본 궁내청(宮内庁)에 보관되어 있는 『왕공족록(王公族錄)』, 〈계속사업설명서(繼續事業說明書)〉에 의하면, 이왕직은 1914년 이전까지 민간 차원에서 재현도자 제작이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왕가박물관의 강진군 대구면 도요지 조사 과정에서 도자기 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도토가 다량 발견되자, 스와 소잔을 초빙하여 연구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20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왕직이 이왕가박물관 소장 명기(名器)를 바탕으로 재현도자를 제작할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위해 당시 일본 교토에서 활동한 스와 소잔을 초빙하였다는 점이다. 스와 소잔은 이시카와현 공업학교(石川県立工業學校) 조각과 교수이자, 영국박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당시 일본 도공들 대부분이 유약 실험을 통해 청자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스와 소잔은 청자 태토를 연구하여 일본에서 청자 제작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왕직은 그를 통해 재현도자 제작을 성공시키고자 하였다.21
이와 관련하여 스와 소잔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1914년 1월 이왕직에서 고려도요지를 발견한 이후 현장 조사를 위해 초빙되어 1월 조선으로 건너와 도요지 조사에 참여한 후 그해 11월에 다시 교토로 돌아갔다. 그가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창덕궁에 거주하였으며,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을 감상하였다. 교토로 돌아간 스와 소잔은 1914년 11월 이후 이왕직으로 부터 도요축조 및 제반 설계와 관련된 일을 위탁 받았고, 공장 주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5년 6월에 창덕궁 내 응봉(鷹峰) 비원(祕苑)에 도요 축조를 완성하였고, 그해 8월 조선으로 다시 건너와 새로운 가마에서 처음 소성을 시도하였다. 비원 가마에서 좋은 상태의 도자가 제작되어 그는 상으로 은배(銀盃)와 주병(酒瓶), 동인(銅印)을 하사받았고, 그후 10월에 교토로 다시 돌아갔다.22 이 같은 상황을 통해 비원 가마는 이왕직의 계획하에 1915년 축조되었으며, 재현도자 제작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왕직이 재현청자 제작을 추진하기 위해서 별도의 예산을 편성한 사실은 당시 이왕직 운용비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왕직은 고요연구비(古窯硏究費)를 1916년부터 1918년까지 3년간 사업으로 계획하였다. 고려소청자(高麗燒靑磁) 연구비는 1916년 3,000원, 1917년 4,000원, 1918년에는 3,000원으로 책정되었다. 이에 앞서 1915년에는 5,000원의 비용을 들여 도요를 축조하고 기타 설비의 설치도 완료하였다.23 고요연구비는 조선미술품제작소의 운용비용과는 별개로 이왕직에서 책정한 예산이며, 이왕직이 자체적으로 1915년 비원자기 제작에 성공한 이후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적으로 고려소청자 제작을 위한 연구가 진행된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항은 스와 소잔이 창덕궁 비원에서 제작한 재현도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스와 소잔이 비원자기에서 제작한 도자에는 굽 바닥에 ‘창덕(昌德)’과 ‘蘇山(소산)’ 인장이 찍혀 있다. 그가 1914년 비원에서 제작한 〈분청사기인화문발(粉靑沙器印花文鉢)〉(fig. 3)과 일본 다이오인(大雄院) 소장의 1917년에 제작한 〈분청사기귀얄문발〉의 굽 바닥에는 모두 ‘창덕’, ‘소산’이 찍혀있어, 창덕궁에서 제작된 비원자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1917년까지 창덕궁에서 스와 소잔이 도자제작을 이어갔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이왕직에서 고요연구비를 편성한 상황과 함께 1918년까지 창덕궁 비원에서 비원자기 제작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스와 소잔이 1917년에 제작한 〈청자음각인형문발(靑磁陰刻人形文鉢)〉과 1917-1922년 제작된 〈연리문다완(練理文茶碗)〉(fig. 4)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연리문발(練理文鉢)〉(덕수 3006)과 유사성을 보인다.24 이러한 점은 스와 소잔이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에서 도요지 조사를 수행하고 재현도자를 제작하기 위해 창덕궁에서 머물며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을 접한 경험이 그의 도자 제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25

그동안 비원자기에 대해서 미술품제작소의 설립과 민간 제작소의 제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비원자기에 관한 기록은 1918년 1월 30일 기사에서 이왕가의 헌상품의 품목에 〈비원특제상감청자화병(秘苑特製象嵌靑磁花甁)〉 1점이 확인된다.26 이어 1919년 4월 기사에는 이왕가에서 경영하는 미술품제작소의 물품이 판매가 잘된다는 내용이 보인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전년도 4월부터 시작된 미술품 제작 가운데 비원자기 도자는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비원자기’라 하는 것은 종래 이왕가에서 예전에 사기 굽는 방법을 연구한 결과로 비원에서 구운 것과 시중에 판매하는 제품과는 다르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27 이는 1919년 이전에 제작된 비원 자기는 미술품제작소의 제작품과 구별되는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1919년 무렵에는 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자기에도 ‘비원자기’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8
1914년 이왕가박물관의 도요지 조사는 재현도자 제작에 필요한 원료와 재료를 조사하는 목적을 지녔으며, 이왕가박물관이 수집한 도자 역시 단순히 박물관의 교육·연구용 자료가 아니라 재현도자 제작을 위해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와 소잔은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왕직에 초빙되어 도요지 조사에 참여하였고, 이후 창덕궁 비원에 가마를 설계, 축조하여 비원자기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비원자기의 제작시기를 1915년으로 상정할 수 있으며, ‘비원자기’란 이왕가가 주체적으로 재현도자 제작 방식을 연구하여 비원에서 제작한 도자기를 의미한다. 또한 비원 가마에서 축적된 제작 기술이 이후 이왕가 미술품제작소로 이어져 활용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수집과 이왕직의 비원 가마 운영 상황을 함께 살펴보면,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루어진 도요지 조사는 단순한 학술 목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원료 조사를 통해 재현도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 조성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왕가박물관은 한국도자를 수집하고 진열함으로써 새로운 공예미술의 진흥을 내세웠지만, 동시에 소장품을 재현하여 상품화하려는 목적도 함께 내포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조선총독부의 재현도자 산업 정책
조선총독부는 1912년 공예산업 발전을 명목으로 설립된 중앙시험소(中央試驗所), 일본인이 운영한 ㈜조선미술품제작소, 삼화고려소, 한양고려소 등의 여러 민간 제작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왕직에서 비원자기 제작에 성공한 이후, 관립제작소와 사립제작소를 통한 재현도자 산업을 본격적으로 장려하는 산업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재현도자 산업을 단순한 공예 생산 차원을 넘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하였다. 이에 대해서 당시 신문기사 자료를 중심으로 재현도자 산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장려되고 활용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총독부의 재현도자 산업 장려
1912년 10월 1일부터 11월 29일까지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는 척식박람회(拓殖博覽會)가 개최되었다. 박람회에서는 조선과 대만, 관동주(關東州), 화태(樺太), 북해도(北海道)의 제작품을 수집하여 식민지의 출품물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척식 상황을 일본에 소개하였다. 이 박람회는 제국주의적 국민성을 형성하고 식민지의 발전과 개량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된 행사였다.29
박람회 출품작 중 특이점은 박람회 전시장에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을 출품하여 전시를 한 점이다(fig. 5).30 이러한 점은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이 박물관 본연의 목적을 넘어, 식산산업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해당 박람회에서는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이 식민지 산업과 제국주의적 홍보의 맥락 속에서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1

독일의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의 설립자인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1856-1914)는 한국 미술품 수집을 1905년과 1910년, 1911년 세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70점 이상의 고려청자를 수집하였다. 그는 본격적인 수집에 앞서 고미야 미호마쓰를 만나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을 직접 살펴보았으며, 고려청자의 조형미와 상감기법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였다.32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은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다양한 기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는 이후 국내외 컬렉터들이 수집 대상을 선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모본으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도자에 대한 홍보는 1912년 5월 5일 『경성일보』에서 확인된다. 기사에는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청자투각연화동자문주자(靑磁透刻蓮花童子文注子)〉(덕수 443)의 사진이 ‘高麗酒煎子(李王家博物館所藏)’라는 설명과 함께 실려 있어 박물관 진열품이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홍보되었음을 알 수 있다.33
1933년 개성박물관의 고려청자 전시에 관한 기사에는 “세계에서 다시 구할 수 없는 일품이 다수 출품되었다.”, “세계 학계의 자랑인 고려청자를 진열하였다.”라고 전하며 고려청자의 예술성과 가치를 강조하였다.34 이러한 홍보는 표면적으로는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과 함께 조선의 문화유산이 가지는 예술성과 우수성을 부각하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재현도자 산업과 연계하여 박물관 소장품의 가치를 부각하려는 의도도 함께 내포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39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는 11월 1일부터 7일까지 ‘고려도자전(高麗陶磁展)’을 개최하였다. 이 특별전에는 총 125점이 출품되었으며, 청자, 소소(素燒), 회고려(繪高麗), 고려 고분 출토의 중국 백자 등 다양한 일품(逸品)의 고려 및 중국 도자가 전시되었다.35 이러한 특별전은 고려도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동시에, 재현도자 산업의 기반이 되는 고려도자의 가치를 부각하려는 목적과도 연결된다. 당시 이왕가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본인과 외국인이 경성을 방문했을 때 반드시 찾는 주요 관광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박물관 전시는 재현도자의 판매와 소비를 촉진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3월 27일 당시 경성부 동숭동에 중앙시험소를 설립하고 재현도자 제작과 관련된 기술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는 민간제작소의 도자산업에 보다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5년 3월 6일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파리박람회에 출품할 조선 미술공예품을 선별하면서 삼화고려소(三和高麗燒)의 도미타 기사쿠(富田義作, 1858-1930)의 작품 5점을 선정하였다.36 도미타 기사쿠는 1922년 이왕직이 운영하던 미술품제작소를 인수하여 운영했으며, 삼화고려소와 한양고려소를 운영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총독부가 재현도자를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 수출품이자 식민지 산업정책의 주요 대상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총독부의 도자산업에 관한 관심은 다음의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28년 6월에는 4대 총독인 야마나시 한조(山梨 半造, 1864-1944)의 순시(巡視) 일정에 삼화고려소가 포함되어 있었다(fig. 6).37 야마나시 한조 총독이 진남포의 삼화고려소를 방문한 이후,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는 삼화고려소의 제품이 조선 특산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도미타 기사쿠가 오랜 기간 희생을 감수하며 생산을 지속해 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산업 장려 차원에서 연구비 명목으로 12,000원의 보조금을 지급하였다.38 이러한 사례는 조선총독부가 민간 제작소에 연구비를 지원하며 재현도자 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조선총독부는 재현도자 산업이 단순한 공예 생산을 넘어, 식민지 산업 정책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회령소(會寧燒)의 최면재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세 차례 입선한 인물로, 전람회 이전부터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29년 2월 1일부터 3일까지 경성 삼월백화점(三越百貨店, 미쓰코시백화점)에서 개인 도기전을 개최하였다(fig. 7). 당시 기사에서는 그의 작품이 조선 공예미술품으로서 큰 기대와 앞으로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하였다.39 특히 야마나시 한조 총독이 직접 전시를 관람하고 작품에 대해 ‘일부 신비로운 분위기가 돋보인다’, ‘산지에 대한 연구와 고찰이 더욱 이루어진다면 더 뛰어난 작품이 될 것’, ‘조선의 도자기는 역시 특별하다’는 평가를 남겼다.40 최면재의 개인 전람회에 총독이 방문한 점은 조선총독부가 재현도자 제작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재현도자 산업의 제작 현황과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현재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을 범본으로 삼아 제작된 재현도자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재현도자가 해외로도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20-1930년대 개인 소장의 한양고려소 제작 〈청자상감주자〉(fig. 8)는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덕수1717)을 재현한 도자임을 알 수 있다(fig. 9).


또한 교토의 네이라쿠 미술관(寧樂美術館) 소장품 가운데에는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청자인형연적〉(덕수 1726)을 범본으로 제작한 재현도자가 확인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형태의 청자는 미국의 개인 소장품(fig. 10)과 2023년 3월 21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 출품작(fig. 11)에서도 확인된다.41


이와 함께 이왕가박물관의 〈청자구룡형주자〉(fig. 12)를 범본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가 구입된 사례도 확인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덕수품 5324와 5636 두 점의 〈청자구룡형주자〉(fig. 12)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와 유사한 기형의 청자주자가 시애틀 아시아 미술관(fig. 13)과 보스턴 미술관(fig. 14)에도 소장되어 있다.42 미국 미술관 소장품 두 점은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에 비해 구룡의 안면(顔面) 표현과 하단 발 부분, 연판문 등의 세부 표현이 다소 둔화된 특징을 보인다. 또한 유사한 형식의 청자주자는 네이라쿠 미술관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청자구룡형주자〉(fig. 15)은 이왕가박물관 소장 〈청자구룡형주자〉(fig. 12)를 원형으로 삼아 제작된 재현도자이다. 한편 미국 미술관에서 소장한 두 점의 청자주자는 모두 193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미술상인을 통해 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이 국내외 개인 컬렉터와 미술관의 수집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현도자 제작의 원형으로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총독부가 1927년에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제8권에는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고려도자가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민간 제작소에서 재현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3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 출품된 출품작에서도 이왕가박물관 소장 고려청자를 재현도자 제작의 범본으로 활용된 사례가 확인된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공예부가 신설되면서 민간제작소 직원들이 전람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람회는 본래 창작 공예품을 선보이는 자리였지만, 삼화고려소, 한양고려소, 해시상회(한락요) 등의 제작자들이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고려청자를 재현한 작품을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차지하면서 재현도자 산업을 홍보하는 장으로 기능하였다(table. 1).44
Table 1.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 도자 출품자〉 (1932-1944), Ceramic Exhibitors in the Crafts Section of the Joseon Art Exhibition (1932-1944) (Figure by the author)
| 番號 No. | 所屬 Affiliation | 出品作家 Exhibiting Artist | 出品回次 Exhibition No. | 數量(件) Quantity (Cases) | 居住地域 Place of Residence |
|---|---|---|---|---|---|
| 1 | 三和高麗燒 Samhwa Koryŏso | 濱田美勝 Hamada Yoshikatsu | 11th | 1 | Kyŏngsŏng |
| 2 | 濱田麗蜂 Hamada Reihō | 13th | 1 | Kyŏngsŏng | |
| 3 | 朝井淸 Asai Kiyoshi | 21st, 22nd, 23rd | 4 | Chinnamp'o | |
| 4 | 漢陽高麗燒 Hanyang Koryŏso | 宗高猛 Munetaka Takeshi | 11th, 12th, 13th, 14th, 15th, 16th, 17th, 18th, 20th | 15 | Kyŏngsŏng |
| 5 | 藤木市三郎 Fujiki Ichisaburō | 18th | 1 | Kyŏngsŏng | |
| 6 | 閑樂窯 Hannakyo | 岩宮庄兵衛 Iwamiya Shōbei | 12th, 13th, 14th, 15th, 16th, 17th, 18th, 19th, 22nd, 23rd | 16 | Kyŏngsŏng |
| 7 | 海井辨藏 Kai Benzō | 11th, 12th | 2 | Kyŏngsŏng | |
| 8 | 조창룡 Cho Ch'angyong | 22nd | 1 | Kyŏngsŏng | |
| 9 | 華麗燒 Hwaryŏso | 吉田吉武Yoshida Yoshitake | 15th, 17th | 4 | Kyŏngsŏng |
| 10 | 鷄龍窯院 Kyeryong Yowŏn | 杉光武右衛門 Sugimitsu Takeemon | 13th, 14th, 15th, 16th, 17th, 18th, 20th, 23th | 14 | Taejŏn, Ch'ungnam |
| 11 | 會寧燒 Hoeryŏngso | 최면재 Ch'oe Myŏnjae | 12th, 13th, 14th | 5 | Hambuk, Hoeryŏng, Kyŏngsŏng |
| 12 | - | 佐野勇樂 Sano Yūraku | 12th | 1 | Kyŏngsŏng |
| 13 | - | 土屋耕造 Tsuchiya Kōzō | 14th | 1 | Kyŏngsŏng |
| 14 | - | 大橋武未 Ōhashi Takemi | 11th, 12th | 5 | Kyŏngsŏng |
| 15 | - | 井手盛次 Ide Seiji | 11th, 15th, 16th, 17th, 18th | 9 | Chŏnbuk, Koch'ang |
| 16 | - | 井出盛二 Ide Seiji | 14th | 2 | Chŏnbuk |
| 17 | - | 土屋耕造 Tsuchiya Kōzō | 15th | 1 | Kyŏngsŏng |
| 18 | - | 土田正藏 Tsuchida Shōzō | 13th | 1 | Kangwŏn |
| 19 | - | 김완배 Kim Wanbae | 13th | 2 | Kyŏngsŏng |
| 20 | - | 김재석 Kim Chaesŏk | 22nd | 2 | Kyŏngsŏng |
| 21 | - | 김재성 Kim Chaesŏng | 21st | 2 | Ch'ŏngdo |
| 22 | - | 이윤규 Yi Yun'gyu | 18th | 1 | Chŏnnam |
| 23 | - | 장규환 Chang Kyuhwan | 14th | 1 | Kyŏngsŏng |
| 24 | Painter | 堅山坦Katayama Hiroshi | 14th | 1 | Kyŏngsŏng |
| 25 | Jury Member | 淺川伯敎Asakawa Noritaka | 18회, 19회, 20회, 21st, 23rd | 9 | Kyŏngsŏng |
특히 1936년과 1938년에 두 차례 화려소(華麗燒) 소속으로 출품한 요시다 요시타케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1933년 4월 26일 『경성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20년간 재현도자 제작을 연구한 끝에 1933년 화려소 가마에서 제작에 성공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기존 고려소 제품을 능가하는 수준의 일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fig. 16).45 1934년에는 남산의 경성미술구락부에서 화려소 도자가 전시되었고, ‘국보자기’라는 찬사를 받았다.46 특히 그는 과거 이왕가박물관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박물관 진열품을 직접 조사·연구한 경험이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았다. 이는 이왕가박물관 소장 도자가 당시 도자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박물관 소장품이 재현도자 제작의 중요한 참고 대상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 출품자 가운데 상당수가 민간제작소 소속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소속을 명기한 채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전람회는 단순한 창작 공예품 발표의 장을 넘어 제작소 상품을 홍보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을 재현한 도자를 공식적으로 소개하고, 민간 제작소의 도자 제작 산업을 장려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기사와 엽서 등 홍보물을 통해 민간제작소인 고려소가 활발하게 운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의 사진엽서에는 고려소 도공이 제품을 제작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fig. 17).47 또한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사진엽서에서도 강진의 고려소 유적을 소개하고, 고려소의 제작품을 광고하는 사례가 확인된다(fig. 18).


해시상회(海市商會)의 경우에는 나전칠기와 한락요에서 제작된 재현도자를 활용한 기념품이나 답례품과 관련된 광고를 지속적으로 신문에 게재하였다. 1933년 12월 11일 기사에는 1933년 12월 10일부터 25일간 나전칠기와 한락요의 고려소 자기를 대상으로 연말 세일을 진행하고, 구매시 운반비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내용이 확인된다.48 이러한 신문광고는 재현도자와 공예품을 판매하는 상점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해시상회는 경성 시가지도를 제작하여 적극적인 홍보를 이어갔다. 본정 2정목에 위치한 해시상회가 발행한 시가지도 상단에는 ‘선물의 용무는 꼭 해시상회에(おみやげの御用は是非海市商會へ)’라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 경성의 중요 관광지가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fig. 19). 해시상회는 오늘날 충무로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당시 명동과 충무로 일대는 본정(本町)으로 불리며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였던 공간이었다. 해시상회는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때 구입할 선물과 기념품 판매하기 위한 적극적인 홍보 전략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49

2. 조선수출공예협회 설립과 식민지 정책
앞서 살펴본 조선총독부의 도자 산업에 대한 관심은 민간 제작소의 도자 산업 장려와 더불어 1939년 조선수출공예협회(朝鮮輸出工藝協會)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조선수출공예협회는 민간 제작소 도자를 비롯한 공예품을 미국과 유럽 등 제3국에 수출하기 위한 목적 아래, 수출용 공예품을 선별하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50
조선수출공예협회 초대 회장인 마쓰바라 준이치(松原純一)는 1910년 이전부터 제일은행 한성지점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조선은행 이사와 만주흥업은행(滿洲興業銀行) 부총재를 역임하였으며.51 1937년 12월 7일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은행 총재로 취임하였다.52 그는 조선에 거주하는 동안 한국도자를 수집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1935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15권에 그가 수집한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가 수록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table. 2).
Table 2. 〈『조선고적도보』 15권에 수록된 마쓰바라 준이치 소장 한국도자〉, Korean Ceramics in the Matsubara Jun’ichi Collection Published in Volume 15 of the Chosŏn Historic Remains Illustrated Catalogue (Figure by the author)
| 番號 No. | 作品名 Title | 圖版番號 Plate No. | 備考 Note |
|---|---|---|---|
| 1 | 〈粉靑沙器壺〉, Punch'ŏng Stoneware Jar with Brushed Slip Design | 6087 | 朝鮮粉靑 Chosŏn Punch'ŏng stoneware |
| 2 | 〈粉靑沙器彫花文甁〉, Punch'ŏng Stoneware Bottle with Incised Floral Design | 6093 | |
| 3 | 〈粉靑沙器鐵畫甁〉, Punch'ŏng Stoneware Bottle with Iron-Painted Design | 6236 | |
| 4 | 〈粉靑沙器鐵畫甁〉, Punch'ŏng Stoneware Bottle with Iron-Painted Design | 6249 | |
| 5 | 〈白磁陽刻十長生文注子〉, White Porcelain Ewer with Raised Ten Symbols of Longevity Design | 6309 | 朝鮮白磁 Chosŏn White Porcelain |
| 6 | 〈白磁銅畫蓮花文壺〉, White Porcelain Jar with Copper-Painted Lotus Design | 6350 | |
| 7 | 〈白磁鐵畫陽刻葡萄文杯〉, White Porcelain Cup with Raised Grape Design in Iron Paint | 6389 | |
| 8 | 〈白磁靑畫鴨形注子〉, White Porcelain Duck-Shaped Ewer with Cobalt-Blue Decoration | 6447 | |
| 9 | 〈白磁靑畫獸鈕文硯滴〉, White Porcelain Water Dropper with Animal-Shaped Knob in Cobalt Blue | 6478 | |
| 10 | 〈白磁靑畫硯滴〉, White Porcelain Water Dropper with Cobalt-Blue Decoration | 6479 | |
| 11 | 〈白磁靑畫獬豸形硯滴〉, White Porcelain Haet'ae-Shaped Water Dropper with Cobalt-Blue Decoration | 6515 | |
| 12 | 〈白磁靑畫栗文楪匙〉, White Porcelain Dish with Chestnut Design in Cobalt Blue | 6518 | |
| 13 | 〈白磁靑畫十長生文楪匙〉, White Porcelain Dish with Ten Symbols of Longevity Design in Cobalt Blue | 6539 | |
| 14 | 〈白磁靑畫唐草文楪匙〉, White Porcelain Dish with Arabesque Design in Cobalt Blue | 6540 | |
| 15 | 〈白磁靑畫山水文三層盒〉, Three-Tiered White Porcelain Box with Landscape Design in Cobalt Blue | 6557 | |
| 16 | 白磁靑畫透刻龍虎文枕〉, White Porcelain Openwork Pillow with Dragon and Tiger Design in Cobalt Blue | 6562 | |
| 17 | 〈白磁靑彩注子〉, White Porcelain Ewer with Green Glaze Decoration | 6574 | |
| 18 | 〈白磁靑彩硯滴〉, White Porcelain Water Dropper with Green Glaze Decoration | 6580 | |
| 19 | 〈白磁靑畫鐵畫草文楪匙〉, White Porcelain Dish with Floral Design in Cobalt Blue and Iron Paint | 6586 | |
| 20 | 〈白磁靑畫銅畫梅梅鳥竹文甁〉, White Porcelain Bottle with Plum Blossom, Bird, and Bamboo Design in Cobalt Blue and Copper Paint | 6602 |
마쓰바라 준이치는 조선은행 총재 취임 다음 해 1939년 1월 18일 조선수출공예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협회의 설립 목적은 공예품을 제3국으로 수출하여 무역을 진흥하는 데 있었다.53 1939년 12월 28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조선수출공예협회의 설립 목적과 배경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郎, 1874-1955)가 추진한 내선일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54
그는 조선의 생산력 확대와 대외무역 진흥을 식민지 정책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였으며,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였던 ‘생산력 확충과 대외무역의 진흥’은 조선수출공예협회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즉, 조선의 공예품 생산력을 확대하고 이를 해외에 수출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55
조선수출공예협회는 조선산업장려금으로 부산조선방적회사로부터 20만원의 기부금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63,300원이 협회 운영비로 배정되었다. 또한 삼정물산(三井物産)이 3,000원, 가승물산(加藤物産)이 1,000원을 기부하는 등 총액은 약 12만원에 달하였다.56 특히 삼정물산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다수의 진열품을 기증하였고, 개성부립박물관 설립에도 기부금을 제공한 기업으로,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조선 공예품의 수출산업에도 적극 관여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수출공예협회는 1939년 수출품 선별을 위해 수출공예품전(輸出工藝品展)을 개최하였으며, 총 480점 가운데 274점이 입선하였다. 입선자 가운데에는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서 특선과 입선을 경험한 계룡요원의 스기미츠 타케에몬(杉光武右衛門), 삼화고려소의 하마다 레이호우(濱田麗蜂), 한태익(韓泰益), 김완배(金完培) 등 민간 제작소 소속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7 이는 재현도자 제작자들이 단순한 공예 생산자를 넘어 수출용 공예품 제작의 핵심 인력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계룡요원의 입선 사례는 1939년 11월 17일자 『경성일보』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조선수출공예협회가 주최한 제1회 조선수출공예전람회에서 스기미츠 타케에몬의 출품작이 3등으로 입선하였다는 내용이다.58 계룡요원의 출품작은 외국인의 취향에 맞춘 전기 스탠드를 응용한 작품도 출품하였는데, 이는 수출 목적에 부합하는 상품 개발 전략이었다. 이러한 점은 계룡요원이 단순히 전통 도자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상품 개발까지 시도하였음을 보여준다.59
계룡요원은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 스기미츠 타케에몬이 처음 출품한 이후, 8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하였고, 총 14건이 입선하였다. 이후 1935년 6월 6일 제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9-1956)는 대전의 군시제사(郡是製絲)를 방문한 뒤 계룡소 공장을 시찰하고 강습생들을 격려하였으며, 대전역 귀빈실에서 계룡소 작품을 감상하였다(fig. 20). 우가키 총독은 이때 스기미츠 타케에몬의 화병 두 점에 직접 휘호를 남기기도 하였다.60 이는 도자 산업이 조선총독부의 주요 산업 정책 가운데 하나였으며, 총독부가 이에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앞서 야마나시 한조 총독이 1928년 삼화고려소를 순시하고 1929년 회령소 전람회를 방문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우가키 총독의 계룡소 방문 역시 도자 산업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나미 지로 총독 시기에 도자 산업이 수출산업으로 더욱 확대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42년 6월 23일 『매일신보』 기사에서는 조선수출공예협회가 조선 내 일본산 도자기의 소비는 증가하는 반면, 조선에서 제작된 도자기의 소비는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생산되었으나 소비되지 못한 도자기를 미국과 유럽 등 제3국으로 수출해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었다.61
이어 같은 해 8월 20일 『경성일보』 기사에는 조선수출공예협회가 조선도자기공예진흥위원회를 설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협회는 조선 각지에 산재한 150개의 공장 중 장래성이 있는 곳을 선별하여 도자 생산 기반을 정비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에 기술자를 파견하고, 도자 제작에 필요한 점토와 연료 등 원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회령, 장진, 평양, 경주, 전북, 고령 등 조사하였다. 이는 조선수출공예협회가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도자 공장을 활성화하고, 양질의 수출용 도자의 생산을 확대하여 이익을 창출하려는 식민지 정책을 추진하였음을 보여준다.62
Ⅳ. 맺음말
본고에서는 20세기 전반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수집이 단순한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시, 교육의 차원을 넘어, 근대 재현도자 산업의 전개와 일제의 식민지 공예·경제 정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왕가박물관이 1908년과 1909년에 집중적으로 수집한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조선백자는 이후 재현도자 제작의 핵심 범본으로 활용되었으며, 도요지 조사와 비원자기 제작, 고요연구비 편성과 같은 제도적 지원 속에서 지속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재현도자는 한국 전통도자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선총독부의 중앙시험소와 민간 요업소,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공예 생산력과 경제적 가치를 선전하고 수출을 도모하는 정책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이왕가박물관의 한국도자 수집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의미와 함께, 식민지 통치 이데올로기와 산업 정책이 반영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박물관 소장품은 재현도자의 제작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으로 기능하였으며,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문화와 공예를 산업화·상품화하는 데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록 본 고에서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와 민간 제작소의 구체적인 산업 구조와 운영 양상까지 충분히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으나, 이는 향후 축척되는 자료와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해 나가고자 한다. 앞으로는 개별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뿐 아니라, 수집과 재현도자의 제작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활용 양상을 함께 검토함으로써, 20세기 전반 한국 도자사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