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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rticle

A Preliminary Study on the Seven-Treasure Aśoka Pagoda Excavated from the Underground Palace of the Zhenshen Pagoda at Changgansi Temple in Nanjing, Northern Song

이승혜

삼성미술관 Leeum

Published: January 2017 · No. 295 · pp. 15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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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중국 강소성 남경시의 古長干里에 위치한 명대의 大報恩寺 유적은 남북조시대의 대찰인 長干寺가 위치했던 곳이다. 장간사는 석가모니 부처의 眞身舍利를 모신 阿育王塔을 봉안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특히 梁 武帝 시기에는 황실 후원의 대규모 사리공양으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던 강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아육왕탑은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 즉 阿育王이 기원전 3세기경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상의 八萬四千塔을 지칭한다. 그러나 중국의 아육왕탑은 실제로는 불교가 전래된 이후 건립됐다고 간주된다. 남북조시대 이래 당대에 이르기까지 집록된 아육왕탑에 대한 고사와 영험담은 아육왕탑이 역사적인 사실이나 형태와는 무관하게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聖物로 널리 존숭됐음을 알려준다.*br* 장간사의 명성 역시 아육왕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장간사와 아육왕탑의 명성은 사찰이 부침을 겪으며 폐사된 이후에도 여러 문헌기록을 통해 널리 유통되며 신앙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장간사의 오랜 역사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북송대 장간사와 그 아육왕탑의 모습은 2007년 2월에서 2010년 말까지 발굴된 대보은사 유지에서 大中祥符 4년(1011)에 건립된 眞身塔의 지궁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장간사 진신탑 지궁과 그 출토유물은 문헌과 전승을 통해 형성된 아육왕탑에 대한 북송 불교계와 신앙대중의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장간사 진신탑 지궁은 여타의 동시대 사리탑 지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古式의 구조로 건설됐기 때문에 발굴이 완료된 직후부터 중국 고고학계의 크나큰 관심을 받았다.*br* 이 논문은 진신탑 지궁의 구조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를 장간사의 역대 아육왕탑 탑기 발굴과 재건에 대한 문헌기록 및 관련된 사리탑 지궁의 발굴성과와 비교하여 재검토했다. 이를 바탕으로 북송대에 고식의 지궁이 건설된 이유와 의미를 장간사 아육왕탑의 역사에 대한 당시 불교계와 신앙대중의 인식에서 찾았다. 이어서 지궁 출토의 多重 사리장엄구 중 七寶阿育王塔을 오대 이후 강남지역에서 유행한 탑형사리장엄구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동진대부터 시작된 장간사 아육왕탑의 발굴과 재매납의 전통이라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고찰했다. 이를 통해 북송대 칠보아육왕탑의 후원자들이 양 무제가 조성했다는 七‘ 寶塔’을 그 원류로 삼았음을 밝히고, 북송대 아육왕탑 신앙에서 이 사리장엄구가 갖는 특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북송대 진신탑의 후원자들은 동오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간사 아육왕탑의 오랜 역사, 그리고 발굴과 재매납이라는 장간사 아육왕탑 공양 특유의 역사적 패턴을 문헌과 전승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동시대 사리탑 지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식의 지궁 구조, 탑형사리기에 사용된 칠보라는 특별한 재료, 그리고 아육왕탑이란 명칭은 이를 입증한다. 결국 진신탑 지궁의 건설과 칠보아육왕탑의 조성은 여타의 아육왕탑과는 구별되는 장간사 아육왕탑 공양의 역사를 재현하려는 의도의 발로, 즉 복고적 행위였다. 장간사 진신탑과 지궁의 후원자들은 과거 장간사 아육왕탑을 정치적인 목적에서 후원하고 공양했던 왕조의 통치자들과는 달리 이 지역의 僧尼와 신앙대중이었다. 황권이 불교계를 강하게 통제했던 북송 초의 상황을 고려할 때, 진신탑의 후원자들이 복고를 통해 회복하고자 희망했던 것은 양 무제가 보여줬던 것과 같은 황제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