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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rticle

A Study on the Stone Figures of the Tombs of Prince Euneon and Grand Prince Jeongye

김민규

간송미술관

Published: January 2017 · No. 295 · pp. 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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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조선 25대 국왕 哲宗은 恩彦君 李䄄의 손자이자 全溪大院君 李珖의 아들이었다. 恩彦君은 형인 正祖의 政敵으로 인식되어 수많은 逆謀 사건에 휘말렸으나 정조의 보호아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뒤 처형되고 자식들도 여러 차례 정쟁에 휘말려 죽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종이 즉위하여 이들에 대한 復權 및 追崇이 진행되었다. 그 중에 墓所를 改修하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br* 1849년 6월 9일에 철종이 즉위하고, 6월 24일부터 철종 선조의 묘소 修築의 명이 내려진다. 그래서 8월에 江華에서 石材를 채취하고, 석물제작은 1850년 9월에 대부분 완료되었다. 그리고 신도비가 1851년 10월경 완료되는 것으로 묘소 개수는 마무리 되었다.*br* 이때 제작한 석물들은 龜趺神道碑와 武石人, 長明燈 등이었으며, 귀부신도비와 무석인은 당시 매우 희귀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석물들이 제작된 것은 석물 追設 典據를 宣祖의 私親인 德興大院君 墓로 삼았기 때문이었다.*br* 이러한 석물 중에서 武石人은 조선시대 왕릉 무석인의 두 가지 큰 계통인 ‘매듭형 外衣’와 ‘天衣形 內衣’가 각각 은언군 묘와 전계대원군 묘에 적용되었다. 장명등은 문양이 원형틀 안에 과일을 조각하는 형식이 은언군 묘, 네모틀 안에 모란을 조각하는 것은 전계대원군 묘에 적용되었다.*br* 이것은 이 석물들의 제작자가 조선의 역대 왕릉 석물에 대한 깊은 연구를 진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다. 또한 얼굴 표현을 비롯해 전체적인 조각 수법이 19세기 초 매우 형식화되었던 것을 점차 탈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r*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이 石役의 監董官인 李世玉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畵師 출신인 이세옥은 여러 차례 왕릉 석물 감독을 하면서 실력을 쌓았고 이것이 표출된 것이 이 작품들이다. 이후 이세옥은 景福宮 再建 때 석물 감독을 담당 하여 光化門 獬豸像 등 우수한 석조문화재를 남겨놓았다.*br* 은언군과 전계대원군 묘 석물은 국왕의 私親 묘소라는 점에서 매우 특수한 작품들이다. 여기에 이세옥 등 감독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덕흥대원군 묘의 체제를 따르는 典據를 마련하였다. 또 역대 왕릉 석물을 참고하고, 조각 기술을 끌어 올려 우수한 작품들이 제작된 중요한 석조미술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