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불국사 사리탑의 流轉과 식민주의
인천시립송암미술관
발행: 2018년 1월 · 298호 · pp. 127-153
본문 보기
초록
이 글에서는 불국사 사리탑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1904년부터 해방 이후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기까지의 流轉 과정을 ‘식민주의’라는 문제틀 속에서 살펴보았다.*br* 경주 불국사 비로전 옆에는 사리탑이 한 구 있다. 이 사리탑은 韓末 일본으로 반출되어 행방불명되었다가 1933년에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그간 이에 대해서는 일제의 문화재 약탈이라는 차원에서 언급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최근 공개된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와 『関野貞日記』를 통해 사리탑의 반출 경위, 일본에서의 전전, 조선으로의 귀환 과정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여기에는 사리탑을 반출한 오사다 신조, 이를 비장하고 있었던 시라이시 타시로, 사리탑을 매수하여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사업가 나가오 긴야,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당시의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그리고 일본인 관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그 중심에 있었다.*br* 조선 병합 전, 세키노 다다시는 불국사 사리탑을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석등”이라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도리어 화가 되어 사리탑 반출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역설적이게도 內鮮融和의 기치 하에 사리탑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명분 또한 “신라문화의 精髓”라는 그의 평가 때문이었다. 세키노 다다시의 평가가 불국사 사리탑을 조선과 일본에서 流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br* 세키노 다다시 死後 고유섭은 불국사 사리탑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주장하였고, 해방 이후 그의 주장은 정설로 굳어져 갔다. 이렇게 신라의 것에서 고려의 것이 된 불국사 사리탑은 1970년대 불국사 복원 과정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당시의 복원 목표는 신라시대의 상징적 존재인 불국사를 복원하여 ‘찬란한 신라문화의 精華를 재현’한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난관이 많았다. 특히 사리탑과 관련해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정설과 그것이 위치하게 될 신라문화를 재현할 불국사 사역 사이의 모순을 피하기 어려웠다. 결국 사리탑 보호각 파손 사고와 이 사고를 계기로 이루어진 장소 재선정 논의 속에서 불국사 사리탑은 원래 있었던 비로전 앞이 아닌 비로전 옆으로 치워져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br* 근현대 불국사 사리탑의 流轉, 즉 일본으로의 반출과 조선으로의 귀환, 그리고 해방 후 불국사 내에서의 이동 모두는, “조선의 불교미술은 통일신라시대에 정점을 이루고, 그 이후로는 쇠퇴하였다”는 식민주의 인식의 자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