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the Narrative of Legitimacy: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Yongle’s 1419 Gift of Paintings to Chosŏn
1 Seoul National University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content and production context of the five paintings presented in 1419 by the Yongle Emperor (永樂帝, r. 1403~1424) to the kings of Chosŏn. The works depict exotic animals such as the giraffe, lion, and zebra, as well as miraculous Buddhist manifestations at sites later identified as the Dabao'en Monastery (大報恩寺) in Nanjing and the Xiantong Monastery (顯通寺) on Mount Wutai. While previous scholarship has interpreted Yongle-era paintings of auspicious signs (祥瑞) largely as tools for legitimizing the emperor’s rule after the Jingnan (靖難) campaign, this study reconsiders their significance by focusing on the concentrated production of visual representations of auspicious portents in 1419. The animal paintings draw on real creatures brought to the Ming court through Zheng He’s (鄭和, 1371~1433) maritime expeditions and were presented as heavenly portents whose appearance in Beijing helped sacralize the nearly completed new capital. The Buddhist paintings, created in response to signs reported after the dissemination of the Songs for the Names of Various Buddhas and Bodhisattvas (諸佛世尊如來菩薩尊者名稱歌曲), visualized miraculous events that shaped the emperor’s image as a ruler endowed with extraordinary spiritual authority comparable to a universal sovereign (cakravartin). Placed within the political and religious context of 1419, the presentation of these paintings to the Chosŏn mission was closely connected to King T'aejong’s (太宗, r. 1401~1418) decision to dispatch his son, Kyŏngnyŏng-gun (敬寧君, 1395~1458), as an envoy of exceptional status. This context helps explain why the delegation formally viewed auspicious portents before receiving the paintings, a procedure that reveals how the Yongle court extended its commemorative practices into the sphere of foreign diplomacy.
Ⅰ. 서론
조선 世宗(재위 1418~1450) 원년[永樂 17년, 1419] 12월, 북경에 파견되었던 敬寧君(13
현대의 미술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회화 장르의 구분 방식에 따르면 다섯 점의 그림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기린, 사자, 복록을 그린 세 점의 그림은 동물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翎毛畵에 속한다. 반면에 수현사와 보탑사에서 나타난 佛敎的 異蹟을 묘사한 두 점의 그림은 佛敎繪畵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이 그림들을 모두 “祥瑞之圖” 곧 祥瑞 현상을 묘사한 繪畵로 이해하였다.4 상서는 하늘이 임금의 어진 정치에 감응하였을 때 세상에 나타나는 吉兆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희귀한 동물과 식물, 보기 드문 자연 현상 등이 상서로 해석되었다. 통치자의 仁德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상서는 그림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서 주제의 회화는 중국에서 한나라 시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그 대표적인 사례가 北宋(960~1127)의 徽宗(재위 1100~1126)이 제작하였다고 알려진 遼寧省博物館 소장의 <瑞鶴圖>
중국에서 상서를 주제로 한 그림이 고려나 조선 왕실에 알려진 것은 영락 연간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고려 시대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116년, 金富軾(1075~1151)이 포함된 고려 사신단이 휘종의 萬壽節을 축하하기 위해 북송의 수도 開封을 방문했다. 휘종은 이들에게 개봉의 宣和殿에서 여러 회화를 감상하게 하였다.7 이 그림들에는 휘종 시대의 상서, 특히 道敎적 상서가 묘사된 회화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8 당시 김부식 일행이 감상한 《太平睿覽圖》 2冊은 《宣和睿覽冊》으로 <서학도>, <祥龍石圖>
휘종의 그림들은 김부식이 언급하였듯이 송 황실 내부에서 “비밀스럽게 감상[秘玩]”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고려 왕실에 하사되지는 않았다.11 실제로 중국 황제가 고려나 조선 사신에게 織物, 가죽, 銀子 등의 답례품이 아닌 繪畫를 공식 예물로 하사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12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였을 때 명 초에 영락제가 조선 사신단의 귀국을 늦추면서까지 이 그림들을 반드시 가지고 돌아가도록 요구한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다섯 점의 그림을 단순한 의례적인 예물로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면 영락제가 경녕군 일행에게 하사한 그림들은 무엇을 묘사한 것이며, 그는 왜 이를 제작하여 조선 국왕에게 전달하도록 했을까?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기존 연구는 영락 연간의 祥瑞를 주제로 한 회화를 靖難의 變으로 즉위한 영락제가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활용한 시각물로 이해해 왔다.13 즉 선행 연구는 상서 주제의 회화를 주로 영락제 즉위 이전의 특정 정치적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에 반해 본 연구는 조선 사신단이 도착하기 직전인 1419년 여름을 전후하여 상서 주제의 회화가 명 궁정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작품들이 형성된 실제 역사적 맥락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영락제가 父親 洪武帝(재위 1368~1398)와 달리 즉위 이후 상서 현상을 회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기념하는 관행을 궁정 내에 정착시켰다는 점에 주목하였다.14 이를 바탕으로 영락제가 조선 사신단에 이 그림들을 하사한 배경을 검토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표이다.
Ⅱ. 영락제가 하사한 그림의 내용
조선 왕실에 선물된 그림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15세기 전반 명에서 제작된 宮廷繪畵와 조선과 명나라 관료들의 文集 및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추정될 수 있다.
1. 기린, 사자, 복록의 그림
기린을 그린 그림은 현전하는 영락 연간의 기린 관련 회화들을 통해 그 면모가 짐작된다. 조선 사신단이 영락제의 명으로 이틀 동안 동물들을 관람한 1419년 가을, 阿丹國(오늘날 아라비아 반도 부근)에서 영락제에게 기린을 바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翰林學士였던 楊榮(1370~1440)과 金幼孜(1368~1431)는 명에 도착한 기린을 상서로운 徵兆로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15. 양영의 시에는 영락 12년과 영락 13년에 각각 榜葛剌國(오늘날 벵골 지역)과 馬林國(오늘날 케냐 지역)에서 영락제에게 기린을 헌상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선행 연구를 통하여 잘 알려졌듯이 영락 12년에 방갈랄국에서 바쳐진 기린(giraffe)을 영락제는 仁德을 갖춘 전설 속 상서로운 동물 ‘麒麟’으로 해석했다16. 현재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에는 영락 12년에 방갈랄국에서 바친 기린을 묘사한 《明人瑞應圖》와 <麒麟沈度頌>이 소장되어 있다(Figs. 4

사자를 그린 그림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獅子圖>와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狻猊圖>와 유사한 형식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Figs. 6

마지막으로 세 동물 가운데 정체가 불분명한 福祿은 실물 회화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얼룩말을 묘사한 그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복록은 그 모습이 당나귀와 유사하지만 목이 길고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동물이었다고 한다19. 금유자 또한 「福禄獸歌」에서 이와 비슷한 묘사를 남겼으며 복록을 卜剌哇(오늘날의 소말리아 지역)에서 바친 동물로 기록했다20. 조선 사신단은 명 조정에서 아무도 이 동물을 아는 이가 없어 영락제가 새롭게 그 이름을 ‘福祿’으로 命名했다고 보고했다21. 이때 영락제가 외국에서 바쳐진 이름 모를 동물에 상서로운 의미의 이름을 부여한 행위는 그가 과거 방갈랄국에서 헌상된 기린(giraffe)을 전설상의 동물인 ‘麒麟’으로 命名한 사례와 유사하다. 즉 복록의 명칭 또한 이국의 희귀한 동물을 상서로 해석하고자 한 영락제의 의도적 명명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 명 궁정에서 제작된 동물 회화는 현실 속 동물의 시각적 특징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한 점이 특징이다. 麒麟과 獅子는 본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중국 회화 전통에서 기린은 『三才圖會』나 『山海經』에서 보이듯 일반적으로 용의 머리에 비늘로 덮인 말의 몸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었다22. 사자 또한 獬豸와 유사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사자는 명대 이전에 외국에서 중국 황실에 공물로 바친 사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화적 전통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23. 이에 비해 <기린심도송>이나 <산예도> 속의 동물들은 상대적으로 실물 관찰을 바탕으로 한 묘사로 생각된다. 각 그림에서 확인되는 기린(giraffe)과 사자(lion)의 형태는 전통적인 상상 속 모습을 벗어나 실제 동물들의 생태적 특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 경향은 영락 연간 명 궁정회화의 의도적인 표현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복록 또한 실제로 헌상된 얼룩말의 외형을 충실히 반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묘사 방식은 세 동물이 모두 명의 환관 鄭和(1371~1433)가 수행한 대대적인 해외 遠征의 결과로 획득되었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화의 항해는 영락제의 재위 기간 내내 지속되었으며 명의 해상 세력 확장과 조공 무역 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가운데 제5차 해외 원정은 1417년에 시작되어 조선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하기 불과 몇 달 전인 영락 17년(1419) 8월경 마무리되었다24. 당시 명의 관료들이 이 동물들을 상서로 해석한 핵심 근거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 동물들이 典據가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금유자는 1419년에 지은 「長角獸歌」에서 장각수가 “圖說을 살펴보아도 알 수가 없으며 博物志를 찾아 보아도 끝이 없이 막막하다”라고 하였다25. 長角獸는 羚羊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한편 금유자 또한 「駞雞賦」에서 “옛 문헌을 살펴보아도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경전과 사서들을 뒤져도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라고 하였다26. 즉 기존의 문헌이나 회화적 전통으로 설명될 수 없는 낯설고 새로운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국성을 시각화하는 것이 상서의 성립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리였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익숙한 전설 속 기린이나 사자의 형상이 아니라 이국적인 외형 그대로 묘사된 모습이야말로 이 동물들이 먼 곳에서 찾아온 존재임을 실감하게 하는 중요한 표현이었다.
이처럼 낯설고 설명 불가능한 존재라는 특성이 상서의 첫 번째 근거였다면 두 번째로 강조된 점은 이러한 동물들이 ‘자발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중국에 도래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정화와 여러 차례 항해를 함께한 통역관 馬歡(1380~1460년경 활동)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동물들은 현지에서 명나라의 관료들이 교역을 통하여 구입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7. 그러나 북경에 도착한 이후 제작된 궁정회화와 명 관료들의 詩文에는 먼 이국의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영락제에게 상서로운 동물을 바친 것으로 묘사되었다. 명 관원들이 지은 讚文에는 복록과 사자가 猛獸로서의 공격적인 본성을 억제한 채 평화롭게 중국에 이르러 황제에게 귀의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28. 이러한 문학적 修辭와 유사하게 15세기 전반 명 궁정에서 제작된 사자 그림에는 사자가 새끼들과 어우러지거나 자연 속에 평온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헌적, 회화적 묘사는 영락제의 德治에 하늘과 萬物이 감응하여 맹수조차 온순해졌음을 시각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2. 수현사와 보탑사의 그림
『세종실록』과 『東文選』의 기록에 따르면 수현사와 보탑사의 그림에는 “여러 佛菩薩과 寶塔이 공중에 나타나고 태양 아래에 신령한 용과 화려한 봉황이 날아다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고 한다29. 그렇다면 수현사와 보탑사는 실제로 중국의 어느 지역에 위치한 사찰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경녕군 일행이 귀국한 직후 조선의 議政府 參贊 卞季良(1369~1430)이 태종의 명으로 영락제의 聖德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賀聖明歌」가 주목된다. 이 노래에는 당시 조선 조정에서 파악한 영락 연간의 상서 현상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변계량은 그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 노래에서 묘사된 불교적 상서는 『세종실록』과 『동문선』에 전하는 보탑사와 수현사의 그림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변계량은 이러한 상서가 발생한 장소로 수현사나 보탑사가 아닌 영락제 때 건립된 南京의 大報恩寺와 山西省의 불교 聖山 五臺山을 언급했다.
이와 관련하여 1419년 여름에 영락제가 대보은사와 오대산의 顯通寺에 『諸佛世尊如來菩薩尊者名稱歌曲』(이하 『명칭가곡』)을 반포한 직후 그곳에서 각종 異蹟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명칭가곡』은 영락제가 1417년에 직접 편찬한 불교가곡으로 발간 직후부터 조선에도 여러 차례 하사되었다. 이 가곡에는 여러 불보살의 명칭이 歌詞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31. 『大明太宗皇帝御製集』에는 영락제가 1419년에 『명칭가곡』을 반포한 뒤 발생한 상서를 기념하여 지은 「五臺山施經瑞應序」와 「報恩寺施經瑞應序」가 수록되어 있다32. 이에 따르면 영락제가 대보은사와 현통사에 『명칭가곡』을 반포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五色의 빛이 발산하며 千佛과 관음보살 및 나한 등이 공중에 나타나는 묘한 장관이 발생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 빛 속에 佛塔과 舍利, 용, 봉황, 기린, 사자, 코끼리 등 신령한 형상들이 나타나 하늘과 땅을 환히 밝혔다고 하였다. 당시 영락제는 이러한 상서로운 장면들을 모두 그림으로 남기도록 명했다33. 따라서 영락제가 조선 사신단에 하사한 수현사와 보탑사의 그림은 1419년 여름에 『명칭가곡』의 반포로 발생한 이적을 그린 그림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회화로 판단된다.
즉 『세종실록』에서 언급된 수현사와 보탑사는 각각 오대산의 현통사와 남경의 대보은사를 가리킨 것이다. 또한 “隨現寺”와 “寶塔寺”라는 사찰명은 그림 속에 묘사된 불보살의 “顯現”과 “寶塔”의 출현 장면을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誤記로 추정된다.
『명칭가곡』의 반포 이후 발생한 상서를 그린 회화의 내용은 영락 5년(1407)에 제작된 《噶瑪巴爲明太祖薦福圖》[이하 《천복도》]의 장면들과 매우 유사하다(Fig. 8



영락제는 1419년 이전에 남경과 북경을 비롯하여 武當山과 오대산 등 불교와 도교의 聖山에 위치한 여러 사찰과 道觀을 신축하거나 증축하도록 명했다. 아울러 그는 부모의 혼령을 위로하고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규모의 의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35. 이때 도관과 사찰의 상공에 신비로운 구름과 오색의 빛이 나타나고 불보살과 도교 신들이 며칠간 현현하는 이적이 있었다. 영락제는 이러한 현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면 별로 세밀히 묘사한 회화를 제작하도록 명하였다. 《천복도》 외에 《無量福壽圖》와 『正統道藏』에 수록된 《大明玄天上帝瑞應圖錄》이 이러한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들로 모두 영락 연간에 무당산의 도관에서 발생한 상서가 그려진 그림들이다(Figs. 12

Ⅲ. 영락제가 하사한 그림의 제작 맥락
1. 상서로운 동물의 출현과 북경의 神都化
영락제가 조선에 하사한 그림들은 명나라의 궁정에서 어떤 맥락에서 제작된 것일까? 〈기린심도송〉이나 《명인서응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영락 연간 초부터 정화의 원정을 통하여 기린과 사자, 흰 코끼리 등 이국적인 동물들이 지속적으로 중국에 유입되었다37. 그런데 특히 1419년에는 그 규모와 종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졌다. 명의 관료였던 금유자와 夏原吉(1366~1430)의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는 과거 진상된 적이 없는 다양한 동물들이 동시에 북경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사자, 표범, 낙타, 영양, 사슴, 얼룩말, 코뿔소, 기린, 타조 등 진귀한 동물들이 잇따라 헌상되었다. 하원길은 「聖德瑞應詩」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락 기해년[1419] 가을, 해외의 홀로모스(忽魯謨斯) 등 여러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기린, 사자, 천마(天馬), 표범[文豹], 자색 코끼리[紫象], 타계[駝雞, 머리를 들면 높이가 일곱 자이다], 복록[낙타처럼 생겼으나 아름다운 무늬가 있다], 영양[靈羊, 꼬리가 커서 스무 근이 넘고, 걸을 때 수레에 싣고 다닌다], 장각마합수[長角馬哈獸, 뿔이 몸보다 길다], 오색앵무(五色鸚鵡) 등의 새를 바쳤다. 또 교지(交趾, 오늘날의 베트남)에서 흰 까마귀(白烏), 산봉(山鳳), 세 개의 꼬리를 가진 거북(三尾龜) 등을 바쳤다. 황제께서는 이를 정원에 진열하게 하시고, 그 광경을 보신 뒤 여러 관료들에게 명하여 賦를 짓게 하셨다.38 [밑줄은 필자]
하원길의 기록에 따르면 영락제는 각국에서 바친 희귀한 동물들을 궁궐 내 정원에 모아두고 대신들이 관람하게 한 뒤 그 장면을 기념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이러한 감상 행사는 명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금유자가 남긴 글들은 당시 궁정의 관료들이 느낀 놀라움과 감탄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39.
37 Liscomb, 앞의 논문, pp. 341-378 참조.
38 『忠靖集』 卷2, 「聖德瑞應詩」. “永樂己亥秋, 海外忽魯謨斯等國遣使來進麒麟、獅子、天馬、文豹、紫象、駝雞[昂首髙七尺]、福祿[似駝而花文可愛]、靈羊[尾大者重二十餘斤行則以車載其尾]、長角馬哈獸[角長過身]、五色鸚鵡等鳥, 又交趾進白烏、山鳳、三尾龜等物, 賜觀於庭, 承制賦此.”
39 Duyvendak, 앞의 논문, p. 382.
영락 기해년[1419] 가을 팔월 길일, 서남쪽 나라에서 기이한 새 한 마리를 바쳐 왔다. ⋯⋯ 황제께서 奉天門에 나아가시어 친히 살피시고 이를 신하들에게 내려 보이시니 모든 신하들이 목을 빼고 바라보며 경탄하고 발을 구르며 놀라 말하였다. “이것은 세상에 드문 희귀한 새로, 중국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40
영락제는 봉천문까지 나가 이름 모를 새를 직접 살피고 조정의 문무백관에게 이를 공개하여 관람시켰다. 금유자가 황제의 덕을 찬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글을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감탄에는 수사적 과장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여러 종류의 이국적 동물들이 동시에 대규모로 궁정에 유입된 사건이 이들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금유자는 「복록수가」에서도 날마다 사신들이 계속 중국에 도착하여 기이한 상서들이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서술했다. 또한 이 동물들의 모습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중국과 오랑캐의 모든 福을 모으고자 한다고 덧붙였다41 이러한 서술을 고려하였을 때 상서로운 동물들의 출현과 그것을 회화로 제작한 행위는 제국의 안팎을 아우르는 瑞氣와 福을 모으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중국 안팎의 동물들이 모두 북경의 궁궐에 모였다는 금유자와 하원길의 서술은 단순한 문학적 修辭가 아닌 북경 遷都를 정당화한 발언으로 생각된다. 전 세계에서 바쳐진 동물들이 紫禁城에 집결한 광경과 이를 기록한 회화들은 당시 막 완공되어 가던 새로운 수도 북경이 천하의 중심이자 신성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을 것으로 판단된다. 1419년은 남경에서 북경으로의 천도가 마무리되기 직전의 시기였다. 실제로 자금성의 봉천전은 이듬해인 1420년에서야 비로소 완공되었다42. 즉 영락제가 조선 사신단을 맞이한 북경의 자금성은 황제의 신성한 거처로서 모습을 갖춰 가던 정치적 현장이었다.
영락제는 과거에 이미 자금성 축조 과정에서 발생한 상서로운 징조를 천도의 명분으로 활용한 바 있다. 영락 5년(1407)에는 四川 지역에서 궁궐 공사용 목재인 楠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거대한 벌목들이 스스로 강가로 흘러나와 운송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상서가 보고되었다. 영락제는 이를 山川 神靈들의 도움으로 간주하고 이 나무를 “神木”으로 칭했다43. 또한 1417년 봉천전과 乾淸宮이 착공된 직후 자금성 내 金水河와 太液池의 얼음에서 누각, 용, 봉황, 꽃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한다44. 이러한 상서들은 자금성 축조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외국에서 바쳐진 동물들의 수집과 전시,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한 문학과 회화 작품의 창작은 자금성을 ‘상서로운’ 중심 공간으로 표상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금유자는 복록이 먼바다에서 북경까지 오는 동안 산천마다 상서로운 기운과 향기로운 안개가 자욱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하원길은 기린이 玉階에 나타나고 사자는 金鋪에 바쳐졌다고 하며 동물들을 궁궐 건축과 결부시켜 묘사했다45. 이러한 서술은 상서로운 동물들이 북경 궁궐을 신성화하는 매개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하원길은 여러 나라에서 바쳐진 동물들이 “신성한 수도[神都]를 더욱 빛나게 한다”라고 기록하였다46. 상서로운 동물들의 도래는 새 수도 북경을 吉地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묘사들은 漢武帝(재위 기원전 141~87)의 上林苑을 떠올리게 한다. 한나라의 무제는 상림원에 변방 지역의 진상품이나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획득한 희귀한 동식물을 모아두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상림원을 신성한 땅으로 바꾸고 황제의 주요 거처이자 의례의 중심지로 여기며 여러 면에서 都城을 대신하도록 했다고 한다47. 사자, 기린, 복록을 그린 동물 그림들 역시 북경을 신성한 땅으로 시각화함으로써 遷都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궁정 문예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경향은 《北京八景圖》에서도 확인된다. 이 그림의 讚詩에서 양영은 북경을 제국의 중심으로 찬양하면서 그곳이 지리적으로 길지라는 점, 즉 왕조의 번영과 장수를 보장할 만한 장소로서의 적합성도 강조한 바 있다48. 따라서 조선에 하사된 동물 그림들은 북경 천도를 정당화하고자 북경을 상서로운 공간으로 부각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작품들을 모본으로 한 그림들로 생각된다.
40 『金文靖集』 卷6, 「駞雞賦」. “永樂己亥秋八月吉旦,西南之國有以異禽來獻者. ⋯⋯ 皇帝御奉天門,特以頒示羣臣. 莫不引領快覩,頓足駭愕,以為希世之罕聞、中國所未見.”
41 金㓜孜, 『金文靖集』 卷2, 「福祿獸歌」. “遠人稽首貢方物, 異瑞奇祥莫殫錄. 騶虞麒麟在靈囿, 渥洼龍媒聚天育. 願將職貢寫成圖, 一統華夷集諸福.”
42 북경 도시 정비 사업과 자금성 축조 과정은 Aurelia Campbell, What the Emperor Built: Architecture and Empire in the Early Ming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20), pp. 21-88.
43 『太宗文皇帝實錄』 卷65 영락 5년 3월 10일(甲子) “工部尚書宋禮言, 有大木數株, 不藉人力, 一夕出天谷, 達于江. 蓋山川之靈相之賜, 其山名神木山. 遣禮部郎中王羽祭之, 且建祠立碑, 命翰林院侍讀胡廣製碑文.”
44 『太宗文皇帝實錄』 卷194, 영락 15년 11월 21일(壬申). “金水河 및 太液池氷凝, 具樓閣、龍鳳、花卉之狀, 奇巧特異. 上賜羣臣觀之. 行在禮部尚書呂震以為禎祥屡見, 率百官上表賀.”; 『太宗實錄』 卷35, 태종 18년 2월 13일(甲午).
45 夏原吉, 『忠靖集』 卷2, 「聖德瑞應詩」. “麒麟呈玉陛, 獅子貢金鋪. 紫象靈山種, 驊驑渥水駒. 駝雞同鸑鷟, 文豹擬騶虞. 福祿身紆錦, 靈羊尾載車. 霜姿狷更異, 長角獸尤殊. 綵檻竒音鳥, 雕籠雪色烏. 玄龜三尾曵, 山鳳五花敷. 日上龍墀麗, 風囘鳳閣迂. 禮官躬典設, 蕃使肅奔趨. 仙掌開丹扆, 祥煙散紫衢.”
46 夏原吉, 『忠靖集』 卷2, 「聖德瑞應詩」. “永樂己亥秋, 海外忽魯謨斯等國, 遣使來進麒麟、獅子、天馬、文豹, 紫象、駝雞[昂首高七尺]、福祿[似駝而花文可愛]、靈羊[尾大者重二十餘斤, 行則以車載其尾]、長角馬哈獸[角長過身]、五色鸚鵡等鳥. 又交趾進白烏、山鳳、三尾龜等물, 賜觀於庭, 承制賦此. ⋯⋯ 既將昭帝德, 尤足壯神都.”
47 Mark Edward Lewis, The Early Chinese Empires: Qin and Han (Cambridge, MA and London: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pp. 88-101.
48 Kathlyan Liscomb, “The Eight Views of Beijing: Politics in Literati Art,” Artibus Asiae 49 (1988-1989): p. 128.
2. 『명칭가곡』과 轉輪聖王으로 표상된 영락제
수현사와 보탑사의 그림들은 『명칭가곡』이 대보은사와 현통사에 반포된 직후 발생한 상서를 묘사한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불교적 이적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명칭가곡』을 창작한 영락제를 영험한 힘을 가진 존재로 부각시키는 시각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영락제가 『명칭가곡』를 제작한 배경이 주목된다. 영락제는 영락 5년(1407)에 남경을 방문한 티베트 불교 카귀파(Kagyu)의 首長인 카르마파(Karmapa) 5세 데신 셱파(Deshin Shekpa, 1384~1415)의 神通力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49. 당시 데신 셱파가 남경에서 영락제의 요청으로 거행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18일, ⋯⋯ 달이 밝고 靑鸞과 白鶴 무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며 돌면서 춤추었고 천화가 허공을 떠다녔으며, 상서로운 구름이 사방에 모여들고 瑞氣이 푸르게 빛났으며, 감로가 구슬처럼 반짝였다. 신령한 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萬神이 모두 모였다. 또한 상서로운 구름이 용, 봉황, 사자, 코끼리, 보탑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밤이 되자 ⋯⋯ 탑의 꼭대기에서 사리가 나타나 찬란하게 빛나며 하늘의 등불과 조화를 이루었다. 갑자기 梵唄 소리와 음악이 공중에서 들려왔는데 맑고 청아한 음률이 여러 악기들이 서로 어울려 함께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壇殿을 흔들었고 법당 안에 들어가 그 소리를 듣고자 하였으나, 그 음률은 마치 허공에서 들려오는 듯하였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멈추었다. 잠시 후 모든 이들이 금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보았다.50
위 기록에 따르면 탑 꼭대기에서 사리가 나타나 찬란하게 빛나는 가운데 어디선가 天上의 음악이 들려 왔다고 한다. 즉 데신 셱파가 주관한 법회에서 영락제는 천상의 음악이 울려 퍼지며 불보살이 현현하는 壯觀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영락제는 이 法會에서 발생한 神異 현상을 통하여 데신 셱파의 영험함을 경험하였다. 이와 같이 화려한 이적과 천상의 음악이 결합된 광경은 영락제가 추후 이적을 일으키는 『명칭가곡』을 창작하는 데 강력한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6세기에 활동한 관료인 何良俊(1506~1573)은 『四友齋叢說』에서 이 법회를 계기로 영락제가 불교 경전에 더욱 몰두하여 스스로 佛曲, 즉 『명칭가곡』을 지어 사람들이 궁정에서 노래하고 춤추게 하였다고 기록했다51.
49 영락제가 카르마파에게 베푼 융숭한 대접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이옥지, 「1406~1408년 티베트 승려 哈立麻의 중국 방문과 조선」, 『명청사연구』 63 (2025), pp. 40-42 참조.
50 “十八日,齋事圓滿. 青鸞、白鶴羣飛翩躚,交錯旋舞,天花飄空,卿雲四合,瑞氣蔥蔚,甘露眩珠,靈風瀏瀏,萬神畢聚. 復有祥雲,如龍如鳳如獅如象如寶塔. 至夜,山門兩幡竿上距數丈餘天燈二,其赤異常,硃砂不足擬萬一,光彩四達. 遙見燈影中有乘青獅、白象而來者,瓔珞珠佩煥然燦麗. 少頃,塔頂舍利畢見,光輝朗耀,交徹天燈. 忽聞梵唄空樂, 音韻清亮, 絲竹交作, 金石合奏, 響振壇殿, 及入殿聆之, 則其音聲宛在空中, 如是良久乃止. 未幾, 普見金色世界.” 《천복도》의 18일자 跋文 참조.
51 何良俊, 『四友齋叢說』 卷22, 釋道 2 “丁亥永樂五年, ⋯⋯ 二月, 命西僧尚師哈立麻, 於靈谷寺啟建法壇, 薦祀皇考皇妣. 尚師率天下僧伽, 舉揚普度大齋, 科十有四日, 卿雲天花, 甘雨甘露, 舍利祥光, 青鸞白鶴連日畢集, 一夕檜柏生金色花遍於都城, 金仙羅漢變現雲表, 白象青獅莊嚴妙相, 天燈導引旛蓋旋遶 亦既來下. 又聞梵唄空樂自天而降. 群臣上表稱賀, 學士胡廣等, 獻聖孝瑞應歌頌. 自은之後, 上潛心釋典作為佛曲, 使宮中歌舞之 ⋯⋯.” 『釋鑑稽古略續集』 제3권 T2038, 49:0941c; 조혜미, 앞의 논문, p. 6에서 재인용.
이 시기에 영락제와 그의 부인 仁孝皇后 徐氏는 데신 셱파로부터 灌頂 의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敎法 역시 전수받았다. 이때 영락제는 티베트의 승려들에게 명에서 제작된 티베트 불교 양식의 佛像과 儀式具를 다수 하사했다52. 흥미롭게도 『명칭가곡』에 실린 降魔觸地印을 한 불상이 그려진 변상 판화는 이와 같이 영락 연간 명 궁정에서 제작된 티베트 불교 양식의 불상과 매우 유사하다(Figs. 14

한편 『명칭가곡』이 불러일으킨 상서를 그린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공중에 나타난 보탑과 빛나는 사리에 관한 묘사이다. 이는 영락제가 중국 밖에서 광범위하게 佛舍利를 수집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데신 셱파가 남경을 방문했을 때 그는 高僧들의 사리와 불사리를 영락제에게 바쳤다. 이 시기에 영락제의 요청으로 조선은 여러 차례 불사리를 보냈다. 이 사리는 데신 셱파가 靈谷寺에서 홍무제와 마황후를 위한 의례를 거행할 때 활용되었다56. 선행 연구들을 통하여 잘 알려졌듯이 영락제는 정화를 통하여 스리랑카에서 佛齒를 수집했으며, 북경 眞覺寺에 金剛寶座塔를 지어 이를 봉안하도록 명하기도 했다57. 이와 같이 명나라 밖에서 수집된 사리들은 영락제가 새롭게 건립하거나 중창한 사찰들에 봉안되었다. 흥미롭게도 조선 사신들이 명나라에서 그림을 받아온 1419년의 여름에도 명나라 사신들은 영락제의 명으로 조선에서 석가모니의 사리와 頂骨 및 여러 불보살과 名僧의 사리 558顆를 가지고 돌아간 바 있었다58.
이와 같은 영락제의 불사리 수집 활동은 인도의 아쇼카왕, 즉 轉輪聖王이 부처의 사리를 모아 인도 전역에 세운 불탑의 전통을 떠오르게 한다. 영락제가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시각화했음에 관해서는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지적된 바 있다59. 특히 영락제는 데신 셱파를 大寶法王으로 임명하여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였는데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을 불교 세계의 수호자로 형상화하고자 했다60. 이를 통하여 영락제는 자신이 세속뿐만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권위를 가진 군주임을 피력하고자 했다61. 이러한 맥락을 고려했을 때 『명칭가곡』의 기적이 묘사된 그림들은 영락제가 스스로를 카르마파와 같이 이적을 일으키는 영험한 종교적 힘을 가진 존재로 표상하기 위하여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52 『明太宗實錄』 卷63 영락 5년 정월 19일의 기사 참조. 영락제가 재위기 동안 티베트의 高僧들에게 하사한 회화와 자수, 불상, 공예품 및 각종 의식구에 관해서는 James C. Y. Watt and Denise Patry Leidy eds., Defining Yongle: Imperial Art in Early Fifteenth-Century China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5); Karl Philip Debreczeny, “Ethenicity and Esoteric Power: Negotiating the Sino-Tibetan Synthesis in Ming Buddhist Painting” (PhD diss., University of Chicago, 2007), pp. 98-107; 故宮博物院 編, 『永宣時代及其影響: 兩岸故宮第二屆學術研討會論文集』 (北京: 故宫出版社, 2012) 참조. 이들 유물에는 “大明永樂年施”라는 기년명이 쓰여져 있다.
53 변상판화의 본존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사례가 매우 드물며, 이러한 도상이 티베트 지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조혜미, 앞의 논문, pp. 45-50 참조.
54 티베트인 宦官 侯顯(1365~1438)을 통하여 영락제가 카르마파에게 보낸 서신에는 카르마파의 道術에 대한 영락제의 기대가 카르마파가 남경을 방문하기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최소영, 「永樂帝의 티베트인 宦官 侯顯(1365-1438)의 위짱(烏思藏) 使行 연구」, 『中國史硏究』 140 (2022), pp. 112-113 참조.
55 羅文華, 「明大寶法王建普度大齋長卷」, 『中國藏學』 1995年 第3期, p. 91.
56 이옥지, 앞의 논문, pp. 46-49.
57 Tansen Sen, “Diplomacy, Trade and the Quest for the Buddha’s Tooth: The Yongle Emperor and Ming China’s South Asian Frontier,” In Craig Clunas et al., Ming China: Courts and Contacts 1400–1450 (London: British Museum Press, 2016), pp. 26–36.
58 『太宗實錄』 卷35, 태종 18년 2월 13일(甲午).
59 영락제가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시각화했음에 관해서는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지적된 바 있다.
60 특히 영락제는 데신 셱파를 大寶法王으로 임명하여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였는데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을 불교 세계의 수호자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61 이를 통하여 영락제는 자신이 세속뿐만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권위를 가진 군주임을 피력하고자 했다.
Ⅳ. 조선 왕자의 사행과 영락 연간의 상서 기념 방식
1419년에 영락제가 경녕군 일행에게 하사한 그림들은 같은 해에 명에서 발생한 여러 상서 현상을 종합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하사 행위는 당시 사신단의 대표가 조선 관료가 아니라 國王의 아들이었다는 점과 밀접히 관련된다. 왕자의 사행은 곧 국왕의 親朝에 준하는 특별한 외교 행위로 이해되었다62. 따라서 황제는 왕자 사행에 대해 일반 사신과 구별되는 높은 예우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행은 이미 영락 6년(1408)에 세자 讓寧大君의 남경 방문에서 확인된다. 영락제는 당시 15살이던 양녕대군을 태종이 사행에 보냈다며 그 충성심을 높이 사고 양녕대군을 특별히 신경쓸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예우 가운데 하나는 양녕대군 일행으로 하여금 남경의 영곡사, 朝天宮, 天禧寺, 天界寺, 能仁寺를 방문하도록 명한 것이다63. 흥미롭게도 이 사찰과 도관들은 모두 영락 4년에서 6년 사이 대규모 상서가 보고된 장소들이었다64. 이와 유사하게 영락 17년에 북경을 방문한 경녕군 역시 태종의 아들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영락제는 “[경녕군을] 접대하는 일은 그의 父王이 반드시 알 것이니 관곡하게 대접하라”라고 명하며 경녕군에게 각별한 예우를 베풀었다65. 이는 영락제가 경녕군을 단순한 관료 사신이 아닌 조선 국왕의 대리인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영락제가 경녕군 일행에게 상서의 그림을 하사한 행위는 바로 이러한 예우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영락제는 경녕군 일행에게 봉천전에서 상서로운 동물들을 이틀간 직접 관람하게 한 뒤 그림을 하사했다. 장자충의 『판서공조천일기』에 따르면 이때 봉천전의 중앙에 영락제가 앉아 있고 그 앞에 세 동물이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자충은 당시 세 동물을 황제의 덕과 연결짓는 짧은 시를 남겼다. 이 시는 당시 장자충이 각 동물을 감상한 뒤 황제를 위하여 즉석에서 지은 應製詩였을 가능성이 있다66. 이와 유사하게 양녕대군 일행 또한 남경 방문 당시 명 禮部의 요청에 따라 영락제가 카르마파 5세가 일으킨 이적을 칭송하며 쓴 讚佛詩 두 편에 화답시를 지은 바 있다. 당시 영락제는 사신들이 귀국할 때 화답시를 받아 갔을 뿐 회화는 하사하지 않았다67. 그런데 경녕군 일행에게는 상서로운 동물을 관람하도록 한 후 마치 기념품처럼 그림을 하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경녕군과 양녕대군 일행이 명나라에서 겪은 일들은 15세기 전반 영락제가 명 궁정 내에서 측근 문신들과 상서를 기념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68. 영락 연간에는 황제의 측근 관료들이 상서의 출현을 기념하여 응제 시문을 지어 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이를 회화로 제작하는 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영락 2년에 神后山에 나타난 흰 호랑이를 그린 <騶虞圖>(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에는 명의 翰林院과 六部 소속 관료 28명이 그림 속 호랑이를 전설상의 騶虞로 해석한 시문들이 남아 있다69. 이들 가운데에는 <杏園雅集圖>에 등장하는 명 초기의 권신 楊士奇(1365~1444), 양영, 王直(1379~1462) 등 文淵閣 출신 영락제의 핵심 측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영락제 시기에 상서를 주제로 한 회화의 제작은 황제와 문신 집단의 協業에 가까웠다70. 이러한 협업 방식은 명대 전후로 상서 주제의 회화가 제작된 관행과 대조를 이룬다. 송대 휘종, 청대 雍正帝(재위 1723~1735) 및 乾隆帝 시기에 제작된 회화들에는 주로 황제의 御製詩가 실렸다. 즉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이 상서로 규정되는 과정에서 황제의 해석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에 비해 영락제 시기의 상서 해석은 문신 집단의 적극적 참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영락제는 상서 주제의 그림을 관료들과 함께 감상하거나 그들에게 기념품으로써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明末의 문인이었던 謝肇淛(1567~1624)는 『五雜組』에서 자신이 한 오래된 가문에서 과거 영락제가 하사한 기린 그림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71. 그런데 영락제는 국내의 관료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사신도 이러한 그림의 감상자로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천복도》에는 영락 5년에 영곡사에서 발생한 상서 현상이 한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 샨어(Shan), 티베트어, 몽골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언어들은 《천복도》가 제작된 바로 그해에 남경에 설립된 통역 기관인 四夷館에서 번역될 수 있는 언어였다. 즉 《천복도》는 이와 같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국인들을 감상자로 전제하여 제작된 작품이었다72. 조선의 국왕 역시 이러한 鑑嘗人으로서 1419년에 상서를 주제로 한 그림 다섯 점을 하사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영락제는 이러한 그림을 조선 국왕에게 하사함으로써 무엇을 기대하였을까? 우선 영락제는 1419년에 상서를 조선에 알림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더욱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 국왕이 명의 관료들처럼 상서를 해석하고 그 결과를 회화나 시문으로 응답해 오기를 기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영락제의 기대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명 조정 내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영락 2년에 周王 朱橚(1361~1425)이 바친 흰 호랑이를 28명의 관료들이 시문을 통해 騶虞로 칭송한 일은 이후 관료들과 藩王들이 상서를 보고하거나 그림을 제작하여 바치는 관행의 발단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秦王과 高平王이 각각 황하가 맑아진 현상을 그린 그림을 경쟁적으로 영락제에게 헌상했다73. 이후 「騶虞詩」를 지었던 張信(?~1442)과 「騶虞頌」을 지었던 胡濙(1375~1463) 역시 무당산에서 발생한 상서를 보고하며 그림을 바쳤다74.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영락제는 명에서 관료들과 긴밀히 협업하여 상서를 기념하던 방식을 조선 국왕에게도 그대로 적용해 그림을 하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조선 국왕 역시 상서를 관찰하고 이를 해석하며 시문이나 그림의 형식으로 회답함으로써 명의 상서 기념 의례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Ⅴ. 결론
1419년 영락제가 북경을 방문한 경녕군 일행에게 하사한 다섯 점의 그림은 같은 해 명나라에서 발생한 여러 상서 현상을 기념한 궁정회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었다. 이 가운데 세 점의 동물 그림은 정화의 제5차 원정이 종료된 직후 북경에 진상된 동물들을 주제로 한 회화였다. 이국의 진귀한 동물들이 자금성 봉천전에서 전시되고 회화로 제작된 것은 새로운 수도 북경을 세계의 중심이자 상서로운 공간으로 표상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두 점의 그림은 영락제가 오대산의 현통사와 남경의 대보은사에서 『명칭가곡』을 반포한 이후 발생한 여러 이적이 묘사된 회화였다. 『명칭가곡』을 직접 창작한 영락제는 스스로를 이적을 일으키는 전륜성왕적 존재로 시각화하고자 했다. 이 회화에서 나타난 보탑의 형상은 영락제가 아쇼카왕과 같이 사리를 수집한 활동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락제는 즉위 이후 궁정에서 관료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상서를 기념하고 이와 관련된 회화를 제작하였다. 15세기 초 영락제가 조선에 하사한 그림들은 황제와 관료가 협업하여 상서를 기념하던 명 궁정의 회화 제작 방식이 대외적으로 확장된 결과였다. 영락제가 이러한 그림들을 경녕군 일행에게 하사한 배경에는 사행의 대표인 경녕군이 조선 태종의 친아들, 즉 왕자였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결국 이 그림의 궁극적인 수령자는 조선의 국왕이었던 세종과 상왕 태종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동시대 명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이 그림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으며 이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이 그림에 관한 수용 문제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를 통해 논해 보고자 한다.
Table 1
| 원문 | 번역 |
|---|---|
| 惟帝至誠, 無所不格. | 황제[영락제]의 지극한 정성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어, |
| 報恩五臺, 祥瑞雜遝. | 보은사와 오대산에 상서로운 징조가 뒤섞여 모여든다. |
| 空見如來, 諸佛菩薩. | 공중에는 여래와 여러 부처, 보살이 나타나고, |
| 磷磷寶塔, 羅漢千百. | 찬란한 보탑이 빛나며 수많은 나한들이 둘러 있다. |
| 龍鳳獅象, 左右周匝. | 용과 봉황, 사자와 코끼리가 좌우를 에워싸고, |
| 天花祥雲, 璀璨燁煜. | 천화와 상서로운 구름이 찬란히 빛난다. |
| 種種靈果, 不可備述. | 온갖 신령한 열매들은 말로 다할 수 없으며, |
| 大小稽首, 天子萬福. | 크고 작은 존재들이 모두 머리 숙여 절하니 천자는 만복을 받으시도다.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