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ing of the Buddhas of the Three Ages at Taedunsa Temple, Haenam, Commissioned by Consort Sunbi Ŏm: A Collaborative Work by Itinerant Monk-painters
1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Abstract
This paper demonstrates that the Painting of the Buddhas of the Three Ages (Samsebul-t'aeng), produced in 1901 for Taedunsa Temple in Haenam, is a collaborative work by monk-painters whose participation was orchestrated through the patronage of Consort Sunbi Ŏm (1854–1911). Although the work appears visually unified, it is in fact composed of three separate hanging scrolls, each executed by a different workshop led respectively by Kyŏngsŏn Ŭngsŏk (active mid-19th to early 20th century), Sŏgong Ch'ŏryu (1851–1917), and Yeun Sanggyu (active late 19th to 20th century). The tripartite format was necessitated by the scale of the rear altar wall of the temple’s Taeungbojŏn Hall, and its realization required close coordination among the participating monk-painters. Within this collaborative process, Sanggyu adapted Ŭngsŏk’s Bhaiṣajyaguru Painting to produce the Amitābha Painting, while Ch'ŏryu, through artistic exchange with Ŭngsŏk, introduced for the first time a winnowing-basket-shaped halo into his Śākyamuni Painting. Multiple sources substantiate Consort Ŏm’s role as the principal donor, including her dedicatory prayer text, a memorial tablet bearing the title “Sunbi” in Taedunsa’s Sweet Dew Painting (Kamnot'aeng), records of visits by Court Lady Yun Sanggung, and oral accounts related to the monk Yukpong Pŏphan (1867–1944). While Consort Ŏm had previously sponsored Buddhist paintings primarily in the capital region, in this instance she dispatched monk-painters with whom she had established ties to Haenam. The three workshops that convened there divided the production by scroll while jointly realizing a unified iconographic program. In this regard, Painting of the Buddhas of the Three Ages at Daedeunsa stands as a significant example of late Chosŏn Buddhist painting in which multiple monk-painter lineages collaborated under patron’s commission to produce a visually coherent altar ensemble.
Ⅰ. 머리말
1899년 10월 대둔사(大芚寺)에서 발생한 화재는 북원(北院)의 전각과 불화를 전소시켰다1. 이듬해부터 진행된 재건 불사(佛事)는 전각 내부 장엄에 필요한 불화의 조성으로 이어졌다. 1901년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총 35점의 불화가 제작되었고 이 가운데 17점이 현재까지 대둔사에 전한다2.
대둔사의 현존하는 불화 중 <삼세불탱(三世佛幀)>은 <아미타불탱(阿彌陀佛幀)>, <석가불탱(釋迦佛幀)>, <약사불탱(藥師佛幀)>으로 구성되어 있다(Figs. 1

대둔사 <삼세불탱>은 일반적인 세 폭의 삼불회도(三佛會圖)와 다른 화면 구도로 그려졌다. 조선 후기 이후 제작된 삼불회도의 여래는 각 폭 중앙에 배치되며 권속의 시위(侍衛)를 받는다(Fig. 4

특히 <아미타불탱>과 <약사불탱>은 <석가불탱>과 함께 대둔사 대웅보전의 후불벽에 나란히 걸려 마치 한 폭의 불화처럼 보인다(Fig. 6
기존 연구는 <삼세불탱>이 ‘마치 한 폭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였으나 이와 같은 구도가 형성된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5. 일부 연구는 이 불화를 서양에서 활용된 ‘화면 분할’의 예로서 언급하였다6. 그러나 근대 불화에서 서양화법의 영향은 주로 음영 표현이나 새로운 도상의 등장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삼세불탱>의 화면 구성과 직접적으로 연관 짓기 어렵다. 한편 선행 연구는 수도권 사찰과 대둔사의 불화 간 양식적 유사성에 주목하고 그 근거로 화승들의 원행(遠行)을 제시하기도 하였다7. 다만 <삼세불탱>은 수도권 사찰의 불화와 다른 형식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둔사 <삼세불탱>의 화면 구도가 대웅보전의 공간적 특성, 원행한 화승 간의 협업 그리고 발원자의 역할이 결합된 결과임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전라남도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던 화승들이 해남에 함께 모일 수 있었던 배경을 발원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화승 · 삼불회도 등 포괄적인 주제에서 논의되었던 <삼세불탱>의 제작 맥락을 새롭게 고찰하고자 한다.
Ⅱ. 대둔사 <삼세불탱>으로 본 화승의 협업
대둔사 <삼세불탱>을 그렸던 19
Table 1 <경선 응석, 석옹 철유, 예운 상규가 이끌던 화승 집단> Groups of Monk-painters Led by Kyŏngsŏn Ŭngsŏk, Sŏgong Ch'ŏryu, and Yeun Sanggyu
| 리더 | 구성원 |
|---|---|
| Kyŏngsŏn Ŭngsŏk (慶船應釋) | Sŏktam Kyŏngyŏn (石潭敬演), Tongun Yŏnguk (東雲靈昱), Tuhŭm (斗欽), Sŏnggyu (聖奎), Myŏngjo (明照) |
| Sŏgong Ch'ŏryu (石翁喆侑) | Hŏgong Kŭngsun (虛谷亘巡), Kwanha Chong인 (觀河宗仁), Chŏngyun (定允), Tuhŭp (斗洽), Munsŏn (文善) |
| Yeun Sanggyu (禮芸尙奎) | Myŏngŭng Hwan'gam (明應幻鑑), Pŏmhwa Yunik (梵華潤益), Chonghyŏn (宗現), Minho (玟昊), Yunha (允夏), Sango (尙旿) |
철유 집단은 중앙 폭인 <석가불탱>을, 응석과 상규 집단은 각각 <약사불탱>과 <아미타불탱>을 맡았다. 당시 각 화승 집단은 세 폭의 삼불회도를 나눠서 그린 경험이 거의 없었다. 19세기 후반 제작된 삼불회도를 비롯한 후불도는 대부분 한 폭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정면 · 측면 각 3칸으로 지어진 소규모 전각이나 암자를 조성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특히 후불벽에 걸리는 후불도는 한 폭으로 제작되는 경향이 강해졌다.10 따라서 화승들에게는 한 폭의 대둔사 <삼세불탱>을 구현하는 것이 더욱 익숙했을 것이다.
다만 대둔사 대웅보전은 1900년 재건 당시 전면 5칸의 규모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규모에 걸맞게 세 폭의 불화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11 대웅보전의 후불벽은 기둥으로 구획되지 않은 세로 400cm, 가로 900cm 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었다(Fig. 7
이로 인해 화승들은 불화가 걸릴 공간의 특성을 고려하여 ‘한 폭처럼 보이는’ 세 폭 삼세불도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응석, 상규의 경우 서울 · 경기 지역에서 사용되던 초본을 변용하여 대둔사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는 본인들이 제작했던 익숙한 불화 양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 준다.14 이처럼 세 화승 집단은 19세기 후반 유행한 한 폭의 삼세불도 도상을 세 폭으로 그리고자 하였을 것이다.
한편 대둔사 <삼세불탱>은 화승 간 도상 및 구도의 공유가 드러나는 적극적인 협업의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15 일반적인 불화의 화기에는 제작자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화승들은 불화 제작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을 자주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각 화승의 업무 역할이 불화에서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출초, 묘선(描線), 채색 등을 분담하기 위해 많은 화승이 불화 제작에 참여하였으나 화기에는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된다.16
그런데 응석이 출초한 <약사불탱>과 상규가 그린 <아미타불탱>의 양식적 유사성은 두 화승 간 의견이 공유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17 두 불화에 나타난 불보살의 상호(相好) 표현과 천왕 등 권속의 자세는 거의 대칭을 이룬다. 이러한 유사성은 진불암(眞佛庵)에서 응석과 함께 머물렀던 상규가 <약사불탱>의 초본을 바탕으로 <아미타불탱>을 재구성한 데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상규는 대둔사의 불화를 제작하기 이전부터 응석과 화연(畵緣)을 맺었던 만큼 그의 초본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18 실제로 상규는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신중도>(1868)를 변용해 <신중도 초본>을 제작하는 등 응석의 작품을 변용한 경험이 있었다(Figs. 8
반면 철유는 다른 두 폭의 불화와 상이한 양식으로 <석가불탱>을 제작하였으나 키형[簸箕形] 광배의 표현에서는 응석과 협업하였다.20 대둔사 <삼세불탱> 이전에 제작된 철유의 작품에서는 모두 원형 광배만 확인된다.21 이에 반해 응석은 대둔사 불화 불사 이전에도 서울 개운사(開運寺) <괘불>(1879)과 봉은사(奉恩寺) 판전(板殿) <비로자나불도>(1886)에서 이미 키형 광배를 그린 바 있었다. 또한 당시 응석이 주로 활동했던 수도권의 한 폭 삼세불도에서는 석가여래를 키형 광배로 묘사한 사례가 다수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한 폭 삼세불도 형식에 익숙했던 응석의 제안을 철유가 수용했을 가능성이 크다.22
특히 대둔사 <삼세불탱>은 비슷한 시기 제작된 합천 해인사(海印寺) <삼신불도(三身佛圖)>(1885)와 비교했을 때도 주목된다(Fig. 10
이처럼 대둔사 <삼세불탱>은 세 화승 집단이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제작한 보기 드문 사례이다. 화승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한 폭 형식의 삼세불도를 대둔사 대웅보전의 후불벽에 맞게 세 폭으로 제작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한 폭처럼 보이는 세 폭의 <삼세불탱>을 구현하였다. 나란히 걸린 세 폭의 불보살은 거의 같은 높이에 그려졌으며 권속의 수나 사천왕 또한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되었다. 대둔사 <삼세불탱>은 이전까지 교유가 없었던 철유와 응석 · 상규가 합작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는 불화의 발원자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Ⅲ. 순비 엄씨의 <삼세불탱> 발원
대둔사 불화 불사는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던 1900년 북원 재건 불사의 연장선이었다27. 당시 황실의 사찰 시주는 자연스레 관료, 상궁을 비롯한 지방 사찰 등의 참여로까지 확장되었다28. 아울러 황실의 관심은 전라남도 관찰사 윤웅렬(尹雄烈, 1840~1911), 해남 군수 이용우(李容愚, 생몰년 미상) 등 지방 관료들의 지원을 동반하게 하였다.
뒤이어 진행된 대둔사 불화의 제작은 순비 엄씨(淳妃嚴氏, 1854~1911)가 주도하였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석가불탱>과 대둔사 <삼장탱(三藏幀)>에 쓰인 ‘황비전하구령만세(皇妃殿下龜齡萬歲)’와 ‘황비전하갑인탄(皇妃殿下갑인탄)’이라는 축원문이다(Figs. 11

먼저, 대둔사 <감로탱(甘露幀)>에 그려진 ‘순비전(淳妃殿)’ 전패(殿牌)는 엄씨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정실(正室)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준다(Figs. 13

다음으로, 윤상궁이 영친왕의 기도를 위해 해남에 내려간 것은 황자의 모친이었던 엄씨의 명령일 가능성이 크다34. 민건호(閔建鎬, 1843~1920)의 『해은일록(海隱日錄)』에는 “1899년 11월 7일 대둔사 승려 법한(法漢)이 정유(丁酉)에 태어난 황자(皇子)를 위해 기도를 하는 윤상궁을 모시고 서울에서 선로(船路)로 공상포(貢常浦)에 도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5. 특히 윤상궁은 대둔사 불화 불사에서 화주(化主) 역할을 맡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둔사 불사의 시주자 명단인 <각처시주 현판(各處施主懸板)>의 상궁질(尙宮秩)에 등장하는 윤씨대법행(尹氏大法行, 1836~?)으로 추정된다36. 윤씨대법행은 『불사시종과적』에도 육봉 법한(六峰法翰, 1867~1944)과 함께 화주로 기록된 인물이다37. 아울러 1902년 제작된 대둔사 <금고(金鼓)>에도 인권(引勸)으로 이름을 올렸다38. 인권과 화주를 맡을 정도로 윤씨는 대둔사 불화 불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둔사와 황자의 매개였던 윤상궁이 해남 대둔사의 불화 불사를 이끈 점은 엄씨와 대둔사 불화 간의 연관성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서울을 왕복했던 법한은 순비 엄씨를 비롯한 황실의 후원을 이끌어 냈다. 당시 주지에 해당하는 도총섭(都摠攝)의 자리를 맡았던 법한은 대둔사 재건 불사의 화주가 되었다39. 대둔사에는 법한이 황실의 후원을 받기 위해 서울을 12번이나 왕래하였는데 그의 정성에 엄씨가 크게 감동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40. 이는 순비 엄씨와 법한 사이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위의 사례들은 대둔사 <삼세불탱>의 제작에 순비 엄씨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시사한다.
Ⅳ. 화승의 원행과 <삼세불탱> 제작
황실 여성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엄씨는 자연스레 수도권과 강원도에서 활동한 화승들의 해남 원행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실이 관여한 불사에 목수 등을 비롯한 장인들이 중복하여 참여한 사례가 종종 확인된다. 예컨대 왕실이 후원한 파주 보광사(普光寺) 대웅보전 중수 불사의 도편수였던 유성일(劉聖日, 생몰년 미상)은 대둔사 불사의 대목수로 활약하였다41. 이런 사례는 왕실이 주도하는 사업에 고정적으로 참여한 장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순비 엄씨는 본인과 인연이 있던 화승들을 대둔사에 내려보내고자 했을 것이다42. 먼저 응석은 1901년 이전부터 엄씨가 후원한 불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상궁 시절의 엄씨가 발원한 서울 개운사 <괘불>(1879)과 남양주 불암사(佛巖寺) <괘불>(1895)의 제작에 금어(金魚)로 참여하였다. 또한 엄씨가 시주한 파주 보광사의 불사에서 불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순비 엄씨와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은 응석은 대둔사 불화 불사에 자연스레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43. 상규는 엄씨가 발원한 불화를 제작한 사례가 없었으나 응석과 함께 작업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해남에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기존에 같이 작업한 화승들은 헤어진 이후에도 불화를 함께 제작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규를 비롯한 일부 화승들은 응석과의 인연으로 대둔사의 불화를 제작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응석을 비롯한 수도권 화승들은 대둔사 불화 불사의 화주를 맡은 법한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왔다. 『해은일록』에는 “1901년 11월 4일, 밤이 깊었는데 본사(本寺) 중[僧] 육봉(六峯)이 서울에서 화공승(畵工僧) 10여 명과 내대감(內大監)을 모시고 절에 도착했다. 이 주사(李主事) 일상(一相)도 모시고 함께 왔다. 온통 사찰이 매우 분요(紛擾)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4. 특히 화주가 불사의 모든 것을 관장했다는 사실은 법한이 사찰과 황실을 잇는 책임자였음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권에 머물던 화승들은 불화 제작을 위해 중앙의 관료들과 함께 전라남도로 내려오게 되었다. 철유는 기존에 엄씨가 발원한 불화를 그린 적이 없었으나 당시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유명한 화승이었다. 따라서 그는 엄씨와의 간접적인 인연으로 해남에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1890년대 후반 석왕사(釋王寺)에 머문 시절 철유는 고관대작을 만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할 정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었다45. 그런데 윤용선(尹容善, 1829~1904)의 초상을 그린 이후 화법으로 유명해진 철유는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어진을 맡는다는 소문까지 도는 인물이 되었다46. 윤용선은 당시 영정모사도감도제조(影幀摹寫도監都提調)로서 태조 영정의 모사 작업을 주도한 관료였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이러한 철유의 실력이 윤용선에 의해 엄씨까지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윤용선은 엄씨가 순비를 거쳐 결국 황귀비의 지위까지 오르도록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던 엄씨의 최측근이었다47. 따라서 그는 철유와 엄씨를 이어 준 매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48.
철유는 대둔사 불화 불사 직전인 1901년 9월에 처음으로 전라남도를 방문하여 나주 다보사(多寶寺)의 불화를 제작했다. 그런데 그는 다보사의 단청 작업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해남으로 이동해야 했다49. 철유가 해남으로 갑작스레 향한 것은 당시 대둔사 불화 불사가 그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철유는 1901년 10월 9일 이후 나주에서 출발해 해남 대둔사로 넘어와 불화 제작을 준비했다. 그는 대둔사의 다른 불화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10월경 <십육나한탱 초본>과 <사자탱 초본>을 제작했다(Figs. 15

철유는 11월 초에 내려온 다른 화승들보다 먼저 도착했기에 자연스레 <삼세불탱>의 중앙 폭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19세기 이후 제작된 세 폭 삼불회도에서 불화 불사의 중심이 되는 화승이 중앙 폭의 제작을 맡았다50. 대둔사 불화 불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응석이었다51. 다만 철유는 당대 가장 유명한 화승으로서 서울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중앙 폭을 맡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철유는 화면 중앙에 여래를 그리는 화면 구도를 중요하게 여겼다52. 이로 인해 중앙 폭인 <석가불탱>을 철유가 맡고 <약사불탱>과 <아미타불탱>을 응석과 상규가 그리게 되었다.
이처럼 대둔사 <삼세불탱>은 수도권과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세 화승 집단의 협업 결과물이었다. 철유는 기존에 함께 작업한 적 없는 응석 · 상규와 <삼세불탱>을 그리기 위해 협업하였다. 이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한 폭의 삼세불도를 대둔사 대웅보전이라는 공간에 맞게 변용하였다. 그들은 협업을 통하여 세부 도상을 공유하고 <삼세불탱> 제작을 의논하였다. 한 폭처럼 보이는 세 폭의 <삼세불탱>은 화승들의 원행과 협업으로 인해 제작되었다.
Ⅴ. 맺음말
대둔사는 사액(賜額)된 표충사(表忠祠)가 지어지며 조선 후기부터 왕실의 후원을 받은 사찰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국가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대둔사에는 제물의 공급이 끊기고 면세의 특권 또한 사라졌다53.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대둔사는 1899년의 화재로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으나 황실을 비롯한 중앙 · 지방 관료, 상궁 등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사세(寺勢)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00년 이후 대둔사는 왕실 원당으로 기능하게 되면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54.
특히 황실이 발원한 서울 및 근기 사찰과 비교해도 큰 규모로 진행되었던 대둔사의 불화 불사는 사찰의 위상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 “계속해서 단청공사를 하면서 불상 · 불화도 만드니 화성(化城)에 방불(彷彿)하였고 어렴풋이 영취산 같았다.”라는 취운 혜오(翠雲慧悟, 1866~?)의 기록은 불화 불사의 규모를 잘 보여 준다55. 당시 대둔사에서는 35점의 불화가 제작되고 60구의 성상이 개채(改彩)되었다. 이는 황실이 후원한 1903년 서울 도선사(道詵寺, 14점)나 1907년 수국사(守國寺, 13점)의 불화 불사보다도 압도적으로 큰 규모였다. 이러한 수량 차이는 단순한 제작 건수의 비교가 아닌 대둔사 불화 불사가 당대 대규모로 이뤄졌다는 점을 말해 준다.
35점의 불화 중 대둔사를 대표하는 <삼세불탱>은 여러 화승이 협업하여 완성한 결과물이었다.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한 폭 형식의 삼세불도는 대둔사 대웅보전이라는 공간에 맞게 세 폭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각 폭의 도상 배치는 화승들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울러 순비 엄씨라는 황실 발원자의 존재는 화승들의 대규모 해남 원행을 이끌어 낸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순비 엄씨와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은 응석, 철유, 상규는 각각의 경로로 대둔사에 도착했다. 세 화승 집단은 대둔사 불화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삼세불탱>의 각 폭을 분담하여 제작하였다. 나아가 응석 · 철유 · 상규는 의견을 공유하며 불화의 도상을 구성하였다. 즉 대둔사 <삼세불탱>은 엄씨의 후원 아래 화승들이 원행하여 제작한 협업 작품이었다.
이처럼 본 연구는 순비 엄씨가 화승들의 원행과 협업에 끼친 영향에 주목하며 <삼세불탱>의 제작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개별 화승, 도상 분석, 발원자 연구를 연계하여 분석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불화 제작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대둔사 <삼세불탱>이 조선 말기의 불화 제작이 이뤄지는 방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임을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