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es and Dissemination of Auspicious Animal Paintings in Nineteenth-century Chosŏn: Group-type Compositions
1 Myongji University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transformation and dissemination of Auspicious beast paintings (Sŏsudo) in nineteenth-century Chosŏn, with particular emphasis on group-type compositions. Auspicious beasts refer to mythical animals such as dragons, phoenixes, and qilin, which functioned as visual embodiments of auspicious omens (sangsŏ) and developed in close association with rulership and ideals of an age of peace and prosperity. In the late Chosŏn period, group-type auspicious beast paintings—centered on family imagery that projected royal aspirations for dynastic prosperity and male offspring—were initially formed within the court and subsequently spread into the private sphere, where they underwent diverse transformations. This expansion and variation of Sŏsudo coincided with the growth of the painting and calligraphy market and changes in modes of artistic circulation during the late Chosŏn period, resulting in the rapid popularization of such imagery. These developments can be interpreted as visual responses to the social instability and uncertainty of the time. The family-based group-type auspicious beast paintings that emerged in nineteenth-century Chosŏn constitute a distinctive pictorial tradition not found in contemporaneous Chinese or Japanese representations of auspicious beasts, and they serve as key visual evidence of the process by which court painting traditions permeated popular culture. By systematically classifying the typologies of Sŏsudo, this study seeks to reassess their art-historical significance and to reposition auspicious beast paintings within the broader narrative of Chosŏn painting.
Ⅰ. 서론
서수(瑞獸)는 용(龍), 봉황(鳳凰), 기린(麒麟)과 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을 일컬으며, 동아시아에서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알리는 상서(祥瑞)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서수는 고대 사회부터 통치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회화, 건축, 조각, 복식,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형상화되었으나 현전하는 서수도(瑞獸圖)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 편중이 두드러진다1. 서수도에 관한 선행연구는 용, 봉황, 기린, 현무(玄武) 등 주로 개별 도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거나 화조 · 영모화(花鳥 · 翎毛畵)의 일부분으로 다루어졌다2. 이에 따라 서수가 조선 후기에 주요 화제로 부상하게 된 배경과 특정 시기에 서수도가 다수 제작될 수 있었던 원인, 그리고 궁중 서수도의 민간 확산 양산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2. 따라서 본 연구는 19세기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성립된 군집형(群集型) 서수도에 주목하여, 궁중 회화와 민화의 경계를 구체화하고, 조선 회화사에서 서수도의 독자적 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연구의 대상은 다양한 서수 중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회화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용, 봉황, 기린의 도상을 중심으로 한다. 이들은 19세기 서수도의 주축이 되는 서수이며 시대 흐름에 따른 도상의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서수이다. 서수도는 표현 방식에 따라 단독형(單獨型), 쌍형(雙型), 군집형(群集型)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본 연구는 19세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군집형 서수도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겠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궁중 회화가 민간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서수의 의미가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고찰하여,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서수도가 갖는 의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Ⅱ. 조선시대 瑞獸圖의 전개: 19세기 이전 瑞獸圖의 양상
서수는 상서와 길상의 표상으로 인간의 상상에 의해 형성된 존재로 현실 동물들이 해내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초현실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상서는 자연현상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로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으로 체계화된 후 통치자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국가적 개념으로 활용되었다3. 길상은 행복하고 기쁜 일의 징후로 개인의 복과 행운을 기원하는 일상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4. 서수는 상서와 길상의 개념을 바탕으로 왕권과 국가 질서를 상징하는 동시에 개인의 복을 염원하는 도상으로 기능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서수를 대표하는 용은 왕의 상징, 봉황은 태평과 왕후의 덕(德), 기린은 덕치(德治)와 다남(多男), 사자와 해치는 정의와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서수의 개념은 한반도에도 일찍부터 수용되어 발전하였다.
한국에서 서수는 건국 신화나 왕의 탄생 설화에서 자주 언급되며, 왕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보하는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일찍부터 확인되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서수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서수도에 대한 이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50년(628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용을 그려놓고 비를 빌었다고 하여 서수도가 기우(祈雨)와 관련한 제의적 성격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5.
고려시대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부정을 물리치려 백택(白澤)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백택이 고려시대에 벽사적 기능을 지닌 상서로운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6. 백택의 형상은 사자와 비슷하며, 얼굴 주변에는 갈기가 있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신수(神獸)이다7. 백택은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는 능력이 있으며, 기린이나 봉황처럼 태평성대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황제가 동쪽 바다를 순행하던 중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신수 백택을 만났는데, 백택이 세상에 존재하는 11,520종의 요괴를 말해주었다”고 한다8. 『회남자(淮南子)』에서는 “황제가 백택의 그림을 얻어 천하의 귀신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간직하여 불길한 일을 방비하였다”고 전한다9. 이는 백택이 예지력을 갖춘 서수이자 벽사의 신수로 기능하게 된 전승의 근거가 되며, 이색의 기록은 고려시대 서수도가 일상생활과 밀접해지면서 액막이용으로 기능하였음을 시사한다.
조선 전기에는 서수도의 기능이 더욱 확장되어 외교적 맥락에서도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1419년)에는 경녕군 이비(李裶, 1395~1458)가 명(明) 영락제(永樂帝)에게 기린, 사자(獅子), 복록(福祿) 등의 상서로운 그림 5축(軸)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10. 이에 대한 답례로, 열흘 후(12월 17일)에 조선 왕실에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을 작성하여 성절사(聖절사)를 파견하였다. 표문에는 선물로 받은 서수의 뜻을 인용하여 영락제의 치세로 태평성대를 열었음을 축하하는 내용이 담겼다. 성인이 등극함에 태평을 밝게 열었으며, 신물(神物)이 때에 맞춰 나타나 좋은 징조(徵兆)를 나타낸다. ⋯ 이 신령하고 기이한 산물은 태평과 형통의 징조이다. 기린은 오행의 정수이며, 사자는 백수의 으뜸이다. ⋯ 진정한 성스러운 통치가 이끌어낸 결과이다11.
여기에 등장하는 기린과 사자는 상상의 동물을 말하는 것으로 한대(漢代) 『시전(詩傳)』에는 “기린은 상서로운 동물이다, 노루의 몸에 소의 꼬리, 말의 발굽을 지녔으며 황색이고 하나의 뿔이 있는데 그 끝에 살이 있다”고 전한다12. 기린을 서수로 정의하여 상서로운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에는 “기린의 발이여, 훌륭한 공후의 자제로구나, 기린의 이마여, 훌륭한 공후의 자손이로구나”라고 하여, 기린이 왕실 자제의 덕행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13.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도판과 함께 “기린은 사슴의 몸, 소의 꼬리, 말의 발, 둥근 굽을 가졌고, 하나의 뿔이 있으며 뿔 위에 살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명대까지 도상의 전형이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Fig. 1
또한 사자는 산예(狻猊)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주(西周, 기원전 1046-기원전 771)시대 『목천자전』에서는 “특별한 짐승은 천리를 달리는데, 산예와 야마는 오백리를 달린다”고 하였으며, 진(晉)의 곽박(郭璞)은 “산예는 사자이며,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사자는 집안의 악귀를 물리치는 진택피사(鎭宅辟邪)의 역할을 하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인식되었고, 제왕의 능묘를 수호하는 맹수로, 불교에서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민간에서는 길상을 상징하는 존재로 확장되었다. 현실의 동물인 사자는 서기 원년경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 서부에 전해졌으며, 한 무제가 장건(張騫)을 서역에 파견하여 실크로드가 개통된 이후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 문화 속에서 사자 도상이 산예와 혼합되며 상서로운 서수로 정착하였다15. 세종대의 기록은 기린과 사자와 같은 서수에 대한 인식이 조선에서 이미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종실록』 1431년 11월 기록에는 성절사의 표통에 그려진 용의 어금니를 그리지 않아서 이를 보완하여 다시 보냈고, 이에 책임으로 궁중 화원 양비(楊斐)에게 태형 20대를 내린 기록이 전한다16. 더욱이 8년 후, 1439년에는 용과 봉황의 눈알이나 발톱을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리와 화원이 탄핵을 입은 자가 있었던 사실이 다시 언급된다.
용 · 봉(龍鳳)이 몸통과 날개 등을 한 획(畫)도 틀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혹은 눈알을 그리지 아니하고 혹은 발톱을 그리지 아니하여, 관리들이 탄핵을 입은 자가 있으니, ⋯ 용의 몸 · 발톱 · 머리 · 뿔 · 귀 · 눈 · 코 · 입과 봉(鳳)의 발 · 발톱 · 털 · 날개 · 입 · 눈을 다시 자세히 살피고 검열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17.
서수 도상에 대한 반복된 검열과 화원의 형벌 사례는 조선 전기에 궁중 서수도의 형상화에 엄격한 도상의 규준이 적용되었음을 시사하며, 궁중 서수도의 표현 방식에 일정한 전형이 마련되어 계승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밖에 조선 전기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서수도가 향유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는 “손님이 용(龍) · 봉(鳳) · 귀(龜) · 인(麟) 네 가지 그림을 가져와 글을 청하니, 사령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공자가 기린을 보고 울며 세상 풍조를 한탄하였다”고 전한다18. 서거정은 서수도를 통해 태평성대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드러내는 비판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는 서수도가 단순한 길상화에 그치지 않고, 왕도정치와 유교적 교훈을 환기하는 상징적 회화로도 기능하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서수도는 서수의 표현에 따라 단독형, 쌍형, 군집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단독형 서수도는 배경이 생략된 형태로 한 마리의 서수만을 부각하여 묘사한 것을 말하며, 주로 세화와 벽사용으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용, 봉황, 기린, 신귀 등을 각각 단독으로 그린 사령도가 있다. 쌍형 서수도는 두 마리의 서수가 등장하는 그림으로 쌍룡도, 쌍봉도, 쌍린도의 형태가 대표적이다. 쌍룡도의 경우 궁중에서는 왕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도상으로 어전에 장식되었고, 민간에서는 벽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쌍봉도와 쌍린도의 경우 부부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로 활용되었다. 군집형 서수도는 다수의 서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한 종류의 서수가 다수 등장하는 경우와 다양한 서수가 혼재하는 형태, 그리고 가족을 이룬 형태로 세분화할 수 있다. 특히 가족 중심의 군집형 서수도는 19세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으며,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군집형 서수도의 가장 이른 사례로는 동관왕묘의 <구룡도(九龍圖)>가 있다(Fig. 2
화면에는 황룡 일곱 마리와 청룡과 백룡이 각 한 마리씩, 총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본래 용은 왕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상징하기 위해 어전 장식에서 단룡이나 쌍룡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구룡도>는 다수의 용을 구름과 함께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중국에서 숫자 ‘구(九)’는 예로부터 양(陽)의 숫자이자 길상의 숫자로 여겨졌고, 완전함과 최고를 의미하며 동시에 영속성을 의미하며, 황제의 상징으로 황제가 거주하는 공간에는 구룡벽(九龍壁)을 설치하여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ilbergeld and Wang(2016); 티모시 브룩(2014). 중국 촉(蜀)의 장수였던 관우는 당(唐)·송(宋)대 이후 신격화되었으며, 명·청대에 이르러서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불리며 황제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받고 널리 숭앙되었다21. 중국에서 황제의 권위를 시각화하고 어전 장엄하는데 사용된 구룡(九龍) 도상의 상징성은 관우의 신격화와 맞물려 조선의 동관왕묘 관우상 뒤편에 <구룡도>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 왕실 의례 공간에서 등장한 군집형 서수도는 궁중 내전을 장식하던 병풍으로 확산되어, 용 이외의 서수들까지 군집형으로 표현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례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선도6폭병풍(요지연도)>에는 암수 한 쌍의 기린이 등장하여 주목된다(Fig. 3
Ⅲ. 19세기 군집형 瑞獸圖의 성립과 특징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형태의 서수도가 제작되었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서수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군집형 서수도가 본격적으로 성립하였다. 19세기 군집형 서수도의 성립 배경을 이해하는 데 주목되는 기록으로는 이이순(李頤淳, 1754~1832)의 『후계집(後溪集)』 「대조전수리시기사(大造殿修理時記事)」가 있다. 1802년 순조와 순원왕후(1789~1857)의 가례를 치르기 위해 열흘간 창덕궁 대조전을 수리한 기록으로, 대조전 북벽에 구추봉도(九雛鳳圖)를 붙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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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堂)의 북쪽 벽 중앙에 금전병(金箋屛) 두 폭을 설치하고, 광두정(廣頭釘)으로 고정하였다. 그 앞에 요지연병 10첩을 병풍을 세우고 용상을 놓았으며, 그 위에 용문석을 깔았다..(중략)..북쪽 벽에는 아홉 마리 어린 봉황을 그린 그림(九雛鳳圖)을 붙였다.
구추봉도는 중국 동진(東晋)의 목제(穆帝) 시기에 봉황이 아홉 마리의 새끼 봉황을 데리고 성에 나타났다는 상서의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실의 번창과 다남의 염원을 반영한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02년에는 궁중 가례에서 구추봉도와 같은 다수의 서수가 그려진 군집형 서수도가 내전 장식화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실례로는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봉황도>가 있다(Fig. 4
서수도가 19세기에 이르러 확산된 또 다른 배경은 규장각(奎章閣)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수록된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 녹취재(祿取才) 화제 기록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차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출중한 사람을 녹취재를 통해 차출한 제도로 조선 후기 궁중 회화의 변모에 영향을 끼친 제도적 기반이었다.강관식(2001) 녹취재에서 서수 화제는 순조대(純祖代, 1800~1834)부터 고종대(高宗代, 1863~1907)까지 20여 차례 출제되었으며, 서수 화제 출제 빈도가 집중된 시기는 철종대이다. 녹취재의 서수 화제 출제는 순조의 박물학적 관심과 선호에 따라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순재고(純齋稿)』에는 봉황 · 기린 · 사자 · 거북 등 동물을 항목별로 분류한 기록이 남아 있어 서수에 대한 순조의 관심을 보여준다.『순재고(純齋稿)』 또한 철종대 서수 출제 빈도가 집중된 사실은 철종의 신분적 취약점을 보완하고 왕실의 위엄과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서수가 활용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강관식(2001) 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은 어린 왕의 즉위와 후사를 이을 왕손의 부족으로 왕위 교체가 잦았던 시기였다. 때문에 조선 왕실에서는 다남에 대한 염원이 절실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치 · 사회적 배경 속에서 서수도는 왕손 번창과 다남의 염원을 투영한 새로운 유형의 장식화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가족 중심의 군집형 서수도가 궁중 장식화로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녹취재에 출제된 서수의 종류는 봉황, 기린, 난(鸞), 신작(神雀)이 출제되었고, 그중 봉황과 기린의 출제 빈도가 높다. 서수 화제는 1817년 순조대에 태평성대에 봉황이 누각에 깃들고, 기린이 원유에서 논다는 고사를 바탕으로 한 ‘봉황소어아각(鳳凰巢於阿閣), 기린유어원유(麒麟遊於苑囿)’로 출제되었다. 그리고 철종대에는 기린도가 독립 화제로 출제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Table 1
| Title | Date | Type | Types of Auspicious Animals |
|---|---|---|---|
| Nine Dragons Painting, Tonggwanwangmyo Shrine, Sŏul | Late 17th century - Early 18th century | single-species cluster type | dragon (nine dragons) |
| Phoenix Painting, Philadelphia Museum of Art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phoenix (nine phoenixes including offspring) |
| Auspicious Animals Painting, Private Collection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kirin, lion |
| Kirin and Lion Paired Screen, Leeum Museum of Art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kirin, lion |
| Kirin Paired Screen, Leeum Museum of Art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kirin |
| Kirin Painting, Private Collection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kirin |
| Auspicious Animals in Paradise, Leeum Museum of Art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dragon, phoenix, kirin, nan, turtle |
| Auspicious Animals Eight-panel Screen, Horim Museum | 19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dragon, phoenix, lion |
| Kirin Longevity Painting,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 Late 19th century - Early 20th century | family-group cluster type | kirin |
| Lion Longevity Painting, in Carlo Rossetti’s Corea e Coreani | Before 1903 | family-group cluster type | lion |
| Playing Lions Painting, National Museum of Korea | Before 1918 | family-group cluster type | lion |



<서수도>와 <기린사자쌍폭병풍>은 공통적으로 화면을 사선으로 분할하여 상단에는 불수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배치하고, 중심부에는 괴석을 중심으로 장미와 모란을 배치하였다 (Figs. 5, 6). 이러한 구도와 경물의 배치는 중국 명대 여기(呂紀)의 <애하화조도(崖下花鳥圖)>와 유사하며, 18세기 조선의 궁중 화조화와 친연성을 보인다. 서수를 통해 상서로운 공간 구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복숭아와 불수감을 통해 다수(多壽)와 다복(多福)의 길상적인 의미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대련(對聯) 형식의 가족 중심 서수도는 중국의 화조화의 조형 원리를 조선의 궁중 장식화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창안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서수도에는 기린과 사자가 각각 암수 한 쌍의 부모 개체가 새끼를 거느리고 있다. (Fig. 5)와 (Fig. 6)이 두 마리의 새끼를 거느렸다면 (Fig. 7)에서는 새끼의 수가 다섯 마리로 늘어났다. 이는 군집형 서수도 다남의 상징성이 강조되면서 점차 새끼의 개체 수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기린도>는 4폭의 연폭 화면에 복숭아, 영지, 바위, 구름 등을 배경으로 기린 가족을 묘사한 군집형 서수도로 정형화된 도상과 물상의 배치, 섬세하고 정교한 채색 등 궁중 화풍의 특징을 반영한다(Fig. 8

<서수낙원도>는 다종의 서수가 혼재하는 군집형 서수도로 열폭의 연폭 병풍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구도와 배경은 십장생도와 친연성을 보이며, 청록산수를 배경으로 화면의 중심부에 서수를 배치하고, 외곽에는 학, 사슴, 오리, 공작과 같은 현실 동물을 배치하였다. 청록 암석의 표현이나 현전하는 십장생도에서의 백록 출현은 십장생도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특징을 보여준다.박본수(2002) 무엇보다 화면에 등장하는 서수와 동물들은 암수 한 쌍이 9마리의 새끼를 대동하여 11마리씩 표현된 특징을 보인다.
화면 좌측 2폭에 걸쳐 묘사된 용은 구름과 함께 성체 용 두 마리와 아홉 마리의 새끼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앞서 살펴본 동관왕묘의 <구룡도>와 다수의 용을 구름과 함께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의례 공간을 위해 독립된 용 아홉 마리를 그림으로써 왕의 권위를 상징하였던 <구룡도>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용생구자(龍生九子)는 용이 낳은 아홉 마리 자식을 지칭하는 개념이지만, 여기에 부모 용 두 마리를 더한 구성은 용생구자의 전통적 의미를 차용하여 새로운 도상을 만들어 냈다. 즉, 19세기 궁중 군집형 서수도에서 용은 제왕적 상징을 넘어 가족의 번영과 다남(多男)을 시각화한 형태로 변모하였다.
화면 중앙의 봉황과 기린 일가의 표현은 앞서 살펴본 차비대령화원 녹취재에서 ‘봉황소어아각, 기린유어원유’의 고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봉황은 태양을 향해 우는 모습의 봉명조양도(鳳鳴朝陽圖)와 아홉 마리 새끼를 함께 그린 구추봉의 형식이 결합된 양식으로, 명대 중기 임량(林良, 약 1426~1480)의 <봉황도>나 『고씨화보(顧氏畵譜)』의 봉황 도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며,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의 <봉황도>에서도 확인된다.이재은(2016) 이렇듯 구추봉 도상은 중국 동진의 목제 시기에 상서에서 유래하여, 19세기 조선에서는 부부화합과 다산의 길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봉황의 하단에는 기린 가족이 묘사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본 구룡도나 구추봉도의 표현은 중국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기린이 가족을 이룬 형태의 도상은 조선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유형이다. 이러한 기린 일가의 표현은 앞서 살펴본 기린도들과 친연성을 가지며, 차비대령화원 녹취재 출제 화문과도 관련된다. 녹취재에서 봉황과 기린이 함께 등장하는 시기는 순조대에 한정되고, 기린이 단독 주제로 정착된 것은 철종대였다. 또한 용의 표현은 철종대(1856년)에 제작된 『순조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純祖仁陵遷奉山陵도감의궤)』의 청룡 도상과 일치하며, 고종대에는 봉황 이외의 서수는 출제되지 않았던 점, 더불어 1880년(고종17)에 제작된 『철인왕후예릉산릉도감의궤(哲仁王后睿陵山陵都監儀軌)』 청룡도 도상에서는 유사점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19세기 중반으로 좁혀볼 수 있다.
<서수낙원도>에서 일가를 이룬 서수는 왕족 일가를 서수와 동일시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서수가 단순히 상서의 출현이 아닌 다남의 길상성과 왕실 번영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조선의 서수도가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조선 왕실에서 궁중 장식화에 부합하는 형태로 서수 도상을 번안하였음을 시사한다. 궁중에서 창안된 가족 중심의 서수도의 구성 원리는 민간 회화로 확산되어 서수의 표현과 의미가 다층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다음장에서는 이러한 궁중 서수도 양식이 민간 회화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를 살펴보겠다.
Ⅳ. 19세기 군집형 瑞獸圖의 민간 확산과 변용
19세기 서수도는 왕실을 넘어 민간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민간에서는 서수도가 일상생활 공간과 밀접해지면서 화제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 절충되거나 소재를 공유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입신출세, 다남, 장수, 벽사 등 현실적인 욕구를 반영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특히 궁중에서 정착된 가족 중심의 군집형 서수도는 민간에서 다남의 상징으로 선호되었다. 서수도의 확산과 변용은 서화시장 발달에 따른 수요자의 확대, 서화 유통 매체의 변화, 그리고 정치 질서의 변동과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던 19세기 조선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개인소장 <서수도8폭병풍>은 민간에 서수도의 유입과 확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Fig. 10
병풍의 1 · 8폭에는 운룡도의 형태로 용이 표현되었고, 2 · 7폭에는 구추봉 도상을 배치하였다. 3 · 6폭에는 사자 가족을 묘사하였다. 용의 하단에 표현된 수파(水波)나 오동나무와 짝을 이룬 봉황의 묘사 등 전체적인 소재와 구도는 궁중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용의 발톱과 봉황의 꼬리, 여의주의 단순화, 청록산수의 도식적 표현 등 세부 표현이 조금씩 변형되었다. 특히 3폭과 6폭에 묘사된 사자의 경우 궁중 서수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기린을 대신하여 사자 가족의 표현이 두 폭을 차지한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주문자의 취향에 따라 서수가 채택되었음을 의미하며 민간에서 사자에 대한 선호가 높았음을 반증한다.
보나장신구박물관 소장의 <서수장생도>와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화조영모화>는 서수도가 민간에 확산되어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Figs. 11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화조영모화>에서는 서수 도상의 변용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서수뿐만 아니라 현실의 다양한 생물들까지 가족형으로 전이되는 변화 양상이 간취된다. 기린의 경우 외뿔이 달린 것 외에는 현실의 노루와 거의 흡사하며 꼬리 표현에 있어서 다람쥐 꼬리처럼 높이 치솟아 오른 형태로 변화하였다. 봉황 또한 꼬리를 제외하고는 닭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하였다.
이처럼 민간에서는 서수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만 유지하고 신체 비례나 세부 묘사 등의 나머지 부분은 화가의 재량에 따라 크게 변용되었다. 이러한 도상적 변형은 서수에 대한 정보의 부족, 미술 교육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민간 화가들의 한계, 그리고 서화 시장의 발달에 따른 서수도의 급속한 확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844년 한산거사가 쓴 「한양가(漢陽歌)」에는 “광통교 아래 가게에 각색(各色) 그림 걸렸구나”라는 기록을 통해 서화 시장에서 각종 장식화가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기록은 서수도가 병풍 형식이 아니더라도 병풍차(屛風次)와 같은 낱폭의 그림으로 유통되었으며, 대중적으로 확산하였음을 의미한다. 휴대의 용이성과 이동의 편리함, 병풍보다 저렴한 가격 등의 경쟁력을 갖춘 병풍차는 서화 유통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유통 매체의 변화는 궁중 서수도가 민간에 확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면 외국인에 의해 손쉽게 수집될 만큼 서수도가 보편화된 장식화로 자리 잡는다. 존 버나도(John Baptiste Bernadou, 1858~1908)와 샤를 바라(Charles Varat, 1842~1893),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1876~1948)가 수집한 <봉황도>는 1884~1902년 사이에 수집된 것으로, 붉은 태양과 오동나무를 배경으로 한 쌍의 봉황과 9마리의 새끼를 배치한 동일한 구성을 보인다. 이 그림들은 주제와 배경, 기법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본(本)을 바탕으로 한 복제화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당시 서수도가 상품화된 이미지로 유통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형의 그림은 봉황뿐만 아니라 기린이나 사자와 같은 서수로도 그려졌다(Fig. 13
종로에 복제화와 종이를 파는 거리에서 몇 전만 주면 용이나 호랑이 날개 돋친 말 옛 전사들의 환상적인 형상들을 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을 문짝에 붙여 놓으면 집에서 악귀를 내쫓는다고 한다. 이들 복제화 중에는 옛 신화에 등장하는 성현들과 수호신을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방에만 사용하며 한국의 어느 집에나 같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로제티가 언급한 “어느 집마다 같은 그림이 걸려 있고, 문짝에 붙여 놓았다”는 기록을 통해 서수도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고, 실제로 <여염집 내부> 사진 자료를 보면 마루에서 다듬이질하고 있는 부인들 뒤편 문풍지에 쌍봉황도와 쌍사자도가 부착되어 있다(Fig. 14
민간에서 사용된 서수도의 저변화 양상은 <사자장생도(獅子長生圖)>와 <기린장생도(麒麟長生圖)>와 같은 횡축형 서수도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횡축형 서수도는 대청마루나 문지방 상단에 부착하여 사용되어 가옥과 함께 소모된 경우가 많아 현존하는 횡축형 서수도가 드물다. <사자장생도>는 20세기 초에 촬영된 것으로 붉은 해와 산수를 배경으로 사자 가족이 등장한다(Fig. 15

<사자유희도>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물품 청구서에 ‘교태전벽면첩부(交泰殿壁面貼付), 사자도’로 기재되어 있으며, <원후반도도(猿猴蟠桃圖)>와 <화조화(花鳥畵)>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기록은 1918년 4월 22일에 작성된 것으로 <사자유희도>가 교태전 부벽화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교태전이 훼철되기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서수도가 제작 시기나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지만, <사자유희도>는 궁중 장식화의 내력이 분명한 서수도로 그 의미가 크다. 화면에는 상단의 사자 두 마리가 하단의 새끼 사자 다섯 마리를 내려보는 구도로 구성되었으며, 밤하늘의 은하수를 배경으로 상단과 하단을 시각적으로 구분하였다. <사자유희도>에는 다양한 회화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궁중 장식화에서 밤 장면이 묘사되는 경우는 드물며, 금박을 사용한 구름 표현이나 별빛 묘사에 사용한 백색 안료의 사용과 흩뿌리듯 표현한 별빛은 기존의 궁중 회화에서 보기 어려운 기법으로 이색적이다.
하단에는 기명절지와 새끼 사자들을 배치하였는데, 대나무와 화초의 표현은 교태전 부벽화로 제작된 <화조도>와 <원후반도도>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본 <서수낙원도>와도 친연성을 보인다. 또한 뿌리가 뽑힌 수선화의 표현은 19세기 장승업과 그의 제자인 안중식이나 조석진의 기명절지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화법으로 19세기 조선의 기명절지화 화풍이 반영된 예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심 화제인 사자의 불타오르는 영기(靈氣), 붉은 코, 몸 전면의 원형 반점은 조선 후기 서수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표현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처럼 <사자유희도>와 <사자장생도>는 유난히 가족의 유대성을 강조한 조선 서수도의 전통이 20세기 초 사회 격변기에도 궁중과 민간에서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9세기 가족 중심의 군집형 서수도는 동시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조선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으로, 조선의 궁중에서 형성된 새로운 유형의 서수도가 민간을 거쳐 근대 초까지 전승되었다.
Ⅴ. 결론
본 연구는 19세기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된 군집형 서수도를 중심으로 서수도의 변화와 확산과정을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서수도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활용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면 왕실의 번영과 다남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궁중에서 서수가 일가를 이룬 독특한 유형의 군집형 서수도가 성립하였다. 다남의 의미가 강조된 궁중 서수도는 조선 후기 서화 시장의 확대와 병풍차와 같은 유통 매체의 변화 속에서 민간에 확산되었다. 민간에서는 주문자의 취향과 선호에 따라 서수가 채택되었으며, 서수 도상의 다채로운 변용이 이루어졌다. 특히 궁중에서 촉발된 가족 중심의 군집형 서수도 양식은 민간에서 정착하면서 서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이 가족을 이루는 형태로 전이된 양상을 보인다. 장수와 다남은 인간의 기본적인 염원이지만, 유독 이 시기에 가족 중심의 장식화가 저변화 된 까닭은 19세기 말 사회적 불안이 생존 욕구와 종족 번성, 재앙 방지의 염원이 그림에 투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서수도는 궁중회화와 민화에서 공통적으로 단란하며 친밀하고 해학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는 조선인의 미학적 정서를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서수도의 변화와 확산은 조선 후기 정치 사회 구조의 변화, 경제 발달 및 당시 조선인의 의식변화와 맞물려 전개되었다39. 김영은, 앞의 논문, pp. 126-128.
지금까지 서수도는 화조화 또는 영모화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져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서수도의 변화 과정을 파악함으로써 궁중회화와 민화의 층위를 세분화할 수 있다. 또한 가족 중심의 군집형 서수도는 단순한 장식화의 범주를 넘어 궁중 회화가 민간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조선과 같은 부(父), 모(母), 자(子), 녀(女)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등장시키는 군집형 서수도는 나타나지 않는 유형으로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성립한 회화 양식이라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크다. 본 연구는 조선 서수도의 변화와 전이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의 틀을 제시하여 향후 관련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수도가 조선시대 회화사의 중요한 장르로 재평가되기를 희망하며, 향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서수도 도상과 기능의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로 학문적 논의가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