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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umption Patterns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in the Early Chosŏn Period

Subin Kim1

1 Hanu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Published: January 2025·Vol. , No. 328·pp. 35-65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specific patterns of consumptio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in the early Chosŏn period and to examine its characteristics within an integrated analytical framework. Based on accumulated archaeological excavation data, this study finds that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was produced and consumed primarily in the Ch'ungch'ŏng region, demonstrating a clear regional specificity. Although such wares were used across a range of settings—including royal palaces, government offices, and Buddhist temples—they were predominantly consumed in private contexts, indicating their strong character as utilitarian ceramics. Among the defining features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its regionality stands out most prominently. The formation of this regional specificity can be attributed to both historical and geographical factors: the establishment of the official kiln system (kwanyo) during the early Chosŏn period, and the strategic position of Ch'ungch'ŏng Province as a transportation and distribution hub due to its proximity to the capital. These conditions facilitated both production and circulation within the region. Further comparative research, particularly with contemporaneous decorated ceramic wares, is expected to clarify more precisely the positio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within the ceramic production system of early Chosŏn Korea.

Keywords: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Early Chosŏn periodConsumption patternsRegionalityCh'ungch'ŏng Province

Ⅰ. 머리말

철화분청자(鐵畵粉靑瓷)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문양이 장식된 자기 중 하나로, 청자(靑瓷)의 태토(胎土) 위에 백토(白土)를 분장한 뒤 철화안료로 문양을 장식한 자기를 지칭한다1. 국내 학계에서 철화분청자는 생산 시기 및 생산 배경, 조형적 특징, 성분 등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어왔으나, 대개 분청자의 일종(一種)으로 간략하게 언급되거나 조형적 특징이 부분적으로 다뤄진 정도였다2. 철화분청자를 단독으로 다룬 선행연구는 소수에 불과하며,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발굴 조사되어 철화분청자의 대표적인 생산 유적으로 인식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일대에 위치한 공주 학봉리 가마터를 중심으로 생산과 관련된 측면에 집중되어 연구가 이루어졌다3.

반면, 철화분청자의 소비와 관련된 측면을 다룬 선행연구는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일부 전시 도록에서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토대로 충청남도 동남지역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음이 언급된 정도이다4. 철화분청자의 성격 또한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하였는데, 분청자의 한 종류로 포괄되어 민예적 성격으로 설명되거나 분청자의 변천 과정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하나의 단계로 이해되어왔다5. 그러나 기존의 인식과 달리 여러 시문 기법을 통해 제작된 분청자는 각기 다른 생산 배경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어 하나의 성격으로 일괄하여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6.

한편, 최근까지 이루어진 국내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철화분청자의 소비 양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기존의 연구 성과에 더하여 철화분청자의 소비 양상을 함께 살펴본다면 분청자라는 다소 포괄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철화분청자만의 독자적인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그동안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던 철화분청자의 소비 양상을 파악하여 철화분청자의 성격에 대한 유기적인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통계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소비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를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소비 유적을 지역별, 성격별로 분류한 뒤 출토량, 조형적 특징 등을 비교하여 철화분청자의 구체적인 소비 양상과 성격에 대한 파악을 시도할 것이다. 또한, 철화분청자가 제작된 시대적 배경과 지역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소비 양상을 통해 파악 가능한 철화분청자의 여러 특성 중 가장 뚜렷한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지역성(地域性)의 형성 요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철화분청자의 소비 양상

최근까지 이루어진 국내 가마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일부 가마에서도 철화분청자의 생산이 확인되었다7. 그러나 공주 학봉리 이외의 가마에서는 현저히 적은 수량의 철화분청자가 출토되어 필요에 따라 소량의 철화분청자가 한정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기존의 인식과 같이 철화분청자의 주요 생산지는 공주 학봉리 가마인 것으로 파악된다8.

소비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의 조형을 분석해보면, 실제 소비 역시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 제작된 철화분청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소비 유적에서 출토된 총 539점의 철화분청자 가운데, 단 1점을 제외한 538점의 출토품이 귀얄 기법을 활용한 백토 분장 양상, 분장 면 위에 붓을 이용하여 문양을 장식한 시문 기법, 시문된 문양의 조형적 특징 등을 근거로 공주 학봉리 가마 생산품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9. 이를 바탕으로 본 장에서는 철화분청자의 소비 양상을 지역별, 성격별로 분석하여 그 성격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1. 철화분청자 소비 양상의 지역적 특징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소비 유적은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철화분청자의 소비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비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의 수량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철화분청자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소비된 것으로 파악된다. 총 539점의 소비 유적 출토 철화분청자 중 365점에 달하는 수량이 충청도에서 확인되었으며, 이는 전체 출토량의 2/3가 넘는 68%의 비율에 해당한다(Table 1

Table 1 <소비 유적 출토 철화분청자의 출토 지역별 수량> Quantities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from Consumption Sites by Excavation Region

지역 (Region) 수량 (Number of Pieces) 비율 (Ratio)
충청도 (Ch'ungch'ŏng-do) 365 68%
한양 도성 (Hanyang tosŏng) 58 11%
전라도 (Chŏlla-do) 48 9%
경기도 (Kyŏnggi-do) 47 9%
경상도 (Kyŏngsang-do) 8 1%
강원도 (Kangwŏn-do) 8 1%
제주도 (Cheju-do) 5 1%
합계 (Total) 539 100%
).

450점의 소비 유적 출토품에 2024년 04월부터 2025년 08월까지 발간된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추가로 확인한 89점의 철화분청자가 포함된 수량이다. 김수빈, 앞의 논문, pp. 141-160 참고. 한편, 공주 학봉리 가마 외의 생산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는 1점의 철화분청자는 강진 전라병영성에서 출토된 <분청자선각철화초문동체부편>으로 그 생산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전체적인 문양의 시문 방식을 살펴보았을 때 인근의 나주 만봉리 가마나 무안 우적동 가마에서 제작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국립광주박물관, 『全南地方 陶窯址 調査報告』 (1986); (재)한울문화재연구원, 『康津 全羅兵營城 內部 北側地域 遺蹟』 (2013); (재)해동문화재연구원, 『나주 만봉리 유적』 (2014); 김수빈, 앞의 논문, pp. 45-46 참고.

철화분청자 출토품의 조형적 분류를 통해서도 철화분청자의 주된 소비지역이 충청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도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다양한 문양과 기종으로 제작된 철화분청자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Table 2

Table 2 소비 유적 출토 철화분청자의 기종별 지역 분포 Regional Distributio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from the Excavation Site by Type

소비 유적 출토 철화분청자의 기종별 지역 분포 Regional Distributio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from the Excavation Site by Type
Table 3

Table 3 소비 유적 출토 철화분청자의 문양별 지역 분포 Regional Distributio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from the Excavation Site by Design

소비 유적 출토 철화분청자의 문양별 지역 분포 Regional Distributio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from the Excavation Site by Design
을 보면, 소비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의 기종으로는 병, 호, 장군, 발, 잔, 접시, 주구호, 편병, 고족배, 대발, 소형주자, 주구발, 뚜껑, 제기가 있으며, 문양으로는 당초문, 삼엽문, 여의두문, 어문, 초문, 연판문, 엽문, 파초문, 모란문, 모란엽문, 연화문, 용문 등이 있고, 충청도에서 가장 다양한 양상이 확인됨을 알 수 있다.10

특히, 기종에 따른 지역별 출토 양상을 통해, 충청도 외의 지역에서는 철화분청자가 어떠한 내용물을 담은 용기로 소량 유입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충청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병, 호, 장군과 같이 내용물을 담아 저장 및 운반의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기종을 중심으로 출토된 양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충청도 외의 지역 중 58점(11%)의 철화분청자가 출토되어 두 번째로 높은 출토량을 보이는 한양도성에서는 병, 장군, 호, 주구호, 편병의 철화분청자만이 파악되어 주목되는데, 발, 잔, 접시와 같은 소형식기류로 제작된 철화분청자의 출토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비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 중 소형식기류로 분류할 수 있는 17점의 출토품 중 14점이 충청도 내에서 출토되었다. 충청도 내에서도 대개 주요 생산지인 공주 학봉리 가마 인근의 지역에서 확인되어, 대표적인 일상 기명(器皿)이라 할 수 있는 발, 잔, 접시와 같은 소형식기류로 제작된 철화분청자의 경우 생산지 인근을 중심으로 소비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충청도 내 소형식기류가 출토된 지역으로는 세종, 대전, 청주, 공주, 예산, 홍성이 있으며, 세종에서 4점으로 가장 많은 수량이 확인되었다.

한편, 철화분청자는 생산지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 혹은 행정 · 군사 · 교통의 거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소비된 것으로 파악된다.11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소비 유적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전반적으로 국한된 소비 양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Fig. 1

<철화분청자 소비 유적의 지역별 분포> Regional Distribution of Consumption Sites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Map drawn by the author)
Fig. 1 <철화분청자 소비 유적의 지역별 분포> Regional Distribution of Consumption Sites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Map drawn by the author)
).

먼저, 철화분청자의 주요 생산 및 소비 지역인 충청도의 경우, 생산지 인근이자 행정적 중심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집중적인 출토 양상을 보인다. (Fig. 2

<충청도 내 철화분청자의 지역별 출토 양상> Excavation Patter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by Region in Ch'ungch'ŏng-do (Map drawn by the author)
Fig. 2 <충청도 내 철화분청자의 지역별 출토 양상> Excavation Patter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by Region in Ch'ungch'ŏng-do (Map drawn by the author)
)를 보면, 공주, 세종, 대전 등 공주 학봉리 가마의 인근에 위치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수량의 철화분청자가 확인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해당 지역들은 조선 전기의 행정 구역상 공주목(公州牧)에 해당하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공주목은 충청도에 위치한 네 곳의 목 중 첫 번째로 높은 인구와 토지량을 보여 가장 중추적인 행정구역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Table 4

Table 4 <조선 전기 충청도의 목별 인구 및 토지량> Population and Land Area by Mok in Ch'ungchŏng-do in the Early Chosŏn Dynasty

Region No. of Households Population Land Area (結, kyŏl)
Kongju-mok 2,167 10,049 18,526
Hongju-mok 1,379 6,031 11,386
Ch'ungju-mok 1,871 7,452 19,893
Ch'ŏngju-mok 1,589 6,738 18,193
).

그 밖에도 충청도의 서산, 당진, 아산, 충주, 청주 등에서 비교적 많은 수량의 철화분청자가 출토되었는데, 서산은 서해안의 군사거점이었던 해미읍성(海美邑城)이 자리한 곳이다.12 또한, 당진과 아산에는 공세곶(貢稅串)과 범근천(犯斤川)의 조창(漕倉)이 있었으며, 충주와 청주는 충청도의 네 목을 대표했던 지역으로, 충주에는 경원창(慶源倉)이 위치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충청도 다음으로 많은 수량의 출토품이 확인된 지역은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에서 철화분청자의 출토량이 많은 이유는 충청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왕도(王都)이자 주요 관청들과 시전이 밀집한 지역으로 전국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결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양도성 내에서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소비 유적은 지금의 종로구 중심에 해당하는 중부 지역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Fig. 3

<한양도성 내 철화분청자의 출토 양상> Excavation Patter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in Hanyang tosŏng (Map drawn by the author based on a map of Kukt'o chiri chŏngbowŏn, https://map.ngii.go.kr/mn/main Page.do)
Fig. 3 <한양도성 내 철화분청자의 출토 양상> Excavation Pattern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in Hanyang tosŏng (Map drawn by the author based on a map of Kukt'o chiri chŏngbowŏn, https://map.ngii.go.kr/mn/main Page.do)
). 한양도성의 중부 지역은 도성의 중앙에 자리하여 여러 왕궁과 관청, 시전 행랑과 그 배후가 위치했던 일대로 도성의 핵심적인 기능을 하였던 지역으로 이해된다.13

충청도 외의 지방에서도 충청도와 인접하거나 거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철화분청자의 소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에서는 충청도와 경계가 맞닿아있거나 한양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철화분청자가 출토되었다.14 강원도에서는 충청도와 가까운 원주와 횡성에서 철화분청자가 확인되었으며, 원주는 강원감영(江原監營)과 흥원창(興元倉)이 위치했던 곳이다. 전라도에서는 충청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군산, 익산, 전주에서 철화분청자가 확인되었는데, 조선 전기의 익산은 덕성창(德成倉)이, 전주는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자리하였다. 이외에도 영산창(榮山倉)이 자리했던 나주와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이 위치한 강진에서도 철화분청자의 출토가 확인된다. 고창의 경우에는 서해안 일대에 위치하여 조운(漕運) 경로를 통해 철화분청자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도에서는 상주, 대구, 영천, 부산에서 철화분청자가 확인되었다. 대구와 부산은 대구진(大丘鎭)과 부산진(釜山鎭)이 설립되어 군사적으로 주요한 지역이었다. 제주도에서는 관아지와 법화사지에서 철화분청자가 출토되어 관청과 사찰을 중심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5

2. 철화분청자 출토 소비 유적의 성격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소비 유적은 그 성격에 따라 민간 유적, 사찰 유적, 관청 유적, 분묘 유적, 제사 유적, 궁궐 유적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철화분청자가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된 그릇임을 알 수 있다(Table 5

Table 5

성격 민간 유적 (Private Sector) 사찰 유적 (Buddhist Temple) 관청 유적 (Government Office) 분묘 유적 (Tomb) 제사 유적 (Ritual Site) 궁궐 유적 (Palace) 미상 (Unknown)
수량(비율) 294(55%) 107(20%) 63(12%) 45(8%) 4(1%) 2(0%) 24(4%)
). 다만, 개별 소비 유적의 성격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나, 주거지, 건물지, 배수로, 수혈 유구, 경작 유구 등 민간의 생활이 이루어졌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민간 유적에서 출토된 사례가 가장 많아, 철화분청자는 민간을 중심으로 소비된 것으로 판단된다. 민간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는 294점으로 전체 출토량의 55%를 차지하며, 출토품의 절반이 넘는 수량에 해당한다.

반면, 왕실과 관청 등에서는 철화분청자가 적극적으로 소용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소비 유적 중 왕실과 관련된 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유적으로는 경복궁과 종묘 관련 유적이 있으며, 해당 유적에서는 단 4점의 철화분청자만이 확인되었다.16 유적 내 세부적인 출토 위치를 살펴보아도 왕실 구성원의 주요 생활공간과는 거리가 먼 담장이나 전교 유구에서 출토되어 왕실의 직접적인 소용으로 연결짓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관청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는 63점으로 출토품의 12%에 해당하는데, 민간 유적에서 확인된 철화분청자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량이다. 이를 통해, 철화분청자가 왕실 및 정부와 연관된 공적인 영역보다 사적인 범주에 속하는 민간 영역에서 활발하게 소비된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다만, 철화분청자는 민간 영역에서 활발하게 소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일반 백성 모두가 두루 사용할 수 있던 그릇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별 소비 유적 및 유구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민간 유적에서의 출토량이 가장 높아 세부적인 소비 계층을 명확하게 구분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하나,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철화분청자는 거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한적인 소비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박물관에 소장된 일부 철화분청자 묘지와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분묘 유적을 살펴보았을 때, 철화분청자가 상대적으로 신분이 높은 계층을 중심으로 소비되었을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에 소장된 철화분청자 묘지로는 천안박물관에 기탁된 <분청자철화한명회묘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두 벌의 <분청자철화 ‘南乙忠’ 묘지>가 있으며, 묘지의 내용을 통해 각각 영의정(領議政)까지 임관한 한명회(韓明澮, 1415~1487)와 승의부위(承義副尉), 사정(四正), 정(正)의 무관직을 등용한 이가 묘지의 주인임을 알 수 있다(Figs. 4

Fig. 4.
, 5
Fig. 5.
).17

묘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수습되어 묘주를 파악할 수 있는 분묘에서 출토된 철화분청자로는 김자성(金子省, 1435~1490) 묘에서 출토된 <분청자철화당초문병편>과 진주 유씨 묘에서 출토된 <분청자철화당초문병편>이 있다(Figs. 6

Fig. 6.
, 7
Fig. 7.
). 김자성은 면천군수(沔川郡守)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좌승지(左承旨)를 증직 받은 인물로 밝혀졌으며, 진주 유씨는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과 호군(護軍)을 역임하고 좌리(佐理)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박견원(朴堅源, 1435~1501)의 부인이다.18

이외에 묘주의 신분이 불분명한 분묘 유적에서는 43점의 철화분청자가 확인되었다. 이 중 7점(16%)만이 단독으로 출토되었고, 나머지 36점(84%)의 철화분청자는 자기 및 금속 등의 공반 유물과 함께 부장되었다.19 이처럼 분묘 유적에서는 공반 유물이 함께 부장되어 상대적으로 후장(厚葬)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는 출토 양상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는 철화분청자의 사용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Ⅲ. 철화분청자의 지역성과 형성 요인

소비 유적을 통해 철화분청자의 출토 양상과 그 특징을 살펴본 결과, 철화분청자가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생산 및 소비가 이루어진 그릇이며 민간을 중심으로 소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충청도를 중심으로 소비된 철화분청자의 지역성은 철화분청자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청화백자(靑畵白瓷), 상감백자(象嵌白瓷), 선각·박지분청자(線刻·剝地粉靑瓷) 등 동시기 제작된 문양이 장식된 자기의 경우에는 대체로 한양도성 중심의 소비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20. 본 장에서는 시대적·지역적 배경을 통해 철화분청자의 지역성이 형성된 요인에 대해 추론해보고자 한다.

1. 시대적 배경

조선 전기의 자기 생산은 현재의 민영수공업(民營手工業) 체제와 달리 생산자의 의지보다는 사용자의 취향 및 수요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이루어졌다. 앞서 다루었듯이 철화분청자는 민간 중심의 소비 양상을 보이기에, 철화분청자의 생산은 민간의 수요에 대응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황은 철화분청자의 문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철화분청자 소장품 및 출토품의 문양을 분류한 Table 6

Table 6 <철화분청자 출토품과 소장품의 문양 분류> Excavated Articles and Collections of Punch'ŏng Ware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Classified by Pattern

Pattern Excavated relics Collection
Scroll Design185263
Three-leaf Design3086
Yŏŭidu Design2541
Fish Design1138
Grass Design1515
Lotus-petal Pattern73
Leaf Design1322
Banana-leaf Pattern812
Peony Design740
Lotus Design57
Dragon Design11
Other Grass Design329
etc.924
Inscription48
Bird Design06
Geometric Design02
을 보면, 당초문과 삼엽문, 여의두문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21. 도안화된 식물문 위주의 시문 양상은 문양이 가진 함의보다는 문양이 장식된 상태가 중요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철화분청자의 제작 목적이 관변적(官邊的) 소용에 있었다면, 왕실을 비롯한 정부의 취향과 의지가 반영되어 이를 나타낼 수 있는 함의가 뚜렷한 문양 위주의 시문 양상이 확인되었을 것이다22.

이를 고려해보면, 철화분청자의 지역성은 그 생산이 충청도 내에서 발생한 민간의 수요에 대응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성격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관요의 성립으로 지방 가마의 자기 생산 체제가 변화함에 따라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철화분청자는 편년유물을 통해 관요가 성립된 이후인 15세기 4/4분기를 전후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23. 철화분청자의 개시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편년유물로는 공주 학봉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자철화‘成化二十三年’명묘지편>과 서울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서 출토된 <분청자철화문장군편>이 있다. <분청자철화‘成化二十三年’명묘지편>은 중국연호를 통해 1487년을 전후로(Fig. 8

<분청자철화‘成化二十三年’명묘지편> Shard of Punch'ŏng Ware Tablet with Inscription ‘Twenty-three years of Sŏnghwa 成化二十三年’ Written in Underglaze Iron-brown, After 1487,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273)
Fig. 8. <분청자철화‘成化二十三年’명묘지편> Shard of Punch'ŏng Ware Tablet with Inscription ‘Twenty-three years of Sŏnghwa 成化二十三年’ Written in Underglaze Iron-brown, After 1487,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273)
), <분청자철화문장군편>은 표기된 ‘戊戌’명 묵서를 통해 1478년을 전후로 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편년유물을 통해 1478년 이전부터 철화분청자의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파악할 수 있다(Fig. 9
<분청자철화문장군편> Shard of Punch'ŏng Ware Changgun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Before 1478, Chosŏn, Excavated from Ch'ŏngjin-dong, Chongno-gu, Sŏul, Hanul munhwajae yŏn'guwŏn (Hanul munhwajae yŏn'guwŏn, Chongno ch'ŏngjin 1 chigu yujŏk, p. 273)
Fig. 9. <분청자철화문장군편> Shard of Punch'ŏng Ware Changgun Painted with Underglaze Iron-brown, Before 1478, Chosŏn, Excavated from Ch'ŏngjin-dong, Chongno-gu, Sŏul, Hanul munhwajae yŏn'guwŏn (Hanul munhwajae yŏn'guwŏn, Chongno ch'ŏngjin 1 chigu yujŏk, p. 273)
)24.

15세기 조선 왕실이 국가의 위엄을 세우고, 유교적 위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 문양이 장식된 자기를 활용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여러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25. 세조 2년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협력한 이사철(李思哲, 1411~1468)이 오랜 병으로 누워있다가 차도가 생기자 청화아대종(靑畫兒大鍾)을 내려준 기록이 확인되며, 성종 20년에는 성균관에 두 개의 화준(畫罇)을 내려 설치하여 장식하게 하였다26. 이와 같은 선물 및 사여(賜與)의 행위로 사대부를 비롯한 민간 영역에서도 문양이 장식된 자기에 대한 인식과 사용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왕실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생산 및 소비가 이루어졌다27. 또한, 세종 30년(1448년) 중국산 청화백자에 대한 무역이 금지되고 성종 20년(1477년)까지 그 사용이 제한되면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던 문양이 장식된 자기의 공급 또한 감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28. 지속적인 제재에도 중국산 청화백자의 사용에 대한 폐단이 계속 언급되는 점을 통해, 민간 영역에서의 문양이 장식된 자기에 대한 수요는 지속되는 것으로 파악된다29. 15세기 조선에서 고려 말부터 이어진 상감청자와 선각·박지분청자, 상감백자 등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자기의 생산이 지속되는 것은 문양이 장식된 자기에 대한 계속된 수요에 대응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철화분청자 또한 이러한 수요에 따라 제작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관요의 성립 이전 지방의 가마들은 공납 및 진상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공납용 자기는 태종 17년에 이루어진 호조의 계문에 따라 일정한 견양을 두고 정형화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30. 철화분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공주 학봉리 가마 역시 관사명 인화상감청자의 생산이 확인되어 관요의 성립 이전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31. 공주 학봉리 가마는 고려말 상감청자의 여운이 남아있는 흑백상감의 <청자상감당초문저부편>이 출토되었다는 보고를 통해 15세기 2/4분기 이전부터 운영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지역적 명칭의 유사성 및 지리적 위치를 통해 『世宗實錄』 「地理志」에 기록된 공주목에 위치한 두 곳의 중품(中品) 자기소 중 공주목 동쪽 동학동에 위치한 자기소가 공주 학봉리 가마인 것으로 추정된다32.

1467년 관요의 성립 이후 조선 왕실 및 정부에서 소용되는 그릇의 생산이 점차 관요로 일원화되면서, 지방의 가마에서는 지방 관청 및 민간의 수요에 대응한 그릇을 중심적으로 제작하게 되었다33. 관요의 성립으로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공주 학봉리 가마 또한 지방 관청 및 민간 소용 중심의 자기 생산 체제로 변화하였을 것으로 이해되며, 이로 인해 민간 내에서 발생한 수요가 반영되어 문양이 장식된 자기, 즉 철화분청자가 생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는 관사명 인화상감청자와 박지 및 선각기법으로 문양이 장식된 자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철화기법이 보조적으로 활용된 양상이 확인되어 철화분청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이전부터 철화기법에 대해 인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Figs. 10

<청자인화상감철화‘內資寺’명저부편> Stamped and Inlaid Celadon with Inscription ‘Naejasi 內資寺’ Written in Underglaze Iron-brow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273)
Fig. 10. <청자인화상감철화‘內資寺’명저부편> Stamped and Inlaid Celadon with Inscription ‘Naejasi 內資寺’ Written in Underglaze Iron-brow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273)
11
<청자인화상감철화어문저부편> Stamped and Inlaid Celadon with Fish Design Painted in Underglaze Iron-brow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151)
Fig. 11. <청자인화상감철화어문저부편> Stamped and Inlaid Celadon with Fish Design Painted in Underglaze Iron-brow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151)
, 12
<분청자박지철채모란문동체부편> Shard of Punch'ŏng Ware with Peony Design in Sgraffito and Iron-painted Decoratio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122)
Fig. 12. <분청자박지철채모란문동체부편> Shard of Punch'ŏng Ware with Peony Design in Sgraffito and Iron-painted Decoratio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122)
, 13
<분청자선각철화연어문장군편> Shard of Punch'ŏng Ware Changgun with Lotus and Fish Designs Incised and Painted in Underglaze Iron-Brow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175)
Fig. 13. <분청자선각철화연어문장군편> Shard of Punch'ŏng Ware Changgun with Lotus and Fish Designs Incised and Painted in Underglaze Iron-Brown, 15th Century, Chosŏn, Excavated from the Kiln Site in Hakpong-ri of Kongju,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Kyeryongsan tojagi, p. 175)
)34. 철화기법은 흑백의 대비를 통해 문양의 가시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관요의 성립으로 정형화된 공납 자기를 생산해야 하는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지방의 가마들은 문양이 장식된 자기 제작 과정에서 다양한 시문 기법의 활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공주 학봉리 가마는 문양이 장식된 자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기존에 효용적이라 인식하던 철화기법의 활용을 확대하여 철화분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 보조적으로 활용되던 철화기법을 백토 분장면 위에 바로 문양을 그리는 방식으로 확대한 것은 별도의 시문 기법에 철화기법을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문양의 가시성을 높이고 제작 과정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 지역적 배경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문양이 장식된 자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철화기법을 활용한 양상은 공주 학봉리 가마뿐만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의 일부 가마에서도 확인된다. 경상도의 고령 사부리 가마를 비롯한 전라도의 광주 충효동 가마와 고창 용계리 가마, 나주 만봉리 가마 등에서는 선각 · 박지기법으로 주문양을 시문한 뒤 시문된 문양이나 배경을 철채(鐵彩)한 자기가 제작된 양상이 확인되고, 전라도의 고흥 운대리 가마와 보성 도촌리 가마, 광양 황방 가마에서는 붓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백토 분장면 위에 철화안료로 문양을 그려 장식하거나 명문을 표기한 철화분청자의 생산이 파악된다35. 그러나 이러한 지역들에서는 철화기법의 활용이 공주 학봉리 가마와 같이 붓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철화안료로 문양을 그려 장식하는 방식으로 이어지지 못하였으며, 붓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철화안료로 문양을 그려 장식된 자기가 제작되더라도 극히 적은 수량을 산발적으로 생산하는 데 그쳤다36.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만 철화기법의 활용이 붓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려 장식한 시문 기법으로 확대되고 철화분청자의 생산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충청도의 지리적 · 행정적 특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는 조선의 물질문화가 핵심적으로 향유되었던 한양도성과 그 배후지(背後地)로 기능하였던 경기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이로 인해, 조선 초기 이루어진 행정구역의 개편에서 경기도와의 편입이 잦았다37. 또한, 한양도성 및 경기도에 거주하기 어려웠던 조선 전기 중앙의 관료 사대부가 터를 정착하기 적합한 지역이었다38.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충청도는 조창과 조운의 중심지로 수도권과 지방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조선 전기 충청도에 범근천, 공세곶, 경원창 등 여러 조창이 위치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충주에 위치한 경원창은 태종 3년(1403년)부터 경상도 지역의 조세와 공물이 집결되어 한양도성으로 운반되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에 따른 인적 및 물적 이동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물질문화가 충청도로 공유되는 것은 다른 하삼도(下三道)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며, 충청도로 공유되었던 수도권의 물질문화에는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자기와 이를 소비하는 문화가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충청도에서는 한양도성 혹은 생산지 인근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선각 · 박지분청자와 상감백자뿐만 아니라, 대체로 한양도성 내에서 소비되던 조선산 청화백자와 경덕진의 민요산 청화백자 또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39. 여러 문양이 장식된 자기의 유입을 통해 충청도의 민간에서도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자기에 대한 인식과 수요가 발생 및 확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청화백자의 유입으로 백색의 바탕 위에 안료로 문양을 그려 장식한 자기에 대한 인식과 수요가 여타 지방에 비해 활발하게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자기에 대한 수요의 확대로 충청도의 사기장들 또한 백색의 바탕 위에 안료로 문양을 그려 장식하는 방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시문 기법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여러 기사를 살펴보면, 15세기 충청도의 가마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자기 제작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우수한 자기 제작 기술은 사기장들이 문양이 장식된 자기에 대한 수요에 따라 인식하게 된 시문 기법을 실제로 구현해낼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세종 5년(1423년)에는 충청도 감사에게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 1329~1462)의 처소에 상시로 사용하는 사기(沙器)를 보내도록 한 기사가 확인되며, 세종 6년(1424년)에는 평안도로 충청도의 사기장을 보내 중국 사신이 방문할 때 지응(支應)할 그릇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40. 이듬해인 세종 7년(1425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양녕대군의 처소가 위치하고 평안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경기도 광주에서는 이미 명나라에 진봉(進封)할 정도로 높은 품질의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41.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충청도를 특정하여 사기장과 사기를 요청한 것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명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충청도의 사기장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된 자기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이 글의 목적은 조선 전기 제작된 철화분청자의 구체적인 소비 양상을 파악하여 철화분청자의 성격을 유기적으로 고찰하는 것에 있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통해 철화분청자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생산 및 소비가 이루어진 지역성을 가진 그릇으로 판단된다. 또한, 철화분청자가 출토된 각 소비 유적의 성격을 세부적으로 나누어보면, 철화분청자는 궁궐, 관청, 사찰 등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체적인 발굴성과를 살펴보았을 때 왕실과 관청 등에서 적극적으로 소용되었던 그릇은 아닌 것으로 이해되며, 민수품(民需品)의 성격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 백성 모두가 포괄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그릇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사대부와 같이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을 지니거나 경제적 여유를 지닌 한정된 계층을 중심으로 소비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소비 양상을 통해 파악한 철화분청자의 여러 특성 중 주요 생산지가 위치한 충청도를 중심으로 소비된 지역성은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여타 동시기 제작된 문양이 장식된 자기의 경우에는 대개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소비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철화분청자의 지역성이 나타나게 된 요인으로는 시대적 배경과 지역적 배경이 있다. 먼저, 시대적 배경으로는 관요의 성립이 있다. 1467년 관요의 성립 이후, 조선 왕실과 조정에서 소용되는 그릇의 생산이 관요로 일원화되면서 지방의 가마들은 정형화된 공납 자기를 생산하는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이에 따라 지방의 가마들은 지방 관청 및 민간 소용 중심의 자기를 생산하는 체제로 변화하였으며, 자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기존에 인식하던 여러 시문 기법들의 활용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적 배경으로는 충청도가 조선의 물질문화가 핵심적으로 향유되었던 수도권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여러 조창이 위치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른 인적 및 물적 이동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물질문화 또한 충청도로 공유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청화백자를 비롯한 여러 문양이 장식된 자기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결과, 다양한 시문 기법으로 문양이 장식된 자기 특히, 청화백자와 같이 문양을 그려 장식한 자기 및 시문 기법에 대해 인식과 수요가 충청도 내에서도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연구를 통해 다채로운 시문 기법으로 문양이 장식된 자기가 제작되던 조선 전기 자기 생산 상황 속에서의 철화분청자의 위상(位相)을 초보적으로나마 규명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추후 철화분청자의 소비 양상과 더불어 조형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조선 전기 자기 생산 체계 속에서 철화분청자의 위상을 보다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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