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ructing Political Authority in Court Banquet Paintings: Musin Chinch’ando (1848) in the Reign of King Hŏnjŏng
*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 (Associate Professor, Department of Art History, Hongik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1065/kjah.330.202606.003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Musin Chinch’ando (戊申進饌圖, a screen depicting the banquet of the Musin year, 1848), commissioned by King Hŏnjong (憲宗, r. 1834-1849) to commemorate the sixtieth birthday of Grand Queen Dowager Sunwŏn (純元王后, 1789-1857), and argues that court banquet paintings functioned not merely as documentary records but as visual devices that constructed political meaning. The Musin chinch’an (進饌, court banquet) was a composite ritual that combined the birthday banquet of Grand Queen Dowager Sunwŏn with the conferral of honorific titles upon Sunjo (純祖, r. 1800-1834) and Ikchong (翼宗, 1809-1830), the preceding kings. This configuration reflected Hŏnjong’s political intention to consolidate authority after the end of the queen dowager’s regency, while simultaneously asserting both the legitimacy of the dynastic succession and the autonomy of his kingship.
The Directorate for the Banquet (chinch’anso) was composed of established meritorious officials (sesin) from the reigns of Sunjo and Ikchong, members of the queen dowager’s affinal kin group (ŏch’ŏk), as well as newly appointed officials selected by Hŏnjong. The emphasis on their affiliations with the Ch’ongwiyŏng (總衛營, royal guard command) and the Kyujanggak (奎章閣, Royal Library) symbolically represented the close attendant faction that Hŏnjong sought to cultivate.
Musin chinch’ando expands the scope of ritual representation by incorporating scenes of chinha (陳賀, congratulatory rite), chinch’an (進饌, court banquet), and hoejak (會酌, court audience). Through this expanded pictorial program, the painting presents Hŏnjong in a staged and sequential manner—as the legitimate heir to the royal lineage, as the successor to the queen dowager, and as the sovereign of his officials. Furthermore, its three-tiered composition and converging perspective toward the upper register articulate both a hierarchical spatial order and a heightened sense of realism. Ultimately, this work may be understood as a court banquet painting that symbolically structures political relationships reorganized around Hŏnjong within a systematic ritual framework and a unified visual form.
Ⅰ. 머리말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은 1848년(무신)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육순(六旬)과 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의 망오(望五)를 기념하는 연향을 직접 준비하였다. 이 행사는 헌종이 주도한 첫 연향이며, 내·외빈을 모두 초대한 유일한 연향이었다. 순조와 헌종대의 연향은 대비를 위한 잔치라는 점에서 세도정치기 외척을 위한 궁중문화의 한 양상으로 인식되어 왔다.1 그러나 무신년 진찬은 헌종이 수렴청정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친정에 돌입한 시점에 마련되었다. 특히 연향의 주빈은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였지만 행사의 주체는 헌종 자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무신년 진찬의 정치적 성격은 행사를 추진한 세력에서도 확인된다. 진찬소(進饌所) 당상(堂上)에는 수구 외척 세력뿐 아니라 헌종이 신임하던 근신(近臣) 세력도 함께 배치되었다. 이들은 《무신진찬도(戊申進饌圖)》 병풍의 좌목에서 모두 전직 규장각(奎章閣) 각신으로 호명되었다. 또한 진찬소의 총책임자였던 서희순(徐憙淳)은 총위영(總衛營) 총위대장이었으며, 진찬소 역시 총위영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추진 체계는 당시 헌종이 국왕의 친위 세력으로 규장각과 총위영을 부활시키고자 한 정치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점은 그림의 제작과 분배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헌종은 연향을 마친 뒤 행사 장면을 75건의 병풍과 27건의 족자로 제작하여 왕실 가족과 행사에 참여한 제신들에게 하사하였다.2 총 102건에 이르는 이 수량은 역대 연향도 제작 사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당시 연향 공간은 남성과 여성 참연자를 구분하기 위해 주렴(朱簾)과 휘장(揮帳)으로 나뉘어 있었고, 남성 관객은 물론 주렴 안의 여성 관객에게도 관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향이 끝난 뒤 하사된 《무신진찬도》는 참연자들이 당시의 연향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는 사실상 유일한 시각적 경험이었다.
궁중행사도에 대한 선행 연구에서 《무신진찬도》는 ‘19세기 연향도의 전형’을 완성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으며,3 19세기 연향도는 ‘대형화, 규격화, 고착화되는 말기적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되기도 하였다.4 기존 연구가 주로 양식과 형식의 변화에 주목하였다면, 이 연구에서는 그 변화의 동인과 정치적 의미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5 이를 위해 먼저 무신년 진찬이 설행된 정치적 배경과 헌종의 의례 기획을 살펴보고, 이어 행사의 추진 세력과 규장각·총위영과의 관계를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신진찬도》에서 선택한 의례 장면과 형식이 가지는 의미와 효과를 분석하고자 한다.
Ⅱ. 헌종의 국정 승계와 무신년 진찬(1848)의 의미
헌종은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있었으며, 15세가 되던 1841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이후 19세가 된 1845년부터는 국정 운영을 본격적으로 주도하였는데, 이 시기 그의 주요 정치적 과제는 왕실 현창 사업의 추진과 왕권 강화책의 시행이라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왕실 현창 사업은 순조와 익종에 대한 추숭 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6 헌종은 1846년 익종(翼宗, 효명세자, 1809-1830)의 수릉(綏陵) 천릉을 명하고,7 선원전(璿源殿)에 순조(純祖, 1790-1834)와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전실을 증수하였으며,8 이듬해에는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편찬하도록 하였다.9 이는 선왕인 순조와 생부인 익종을 함께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통과 혈통의 정통성을 보완하는 한편, 이들을 정조(正祖, 1752-1800)와 연결하여 ‘삼조’의 계승성을 강조하려는 조치였다.
한편 헌종은 측근 관료 중심의 왕권 강화책을 내놓았는데, 이는 정조의 정치적 전범을 계승한 것이었다. 1846년에는 장용영을 본떠 총위영을 설립하고, 1847년에는 규장각 초계문신 제도를 부활시켰다.10 총위영과 규장각 각신들은 무신년 행사를 준비한 진찬소에 배속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도록 하겠다. 이처럼 왕실 현창 사업과 왕권 강화책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행해진 1848년의 무신진찬은 단순한 생신 잔치가 아니라 왕실 내빈과 외빈, 제신을 모두 초대하여 헌종의 국정 주도권을 확인하는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11
무신진찬은 의례의 형식에서 계병의 제작까지 전반적인 선례를 정조와 익종에 두었다. 진찬연에 외연의 성격을 추가하고 경축일에 존호를 가상한 것은 정조의 선례를 따른 것이며, 본 진찬 외에 야진찬(夜進饌)과 익일회작(翌日會酌)을 추가한 의례 형식은 익종의 창안이었다.12 또한 의궤의 제작은 정조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모범으로 삼았고, 계병은 익종의 《기축진찬도》의 예에 의거하였다.13 이는 헌종이 명목뿐 아니라 실행에 있어서도 정조와 익종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무신진찬은 사실상 두 가지 행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표면적인 동기인 순원왕후의 육순 기념 진찬연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축을 기념하여 순조와 익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추상존호례(追上尊號禮)이다. 헌종은 1847년 11월 15일, 순원왕후의 육순 기념행사 준비를 언급하면서 대왕대비와 대비뿐 아니라 순조와 익종에게도 존호를 올리겠다고 하였다.14 대비의 생신을 기념하여 선왕에게 존호를 추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상 2년간 이어진 순조와 익종 추숭사업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15
순원왕후의 육순과 순조·익종의 추상존호례는 헌종이 계승해야 하는 두 개의 유산을 상징한다. 하나는 당시 정국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순원왕후 수렴청정기의 정치적 기반이고, 다른 하나는 왕통의 계승을 통해 확보된 왕실의 정통성이다.16 헌종은 무신진찬을 통해 전임 집권자와의 유대를 확보하는 한편, 독립된 왕권을 천명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Ⅲ. 무신진찬의 추진 세력과 헌종 친위 기반의 재편
헌종은 무신진찬을 진행하는 관료로 국왕의 근신을 배치시켰다. 이 장에서는 진찬소 당상과 낭청 등에 배속된 자들의 특징을 분석하고, 그들이 당시 헌종이 육성하고자 하였던 친위세력인 규장각, 총위영 등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살피고자 한다.
헌종은 한 해 전 직접 진찬소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였다.18 진찬소 당상에는 서희순, 김흥근(金興根), 김정집(金鼎集), 조병준(趙秉駿), 윤정현(尹定鉉), 윤치수(尹致秀) 5명이, 낭청(郎廳)에는 윤치영(尹致英), 이규헌(李奎憲), 정헌용(鄭憲容), 홍종서(洪鍾序), 서승순(徐承淳), 김익정(金益鼎) 6명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크게 익종의 근신, 외척 가문 출신, 헌종이 친정 후에 등용한 인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진찬소의 최고 책임자였던 서희순은 대표적인 익종의 근신이었다. 그는 익종이 추진한 기축진찬(1829)을 준비했던 진찬소 당상 가운데 78세로 노령인 서준보(徐俊輔)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었다.19 헌종이 그를 무신진찬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명목뿐 아니라 실행에 있어서도 기축진찬을 최대한 계승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서희순은 순조 사후에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순조와 익종의 세신으로서 선왕 추숭 사업에 복무하였다.20
헌종은 친정 이후 서희순을 단순한 세신이 아니라 최측근으로 신뢰하였다. 이는 그를 진찬소 당상에 임명하기 몇 달 전, 총위영 총위대장으로 삼은 데서 확인된다.21 헌종은 1846년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승격시키고, 총위영의 첫 총위대장으로 서희순을 국왕 직권인 중비(中批)로 임명하였다.22 이는 헌종 초기에 무관 요직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및 관련 무관 가문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상황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인사였다.23 서희순이 총위대장에 임명된 사실은 진찬소가 총위영에 설치되었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24 서희순과 함께 김정집 역시 익종을 가까이 모셨던 측근이었다.25
두 번째 인물군으로 외척 가문 출신을 들 수 있다. 진찬소 당상으로 두 번째에 이름을 올린 김흥근은 안동김씨 출신으로 순원왕후와 6촌 지간이었으며,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실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843년 예조판서로 임명된 이후 헌종 연간 대부분의 궁중 의례에 관여하였고, 1848년에는 진찬소 당상과 상호도감 제조를 모두 맡았다.26 조병준 역시 외척 가문인 풍양조씨 출신으로 신정왕후와 5촌 지간이었다. 그는 1841년 헌종이 친정한 첫해에 급제한 뒤 익종의 천릉 사업에 참여하였고, 1848년에는 규장각 직제학이 되었다.27 무신년 진찬이 순원왕후의 회갑과 신정왕후의 망오를 기념한 것이었기에 외척이 진찬 당상에 포함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당시 요직에 진출한 외척의 비율을 고려하면, 그 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세 번째로 헌종이 친정한 후 직접 등용한 인물들이 있는데, 윤정현과 윤치수가 대표적이다. 윤정현은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규장각 각신 윤행임(尹行恁)의 아들이다. 그는 헌종이 친정한 1841년, 51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들어왔고, 이후 규장각 대교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중비로 병조판서가 되었다.28 윤행임의 복권과 윤정현의 등용이 곧 정조대 규장각의 부활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윤행임이 규장각 초계문신 출신의 대표적 각신이자 정조 사후 핍박당한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헌종의 이러한 처사는 정조대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제조 윤치수는 헌종 친정 시기 도승지로서 국왕 곁에서 긴밀하게 사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의 동생 윤치영 역시 진찬소 낭청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윤정현, 윤치수, 윤치영은 모두 비외척 가문 출신이며 헌종이 친정 후 새롭게 등용한 근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헌종이 장악주부(掌樂主簿)에 임명한 김재청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김재청은 한 해 전에 후궁으로 들어온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2-1907)의 부친이다. 장악원 주부는 종6품의 높지 않은 직책이나, 그에게 이 직책을 맡긴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1829년 기축진찬 때 익종은 장인 조만영(趙萬永)에게 장악원 제조를 맡겨 외척 안동김씨를 견제하고자 하였다.29 김재청은 조만영에 비하면 한미한 가문의 무명인에 불과하지만, 헌종이 경빈 김씨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그를 장악원 주부에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30 이처럼 무신진찬의 진찬소 당상들은 헌종이 계승하고자 한 순조·익종대의 세신, 당시 영향력을 가진 외척 실세, 그리고 헌종이 친정 후 새롭게 등용한 인물들이 균형 있게 포진해 있었다.31
흥미로운 점은 의궤와 병풍 좌목에 기록된 당상과 낭청의 직함 표기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32 예를 들어 진찬소의 총책임자였던 서희순은 의궤에는 정3품 무관직인 ‘행상호군(行上護軍)’으로 기록된 반면, 병풍에는 ‘숭록대부 행이조판서 원임규장각직제학(崇祿大夫 行吏曹判書 原任奎章閣直提學)’과 같이 종1품의 품계, 현재의 문관직, 과거의 규장각 각신 경력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보다 의궤가 진찬소에서 담당한 실무적 책임에 초점을 맞춘 데 기인한다. 헌종은 자신이 창설한 총위영의 신영(新營)에 진찬소를 설치하였고, 이조판서이자 총위대장이었던 서희순을 진찬소 총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즉 서희순에게 총위영을 동원하여 진찬소의 물력과 인력을 충당하게 한 것이다.33 다만 서희순이 의궤에 ‘행상호군’으로 기록된 것은 진찬소라는 임시 기구의 직제 규격에 맞추어 실무상 정3품 군직인 ‘상호군’을 차함(借銜)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한편 병풍의 좌목은 당상들의 규장각 각신 경력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서희순의 경우 이조판서라는 실직(實職)과 더불어 ‘원임 규장각 직제학’을 병기하여 과거의 각신 이력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검교 제학(檢校 提學)’으로 표기된 김흥근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원임’이나 ‘검교’ 등의 직함은 실직이 아니라 각신으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부가하는 칭호였다. 결론적으로 실무 기록인 의궤가 행정적 보직을 중심에 두었다면, 하사된 기념물인 병풍은 규장각 각신이라는 소속감과 명예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병풍에서 규장각 각신이라는 호칭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헌종은 정조의 규장각 초계문신(抄啟文臣) 제도를 부활시켜 젊은 인재들을 자신의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34 정조 사후 규장각은 실질적인 국왕 주도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고, 초계문신제가 폐지되면서 새로운 인원도 유입되지 않았다.35 헌종은 규장각 기능 회복의 열쇠가 폐쇄적인 인력구조를 타파할 초계문신제에 있다고 보았다.36 그는 1846년 초계문신 20인을 선발한 데 이어, 1848년에는 36명을 추가로 뽑아 2년 사이에 총 57명의 인재를 확보하였다.37 주목할 점은 이들 중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7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즉 헌종은 초계문신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당시 세도가인 외척 세력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규장각이 아직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전이었음에도, 헌종이 주관한 첫 행사의 담당자들에게 그 이름을 부여한 것은 규장각의 부활을 예고하는 조치였다. 이처럼 병풍에 규장각 각신의 직함을 명기한 것은, 이 행사가 규장각 중심의 국왕 측근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의미가 있었다.
Ⅳ. 무신년 육순 기념행사의 의례적 구조와 특징
1848년 순원왕후의 육순을 기념한 행사는 크게 상존호 의례와 연향, 즉 진찬으로 구분할 수 있다. 헌종은 한 해 전 육순 기념행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존호를 올리는 의례와 진찬을 함께 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 순서는 순조와 익종의 추상존호례를 먼저 행하고, 이어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의 가상존호례를 행한 뒤, 다음 날 진찬례로 진행하는 것이었다.38 그 결과 행사는 1848년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진행되었다(table 1).39
3월 15일에는 종묘에서 순조와 익종에게 존호를 올리고, 3월 16일에는 인정전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렸다.40 같은 날 오후에는 인정전에서 상존호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陳賀)를 받았다.41 진하례는 국가적 경사에 대해 신하들이 왕에게 경하를 올리는 의례로, 치사(致詞), 교지(敎旨), 전문(箋文)을 읽는 절차를 중심으로 한다.42 앞선 상존호례가 왕과 소수의 관원이 참여하였다면 진하례는 종친과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대규모 의례였다. 따라서 진하례는 상존호 의례의 후속 절차이자, 왕실 행사를 군신과 함께 나누는 중요한 마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헌종 연간의 진찬은 기축진찬의 의례적 형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빈이 순조에서 대비로 달라짐에 따라 외진찬 없이 내진찬만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헌종은 순조와 익종에게 바치는 상존호 의례와 군신 간 진하례를 추가함으로써 외진찬의 부재를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5일부터 16일까지의 의례가 상존호와 관련된 행사였다면, 17일과 19일에는 진찬 관련 행사가 이어졌다. 17일에는 통명전에서 내진찬(內進饌)을 올리고, 저녁에는 야진찬(夜進饌)을 올렸다. 하루를 쉰 뒤 19일에는 통명전에서 익일회작(翌日會酌)과 익일야연(翌日夜宴)이 행해졌다. 정일 진찬 외에 야진찬과 다음 날 회작으로 확장된 연향 형식은 1828년 효명세자가 창안한 방식이다.43 헌종은 여기에 더해 회작에도 야연을 추가하여 회작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내진찬’과 ‘야진찬’은 모두 순원왕후를 위한 진찬연이다. 내진찬이 본식 연회라면, 야진찬은 다른 참석자는 모두 퇴장하고, 헌종과 순원왕후만 참석하는 소연회로서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틀 뒤 실시한 익일회작과 익일야연은 헌종이 주빈이 되어 행사 준비에 힘쓴 명부와 진찬소 당랑을 만나는 연향이었다. 준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인 동시에 헌종과 그의 근신 세력의 선전을 기원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익일회작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헌종을 주빈으로 하고, 명부와 진찬소 당랑이 참여하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세자였던 익종이 동쪽에 자리하였던 것에 비해 헌종은 중앙에서 남면하였다는 것이다. 헌종대 새롭게 신설된 익일야연은 회작 뒤에 이어지는 야연으로서 명부가 퇴장하고 진찬소 당랑만이 참석하였다. 이는 헌종과 그의 근신 세력인 진찬소 당랑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보여주는 행사로 기획된 것이다. 이처럼 무신년 진찬은 순원왕후를 주빈으로 모신 두 번의 연회와 헌종을 주빈으로 모신 두 번의 회작으로 구성되었다. 순원왕후와 왕실 친척에 대한 의례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헌종과 진찬소 당랑의 회작으로 수렴되는 서사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구조는 익종에 의해 창안되었지만, 헌종은 무신진찬에서 두 가지 변화를 모색했다. 하나는 내진찬의 참석 범위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례 속에서 진찬소 당랑들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본래 ‘자내행례(自內行禮)’인 내진찬에는 왕실 친척 이외에 조신들의 참여가 제한되었다.44 그러나 헌종대에는 문안제신의 범위가 2품 이상 문무관과 시신(侍臣) 집단인 승정원, 규장각, 홍문관 관원까지 확대되어 103명에 이르렀고, 이들에게도 각 직급에 준하는 연회용 잔칫상이 하사되었다.45 이는 내진찬에 문안제신을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게 함으로써 연향의 영향력을 왕실 밖으로 확대하려는 조치였다.
무신진찬의 두 번째 특징은 진찬소 당상과 낭청의 참여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1829년 기축진찬에서는 진찬소 당랑이 외연과 내연, 회작에 참석하였으나 의식 진행을 위해 행사장에 있었을 뿐 시연(侍宴)하지는 않았다.46 그러나 무신진찬에서는 진찬소 당랑이 야연을 제외한 모든 의례에 참석하였고, 외빈의 전례에 따라 자리를 잡고 시연하였다.47 그들의 시연위(侍宴位)와 배위(拜位)는 정양문(正陽門) 안에 종친, 의빈, 척신의 자리 옆에 배치되었으며, 찬안(饌案) 역시 외빈에 준하였다.
진찬소 당랑의 위상은 익일회작과 익일야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기축년 익일회작에서는 명부만이 치사를 올리고 진찬소 당랑은 의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헌종 무신년 익일회작에서는 진찬소 당랑도 명부와 동일한 자격으로 치사를 올리고 시연하였다. 나아가 왕과 진찬소 당랑만이 참석하는 익일야연을 추가함으로써 둘 간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처럼 헌종대 무신진찬은 익종부터 비롯된 연향의 중층 구조를 계승하면서도, 문안제신의 참석 범위를 확대하고 진찬소 당랑의 참여도를 높였다. 이는 대비를 위한 진찬이 왕실 내연으로 한정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군신 간 국가 의례로 확장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Ⅴ. 《무신진찬도》의 의례 재현과 정치적 상징
《무신진찬도》는 의례의 선택과 재현에서 이전의 행사도에서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면모를 보인다(fig. 1). 우선 진찬 장면뿐 아니라 그 전후에 진하(陳賀)와 회작(會酌) 장면을 추가하였고, 상단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도법과 삼단 구도를 통해 위계성과 사실성을 동시에 구현하였다. 본 장에서는 《무신진찬도》에 선택된 의례 장면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의미와 형식에 내재된 상징적 효과를 분석하고자 한다.48

《무신진찬도》는 앞 장에서 살핀 행사 중 3월 16일의 진하례, 3월 17일의 내진찬과 야진찬, 3월 19일의 대전 회작 등 네 장면을 선택하였다. 첫 번째 장면인 진하례는 순조·정순왕후·효명세자·신정왕후의 상존호를 경축하는 의례이다(fig. 2). 이후의 내진찬, 야진찬, 익일회작이 진찬연에 속한 일련의 행사라면, 진하례는 앞선 상존호례의 후속 행사라고 볼 수 있다.49

진하례는 진찬연과는 별개의 의례이나 병풍 가장 앞에 배치되었다.50 이는 앞선 상존호 의례와 연결시킴으로써 순조와 익종의 권위를 환기하고, 동시에 헌종과 신하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효과는 《기축진찬도》에서 외진찬도가 수행하던 역할과 유사하다. 따라서 내진찬만이 설행된 《무신진찬도》에서는 진하도를 통해 외진찬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정전진하도〉는 기존 진하도의 도상을 계승하면서도 도법에서 중요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영조대 이후 독립 병풍으로 제작된 진하도는 대체로 진하 장면을 중심에 두고 양측에 궁궐 전각을 배치한 구도를 취하였다.51 진하 장면에서는 전내(殿內)에 왕과 근신이 자리하고, 전정(殿庭)에 면복을 입은 종친 및 문무백관이 배치된 가운데, 어좌 앞에서 치사를 읽는 의식이 선택되었다.52 〈인정전진하도〉 역시 이러한 도상을 계승하였으나, 두 폭으로 좁아진 화면에 맞추어 좌우의 궁궐 배경을 생략하고 전내의 인원도 축소하여 그렸다.53
〈인정전진하도〉가 기존 진하도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지점은 도법에 있다. 기존의 독립 진하도 병풍에서는 행사장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평행사선부감도법’과 정면에서 평면적으로 내려다보는 ‘정면부감도법’이 병존하였다. 헌종대의 사례로 〈헌종가례진하도(憲宗嘉禮陳賀圖)〉(1844)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조대비사순칭경진하계병(趙大妃四旬稱慶陳賀契屛)〉(1847)은 후자에 해당된다(fig. 3, 4).54 이에 비해 〈인정전진하도〉에는 등변사다리꼴 형태의 투시도법이 적용되었다. 이는 단일 소실점에 수렴하는 일점투시법은 아니지만 상단 중심축을 향해 좌우가 일정하게 줄어드는 도법으로, 좁은 화면 속에서도 원근감과 공간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55 나아가 진하도와 이어지는 진찬도들에 동일한 투시법이 적용되면서 병풍 전체에 통일감이 부여되었다.


《무신진찬도》의 두 번째 장면인 〈통명전진찬도〉는 순원왕후에게 올린 진찬연을 그렸다(fig. 5). 이 장면은 체계적인 공간 구성과 의식 재현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보여준다. 내진찬이 처음 그려진 사례는 정조대 《화성원행도》 중 〈봉수당진찬도〉(1795)이다. 당시 정조는 혜경궁에게 올린 진찬에 왕실 여성과 남성, 신하들을 모두 참여시켰고, 이를 위해 행사 공간을 주렴(珠簾)과 휘장, 담장 등으로 구획하였다.56 그러나 그림에서는 봉수당 내부가 주렴으로 차단되어 주빈인 혜경궁과 왕실 여성의 자리를 볼 수 없었다(fig. 6).


왕실 여성의 공간이 재현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의궤 도식부터이다.57 1809년 혜경궁의 관례(冠禮) 60주년 행사를 기록한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에는 혜경궁이 자리한 내전이 묘사되어 있다(fig. 7).58 도식에서는 실제 의식과 달리 주렴을 말아 올리고 남성 참연자를 분리한 휘장을 낮추어 행사장 내부를 모두 보이게 만들었다. 이처럼 의궤도에서 왕실 여성의 공간이 가시화되게 된 것은 처음부터 이 의궤가 혜경궁을 위해 제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9

이후 19세기 의궤와 계병에서는 주렴을 거두어 주빈이 자리한 전각 내부를 공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60 그중 헌종이 선례로 삼은 익종의 《기축진찬도(己丑進饌圖)》(1829)는 중요한 비교 대상이다(fig. 8).61 병풍 속 〈자경전진찬도〉는 실제로는 주렴이 전각 내부와 서측 명부 자리를 둘러 설치되었지만, 그림에서는 순조의 어좌와 대차 앞의 주렴과 휘장이 거두어진 것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여성 참연자, 순조, 왕세자, 남성 참연자의 자리가 분산되어 있어, 주렴과 휘장, 황목장이 공간 분할에 충분히 효과적인 장치가 되지는 못했다.

이에 비해 《무신진찬도》의 〈통명전진찬도〉는 훨씬 체계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통명전진찬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상단은 주빈(主賓)인 대비와 왕실 여성의 공간, 중단은 주최자인 국왕의 공간, 하단은 남성 참연자의 공간이다(fig. 9). 이 상·중·하의 명확한 체계는 붉은 주렴에 의해 직관적으로 강조된다.62

상단은 왕실 여성의 공간이다. 주빈인 대왕대비를 중심으로 좌우에 왕비와 경빈, 그 아래에 좌우명부가 위계적인 삼각구도를 이룬다. 왕비와 후궁이 동서로 나란히 앉는 경우는 이례적인데, 이는 헌종이 지난해 가례를 올린 경빈 김씨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한 처사라고 해석할 수 있다.63
중단은 상단과 하단의 두 주렴 사이에 놓인 국왕의 공간이자 정재가 설행되는 공간이다. 왼쪽에는 국왕이 연회를 감상하는 시연위와 찬탁이 놓이고, 중앙에는 절을 올리는 배위가 놓였다. 왕은 시연자 중 유일하게 주렴의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는 인물로 진작을 올릴 때 주렴 사이의 문을 통해 전내로 들어가 술을 바치고 돌아온다. 〈무신진찬도〉에서는 주렴과 황목장에 세 개의 문을 그려 넣어 의례 집사자와 왕의 동선을 표시하였다.
하단은 악대와 남성 참연자의 공간이다. 주렴 밖 보계 위에는 등가가, 보계 아래 마당에는 헌가와 남성 참연자, 즉 종친·의빈·척신·진찬소 당랑의 시연위와 배위가 있다. 기축년의 경우 이들의 시위가 자경문 밖에 위치하였으나, 무신년에는 정양문(正陽門) 안으로 들어와 배치되었다. 보계의 위아래에는 황목장을 두어 시선을 이중으로 차단하였다.
이처럼 주렴과 보계, 장막 등의 구획 시설은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공간을 구분해 주었다(fig. 10).64 주렴은 실제 공간에서 외부자의 시각을 차단함으로써 권위를 유지하였다면, 그림 속에서는 화면을 상중하로 구획하여 여성 참연자, 국왕, 남성 참연자의 공간을 분리하였다. 또한 전각 내부와 외부는 왕실 여성과 명부 사이의 위계를, 보계의 위와 아래는 왕과 제신 간의 위계를 보여준다.65 종합하면 〈통명전진찬도〉는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주빈인 대왕대비에게서 멀어지는 의례적 구도와 전각에서 보계를 거쳐 마당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공간적 위차를 동시에 구현하였다. 주렴의 붉은 선들은 공간을 구획할 뿐 아니라 상단을 중심으로 수렴하는 원근법적 구도를 강화하여 공간의 위계성을 증폭시킨다.

〈통명전진찬도〉 다음에 이어지는 〈통명전야진찬도〉와 〈통명전익일회작도〉는 처음 병풍으로 그려졌다. 야연과 회작은 익종에 의해 고안된 후속 의례였으나, 이전에는 의궤에 반차도식으로만 남았을 뿐 기념 병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무신진찬도》는 이 두 행사를 포함시킴으로써 확장된 연향의 의미를 담고자 하였다. 우선 〈통명전야진찬도〉는 배경은 거의 유지한 채 지붕과 가벽의 등불, 축소된 찬상, 사라진 내빈과 외빈의 자리 등을 통해 저녁 행사임을 드러낸다(fig. 11).66 효명세자가 처음 야연을 기획했을 때에는 가족 간의 친밀하고 격의 없는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고 주빈과 익종의 자리는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다(fig. 12).67 〈통명전야연도〉에서는 대비와 헌종 사이에 여전히 주렴이 놓이고 화면상의 위계적 구도도 유지된다. 이처럼 진찬도의 구도가 야연도에서 반복됨에 따라 순원왕후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 구도는 오히려 더 공고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인 〈통명전익일회작도〉는 순원왕후의 자리에 그대로 헌종의 어좌를 설치함으로써 권위의 승계를 보여준다(fig. 13). 익종이 회작연을 기획했을 때에는 세자의 위치였기 때문에 세자와 명부가 동서로 마주보았지만(fig. 14), 〈통명전익일회작도〉에서 헌종은 국왕의 입장에서 중앙에 남면하였다.68 명부는 주렴을 설치한 서측 보계에, 진찬소 당상과 낭청은 보계 아래에 자리하여 국왕을 보좌하는 구도를 취하였다. 특히 전정과 보계 사이의 주렴이 다른 폭들과 달리 열려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fig. 15). 이는 진찬소 당랑이 처음으로 보계에 올라 치사를 올리며 연향에 참여하였던 사실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69



〈통명전익일회작도〉는 다른 장면과 달리 한 폭에 그려졌기 때문에 실제 7칸인 통명전을 3칸으로 축소하여 그려야 했다. 그러나 공간을 구획하는 가로선들- 통명전 지붕의 처마, 차양, 주렴, 황목장, 보계, 정양문 담장의 위치를 다른 폭들과 맞춤으로써 화폭의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어칸의 규모는 약간 줄어들었지만, 투시 중심으로 수렴되는 선이 가팔라지면서 원근감과 중앙 집중도는 높아졌다.
이처럼 《무신진찬도》의 장면들은 통일된 투시도법과 삼단 구도의 틀 안에서 각 의례의 내용에 맞게 구성되었다. 때로는 병풍 전체의 시각적 정연함을 위해 의례의 사실 적시성보다 화면 구성을 우선하기도 하였는데, 정재와 무용 장면의 묘사가 이에 해당한다. 실제 행사에서는 16종의 정재가 총 32번 실행되었지만, 병풍 속에는 실제 실행 날짜와 무관하게 16종 정재를 세 화면에 중복 없이 나누어 배치하였다(fig. 16).70 예를 들어 〈통명전진찬도〉의 처용무(處容舞)는 실제로는 야진찬에서 설행되었고, 〈통명전야진찬도〉의 경우 검기무를 제외한 정재들이 모두 정일 진찬에서 설행된 것이었다. 선유락 역시 모든 연회에서 실행되었으나 〈통명전익일회작도〉에만 그려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16종의 정재 모두가 세 장면에 나누어 병풍에 그려질 수 있었는데, 이는 앞선 진찬도에서 공간상의 이유로 일부 정재가 누락되거나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과 구별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무신진찬도》는 체계적인 의례적 틀과 통일된 시각적 구조 속에서 헌종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 곧 대왕대비, 왕실 여성, 외척, 근신의 관계를 재구성하였다. 이들의 관계와 지위는 의례의 절차와 공간상의 자리를 통해 규정되었다. 《무신진찬도》는 참석자들의 의례적 관계를 화면 위에 재배열함으로써 헌종에 의해 재편된 정치적 역학 관계를 상징적으로 구조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Ⅵ. 맺음말
《무신진찬도》는 1848년 헌종이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망오를 기념하여 제작한 연향도이다. 그러나 이 병풍은 단순한 궁중 연향의 기록이 아니라, 헌종이 친정 체제를 확립해가던 시기에 자신의 국정 주도권과 왕권의 정통성을 시각화한 정치적 산물이었다. 무신진찬은 순원왕후의 육순을 표면적 계기로 삼았지만, 순조와 익종에 대한 추상존호례와 결합됨으로써 헌종의 왕통 계승 의식을 함께 드러냈다. 즉 이 행사는 대비를 위한 사적인 생신 잔치에 머무르지 않고, 헌종이 왕실과 조정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재확인한 국가적 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행사의 추진 세력에서도 확인된다. 진찬소 당상과 낭청에는 헌종이 친정 이후 새롭게 등용한 근신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병풍 좌목에서 이들이 규장각 각신의 경력으로 호명된 점은 헌종이 규장각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구상과 연관이 있다. 또한 진찬소가 총위영에 설치되고 서희순이 총위대장으로서 행사를 총괄한 사실은 헌종이 의례를 통해 규장각과 총위영이라는 문무의 친위 기반을 함께 가시화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의례의 구조 역시 헌종의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다. 무신진찬은 효명세자가 창안한 진찬, 야진찬, 익일회작의 중층적 연향 구조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다. 헌종은 문안제신의 범위를 확대하여 내진찬이 왕실 내부의 의례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였고, 진찬소 당랑을 단순한 실무자가 아니라 의례에 참여하는 시연자로 격상시켰다. 특히 익일야연을 새롭게 추가하여 헌종과 진찬소 당랑의 관계를 별도로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무신진찬도》의 회화적 구성은 이러한 의례적·정치적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하였다. 병풍은 진하례, 진찬, 야진찬, 익일회작의 네 장면을 선택하였다. 이 네 장면은 헌종을 중심으로 한 관계의 재편을 의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부계를 이은 적통자이고(진하례), 대비의 승계자이며(내진찬과 야연), 신하들의 군왕(익일회작)이다. 이 지점에서 《무신진찬도》는 이전 시기의 《기축진찬도》와 구별된다. 《기축진찬도》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아래 순조를 중심에 둔 계승 의식을 시각화한 작품이었다면, 《무신진찬도》는 헌종이 이미 국왕의 지위에서 대비, 선왕, 외척, 근신, 제신과 맺는 복합적인 관계를 재배열한 작품이었다. 특히 진하례를 첫 장면으로 배치해 외진찬의 군신 관계를 보완하고 회작을 병풍에 포함시켜 국왕과 근신간의 관계를 강조한 점은 《기축진찬도》와 구별되는 구체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헌종은 《무신진찬도》를 통해 순원왕후의 정치적 유산, 순조와 익종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정통성, 그리고 규장각과 총위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친위 세력을 하나의 화면 질서 안에 결합하고자 하였다. 비록 헌종이 이듬해 승하하면서 이러한 정치적 구상이 지속되지 못했지만 《무신진찬도》가 마련한 장면 구성과 시각적 형식은 이후 19세기 연향도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고종대 연향도는 《무신진찬도》의 형식과 구성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정치적 조건 속에서 변주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