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he Imagery of Reclusion to the Representation of Political Authority: The Transformation of Kiyŏnghoedo (耆英會圖) from Late Koryŏ to Early Chosŏn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원 (Curatorial Assistant of Fine Arts Department, National Museum of Korea)
DOI: https://doi.org/10.31065/kjah.330.202606.002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iconographic transformation of the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 (耆英會圖) painting subject from the late Koryŏ dynasty to the early Chosŏn dynasty by analyzing examples from the perspective of changing modes of self-representation among retired officials (kiro, 耆老).
In the late Koryŏ dynasty, retired officials tended to represent themselves as recluses engaged in various literati activities in commemorative paintings of their gatherings. However, these idealized scenes of retirement revealed a discrepancy between representation and reality, as these individuals continued to participate in governmental affairs.
During the early Chosŏn period, the gatherings of retired officials began to receive institutional support from the state. Yet they were criticized by younger officials for retaining the character of private assemblies. Thus, it is highly likely that a demand emerged for new modes of commemoration that could justify the legitimacy of such gatherings as public events.
The Paintings of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 made in the reign of King Chungjong (中宗, r. 1506-1544) delivered a political message advocating the elderly elite’s key role within the court and their close relationship with the monarch through accompanied colophons and poems. Subsequently, such paintings increasingly emphasized the identity of participants as high-ranking officials under royal patronage. In extant works from the reigns of King Myŏngjong (明宗, r. 1545-1567) and King Sŏnjo (宣祖, r. 1567-1608), the political authority of elderly officials and the formal character of the event are clearly displayed through visual iconography.
These developments suggest that the transformation of the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 subject was not merely a stylistic evolution but rather the result of shifting perceptions of retired officials and the changing political significance of their gatherings.
Ⅰ. 서론
조선시대의 기영회(耆英會)는 정2품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한 70세 이상의 원로 관료들이 참여한 모임으로 국가 원로 집단의 연회라는 상징적 성격을 지녔다. 이들의 모임을 시각화한 기영회도(耆英會圖) 중 가장 이른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의 작품들이다(figs. 1, 2).1 화면 속 기로(耆老)들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고 위계에 따라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어 행사의 높은 격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요소로 인해 그동안 기영회도는 고관(高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재현한 기록화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특징은 단순한 행사 기록의 결과물이라기보다 기로들의 모임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했는지와 관련되어 있었다. 기록화는 기본적으로 실제 행사의 기록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지만 기념의 목적과 행사 주체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화는 제작 당시의 상황에 따라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창안되는 요소가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관료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기영회도가 어떤 전통을 배경으로 기인했으며 어떤 점에서 기존의 전통과 차별화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기영회도는 기로회도(耆老會圖)라는 장르의 발달 과정 속에서 논의되거나 계회도(契會圖)의 한 범주로 연구되었다.2 이 과정에서 기영회도는 고려시대의 기로회도 전통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결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기로의 자기 표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선조 대 기영회도의 관료적 위계가 부각된 구성은 이전 시기의 기로 관련 도상들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기록에 나타난 기로들의 자기 표상 방식을 살펴보면 이들은 관료로서의 공적 위상보다는 관직에서 물러난 은거자(隱居者)와 같은 이상적 문인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대개 자연을 배경으로 아회(雅會)를 즐기는 모습으로 재현되었으며 은거를 상징하는 고사(故事) 속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했다. 즉 기로의 시각적 표상은 정치적 권력과 거리를 둔 은일(隱逸)의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었다. 기로들이 이러한 은일의 이미지로부터 격식을 갖춘 관료의 모습을 추구하게 된 것은 기영회도의 성격과 표상 방식에 일어난 분명한 변화를 암시한다.
본 논문은 선조 대 기영회도에 나타난 기로의 자기 표상 방식과 그 이전 시기의 도상적 전통 사이의 단절과 변화에 주목하여 기로들의 모임이 어떻게 공식 관료의 이미지로 재구성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영회도를 단일한 도상 유형이나 장르의 발전으로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선택되고 구성된 이미지로 해석하고자 한다.
Ⅱ. 고려 말 조선 초 기로의 자기 표상과 은일의 이미지
고려 말의 기로회도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의 삶을 이상화한 은일적 처사(處士)의 모습을 시각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기로들의 모임을 주제로 한 그림은 자연 속에서의 아회나 야복 차림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이러한 그림들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거나 바둑을 두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도상은 은퇴한 원로가 추구한 문인적 이상을 상징하는 요소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은일의 이상을 전면에 내세운 기로의 이미지는 조선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1. 최당(崔讜)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와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 및 개인 초상
기록으로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기로회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 알려진 것은 1203년(신종 6)의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이다. 이 그림은 최당(崔讜, 1135~1211)이 은퇴한 후 거처하던 별서에서 열린 기로회를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공적 위계의 과시보다는 은퇴한 원로들의 교유로 모임을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3 〈해동기로회도〉는 표지(標識)를 보지 않고 인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자세히 묘사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각 인물의 초상적 특징이 강조되었으며 인물 옆에 이름이 적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또한 참석자들이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거문고와 바둑, 시와 음주를 즐기고 있었으며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며 누워 있는 자세로까지 그려졌다고 한다.5
이처럼 각 인물의 초상적 특징이 강조된 동시에 이들이 거문고, 바둑, 시와 술을 즐기는 모습으로 표현된 모습은 북송(北宋) 이후 이상화된 문인 아집도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본래 중국의 기로회도는 인물의 초상 입상(立像)이 일렬로 배열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당대(唐代)의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나 북송의 〈낙양기영회도(洛陽耆英會圖)〉는 원래 참석자들의 초상 입상이 나란히 배치되고 그 옆에 이름과 나이가 쓰여 있는 그림이었다.6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역시 이러한 전통을 따라 긴 횡권에 참석자 다섯 명의 초상 입상이 일렬로 배치된 구성이었다(fig. 3).7

그런데 북송대 이후로 이 그림들은 점차 산수나 정원 속에서 문인들이 거문고, 바둑, 시와 술을 즐기는 장면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향산구로도’, ‘낙양기영회도’라는 화제(畫題)는 인물들의 아회 장면과 금기시주(琴棋詩酒) 도상이 두드러진 구성으로 변화하였다(figs. 4, 5).8 〈해동기로회도〉에 거문고, 바둑, 시와 음주 도상이 그려진 점은 이 작품이 향산구로회, 낙양기영회를 묘사한 북송대 그림들의 도상을 수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특히 〈해동기로회도〉의 기지개를 켜는 도상은 휘종(徽宗, 재위 1101~1125) 전칭의 〈십팔학사도권(十八學士圖卷)〉에도 금기시주의 도상과 함께 그려져 있어서 북송의 ‘십팔학사도’ 도상 또한 〈해동기로회도〉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fig. 6).9 이는 퇴직한 원로를 아집도 속 은거하는 문인으로 표현하여 이상화한 그림이 고려 사회에 깊이 수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최당은 〈해동기로회도〉와 같은 집단적 기념화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의 자신을 표상하기 위해 개인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태위공기우도(太尉公騎牛圖)〉는 은퇴한 최당이 소의 등 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그려진 초상화였다.10 이처럼 치사(致仕)한 관료가 자신의 초상을 기우 도상으로 재현하는 행위는 동시대 북송의 사대부 사회에서 문인들이 은퇴 이후의 정체성을 소를 탄 모습으로 형상화하던 관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북송의 관료였던 유환(劉渙, 1000~1080)은 은퇴한 이후 일흔 살의 자신을 소를 탄 모습으로 표현한 〈유응지기우도(劉凝之騎牛圖)〉를 제작하고 주변 문인들로부터 찬문을 받았다.11 ‘기우’ 도상으로 유명했던 유환의 초상은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 은거를 택한 자신의 모습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서 세속적 관습에서 벗어난 존재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남송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춘사취귀도(春社醉歸圖)〉는 나이가 지긋한 관료가 소를 탄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이러한 시각적 전통이 송대 문인 사회에 확산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fig. 7).

동시대 북송의 사례를 고려할 때 최당의 〈태위공기우도〉 역시 그가 은퇴한 사대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상하기 위해 선택한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집단을 표현한 기로회도와 개인 초상에서 모두 은거자의 상징적 도상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하였다. 특히 이러한 그림 주문이 모두 치사 이후라는 점은 당시 사대부 사회에 은퇴를 기념하여 기로를 이상적인 은일자로 표현한 그림이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2. 염제신(廉悌臣)의 〈원암연집도(元巖讌集圖)〉와 고려 말 기로회
최당이 은퇴 후 해동기로회를 결성하였듯이 고려 말에도 고관들은 치사 이후에 지속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고려 말에 개최된 기로회들 중 염제신(廉悌臣, 1304~1382)과 윤환(尹桓, 1304~1386)이 중심이 된 기로회가 대표적이다.12 이들은 다른 기로 및 현직 정승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으며 이를 기념해 서명을 쓴 첩이나 축을 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13 그런데 그림을 제작했다는 기록은 〈원암연집도(元巖讌集圖)〉가 유일하다. 〈원암연집도〉는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을 갔던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이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돌아오는 길에 왕을 호종한 원로들이 보령의 원암(元巖)에서 가졌던 모임을 주제로 한 그림이었다.14 당시 일곱 명의 원로 중 한 명이었던 염제신이 화공(畫工)에게 그림을 주문했으며 당시 이들이 지은 시와 이색(李穡, 1328~1396)의 서문을 함께 장황한 것으로 보인다.15
염제신은 완성된 그림을 이색에게 보인 뒤 서문과 시를 청했다. 서문에는 임금이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비록 이들이 나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더라도 국왕을 보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공민왕을 몸소 호종한 행위가 여러 관료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며 원암의 모임이 ‘국가의 원기’가 되었다고 서술되었다.16 특히 공민왕도 이들의 결의에 감동하여 극진히 예우했다는 대목은 이들이 원로 집단으로서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염제신과 윤환은 원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고 공민왕 대에 좌정승(左政丞)·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당대 최고위 관료였다.17 〈원암연집도〉에는 원로들의 형상을 그린 것이 마치 공신상(功臣像)과 같다고 표현되었을 정도로 인물 묘사 및 이들의 공훈이 강조되어 있었다.18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공훈을 강조한 서술과는 달리 〈원암연집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원로들이 아회를 즐기는 모습이 표현된 야외 아집도였다. 이색이 “산과 들의 나무숲이 천막을 가리고 비추는 모습이 눈앞에 완연하고, 여러 노인이 그 곁에서 연회를 베풀며 노니는 풍모가 한 시대를 압도한다”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산수 속 인물들의 교유를 중심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19 〈원암연집도〉에 표현된 이미지에는 글로 강조된 이들의 정치적 공훈과는 다르게 공적 위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모습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그림은 1362년 원암에서의 모임 당시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제작되었다. ‘공민왕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염제신이 그림을 주문하였으며 일곱 원로 중 둘만 남아 있다는 언급을 보면 이수산(李壽山, ?~1376)의 몰년 이후에 그림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20 원암에서의 모임 당시 참석자들이 지은 시만 존재하던 상황에서 그림은 상상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다.21 이는 기로의 모임을 표상하는 데 공적 위계와 행사의 격식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문인 교유의 도상을 드러내는 형식이 더 적합한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암시한다.
최당의 사례가 개인 초상과 집단 기념화 모두에서 은일적 상징이 활용되었음을 보여 준다면 염제신의 사례는 정치적 공훈을 지닌 고관 집단의 모임조차 야외 아집의 형식으로 시각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고려 말까지 기로 집단의 시각적 표상은 공적 관료의 위계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자연 속의 교유나 문인 아집의 도상을 통해 구성되는 경향이 강했다.
3. 이규보(李奎報)와 성석린(成石璘)의 기로 초상
기로가 은일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사례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초상화 제작도 주목된다. 이규보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초상화와 묵죽도(墨竹圖)를 사대부 화가인 정홍진(丁鴻進, 생몰년 미상)에게 주문하였다.22 이규보는 대나무는 본래 자신이 아끼는 대상이라고 밝히는 한편, 자신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며 “기꺼이 자원하여 은퇴하였고 즐기는 것은 거문고와 술뿐”이라고 읊었다. 그림 주문이 이루어진 1238년은 그가 1237년에 일흔의 나이로 치사한 직후였다.23 즉 초상과 묵죽도의 주문은 칠순 이후의 삶을 시각적으로 새롭게 표상하려는 의식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거문고와 술’을 즐길 뿐이라는 표현은 앞서 〈해동기로회도〉에 나타난 ‘거문고와 바둑, 시와 술’의 도상과 연결되어 은퇴한 문인을 표상하는 정형화된 시적 표현과 회화적 관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4
이규보는 정홍진의 묵죽도를 얻는 이들이 대부분 자신에게 시를 요청한다고 하며 “내 초상을 그려 준다면 내 몸이 도리어 내 시를 받게 되리라”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자신의 초상이 곧 대나무 그림과 같다는 의미로써 자신이 곧 대나무와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의도로 생각된다. 이규보가 묘사한 자신의 초상은 궤[隱几]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었는데 야복 또는 연거복(燕居服) 차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5 당시 기로회가 빈번하게 열린 정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초상 제작과 감상 문화는 기로 집단 내부에서 널리 공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은일 중심의 기로 도상은 고려 말의 관료들이 조선 개국 이후에도 활동하며 계속해서 활용되었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1421년(세종 3)에 궤장을 하사받고 은퇴 후 도성 근교의 ‘독곡(獨谷)’이라는 별서에서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 은거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독곡산보도(獨谷散步圖)〉와 〈독곡연좌도(獨谷讌坐圖)〉를 제작했다. 〈독곡산보도〉는 성석린이 복건을 쓰고 여장(藜杖)을 짚은 채 산책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26 복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홀로 거니는 모습은 고려시대부터 감상된 백거이(白居易, 772~846) 초상의 대표적인 도상이었다.27 즉 성석린이 백거이라는 기로의 대명사를 통해 자신을 표상한 것으로 해석된다. 〈독곡연좌도〉는 그가 깊은 골짜기 속 별서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독곡’이라는 당호(堂號)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별호도(別號圖)의 일종인 동시에 성석린의 초상이기도 했다.28 성석린의 사례는 조선 초기 관료가 은퇴 이후 자신을 은일의 이미지로 재현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이러한 이미지가 은퇴라는 삶의 중요한 사건을 시각적으로 기념하기에 적합한 도상이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Ⅲ. 기로의 정치적 위상과 기영회의 제도적 확립 과정
기로를 표상하기 위해 활용된 은일의 이미지와는 달리 기로들이 은퇴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기로들은 70세 이후에도 국정에 깊이 관여하거나 현직에 머무르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기로의 정치적 실상과 시각적 표상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했다.
해동기로회에 참석한 기로들은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최당의 가문은 고려의 문벌 가문이었으며 최당과 최선은 최충헌의 집권과 동시에 요직을 맡았다.29 다른 참석자들도 최충헌의 정변에 협력한 인물들로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30 이들은 퇴직 이후에도 고려 조정의 중요한 정치적 논의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최충헌은 해동기로회에 악사(樂士)를 보내 이들을 후원하기도 했다.31 이는 이 모임이 단순한 사적 교유에 머물지 않았으며 당시 고려의 집권 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기로들은 치사 이후 2품 이상의 관직에서 물러난 신하들로 구성된 치정재추소(致政宰樞所)에서 활동하며 외교와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32 따라서 〈해동기로회도〉와 〈태위공기우도〉에 나타난 한가로운 아집 장면과 기우 도상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표상하고자 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33
〈원암연집도〉를 제작한 염제신과 윤환 등도 당대 정치의 핵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원암의 모임에 참여했던 염제신, 윤환, 이암(李嵒, 1297~1364), 홍원철(洪元哲, 생몰년 미상), 황석기(黃石奇, ?~1364)와 같은 인물들은 원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했거나 고려 조정에서 고위 직급에 올라 큰 명성을 얻은 이들이었다.34 이들은 전직 고관들을 위해 설립된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의 일원으로서 외교와 같은 사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의 최고 정무 기구였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함께 회의하고 각사(各司)의 장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35 염제신과 윤환이 참석한 기로회에는 국왕이 신하를 보내 술을 하사하였다.36 즉 기로회는 단순한 노년 관료들의 친목의 자리라기보다 치사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한 원로 관료 집단의 네트워크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로회의 정치적 성격은 조선 개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고려의 관료 출신으로서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 공신이었던 이거이(李居易, 1348~1412)의 사례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기로회의 연속성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최당의 종외손(從外孫)으로서 태종 4년(1404)에 집안에 전해지던 「해동기로회도서(海東耆老會圖序)」를 보고 ‘해동기영회’를 계승한 기영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그는 현직 관료로 활동 중이었으며 57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정승 이상을 지낸 사람은 나이와 무관하게 기영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거이 본인과 우의정 성석린을 포함한 현직 정승들이 참여하게 되었다.37 즉 이 모임은 사실상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현직 정승들의 결집이었다. 태종은 이거이의 기영회에 술을 하사했는데 이는 고관들이 결성한 비공식적 성격의 모임을 국왕이 승인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38
이처럼 원로 관료들이 먼저 모임을 결성하고 왕권이 이를 지원하던 방식은 고려 말 기로회의 관행이 지속된 결과였다. 다만 조선 초에는 기로소가 설치되어 공식 기구가 되었다는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 태종 11년(1411)에는 기로소의 역할을 한 ‘전함재추소’가 설립되었다. 이때 태종은 기로소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세종 대에는 전함재추소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고 이후 약칭으로 ‘기로소’라고 불리게 되었다.39 따라서 원로 문인들이 사가(私家)나 향촌에서 결성한 모임과 다르게 국가의 지원을 받아 열리는 기로회가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도적 편입이 곧바로 기영회의 성격 전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그 공적 위상은 아직 안정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1433년(세종 15)에 좌의정으로 치사한 이귀령(李貴齡, 1346~1439)은 기영회를 매달 개최하는 것을 허락받고자 임금의 윤허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모임[私會]’이라고 지목될 것이 두렵다고 하였다.40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도 기영회를 향한 회의적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1473년(성종 4)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낙중기영회의 고사를 근거로 기영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참석자 대다수가 70세가 되지 않은 현직 고관이었다.41 이듬해의 기영회를 기록한 사신(史臣)은 “이름은 기영회였으나 실제로는 의정(議政)들의 연회”였으며 낙중기영회는 은퇴한 이들이 노인 공경을 위해 사적으로 결성한 자리였는데 지금의 기영회는 “국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당시 식자(識者)들이 웃었다”라고 하였다.42 이러한 비판은 당시 고관들을 위한 기영회가 국가의 예산과 인력으로 열리는 것이 충분히 정당화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43
Ⅳ. 중종 대 ‘기영회도’ 제작과 〈기영회도〉 속 고관으로서 기로 표상의 의미
이러한 상황에서 기영회도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높아진 시기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첩이나 축에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는 방식으로 기영회가 기념되었다.44 이는 기영회의 제도화가 곧바로 기념화 제작이나 시각적 표상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종이 ‘기영회도’ 병풍을 주문하고 문신들에게 ‘기영회도’를 주제로 시를 짓게 한 사실은 이 시기에 기영회도가 주목되기 시작했음을 알려 준다.45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지 않았던 기로소에 관한 정보가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점에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기로소의 중요성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46 이처럼 기로소와 기영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기념화의 제작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은 “양로는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는 이유로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 〈낙중기영회오로도(洛中耆英會五老圖)〉,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병풍을 제작하게 하였다.47 약 한 달 뒤 그림이 완성되자 중종은 예조판서(禮曹判書)이자 대제학(大提學)인 신용개(申用漑, 1463~1519)에게 이 그림들에 대한 발문과 시를 짓도록 명했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이 그림들 속 인물들은 자연 속에서 음주를 즐기며 자유롭게 교유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에는 “수풀 동산은 아름답고 꽃과 대나무 무성하여”, “봄날의 꽃들 언덕을 뒤덮는데 그대로의 모습 그림으로 들어와” 등과 같이 화면의 요소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48 특히 〈수양오로도〉가 이러한 문인 교유 아집도 형식으로 재현된 점은 흥미롭다. 북송대의 〈수양오로도〉는 원래 인물의 초상 입상이 나열된 형식이었으며 명대(明代)에 모사될 때에도 아집도처럼 변화하지 않고 원본의 형식이 유지되었다(fig. 8).49 이러한 차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기영회도가 기본적으로 은일 관련 도상과 결부되어 수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50

중종이 주문한 그림들은 단순한 고사인물화가 아니라 당시의 실제 기영회를 기념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향산구로도〉와 〈낙중기영회오로도〉의 발문에는 조정에 덕이 높은 노신(老臣)이 많으며 중종이 해마다 봄가을에 기영회를 베풀어 술과 음악을 하사하니 지금이 태평성대라는 점이 강조되었다.51 즉 발문은 고사인물화에 대해 쓰인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중종 대 실제 기영회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림이 제작될 시점에는 기영회가 매해 개최되고 있었다. 또한 발문과 시문을 담당한 이가 예조판서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기로소는 예조(禮曹)에 소속된 관청이었으며 기영회 또한 예조에서 주관하는 행사였다. 예조의 최고 책임자가 이와 같은 글을 작성하였다는 사실은 이 그림들이 실제 기영회를 기념하고 그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한편 〈낙중기영회오로도〉의 발문에는 낙양기영회의 덕망 높은 구법당(舊法黨) 인사들이 왕안석(王安石, 1021~1086)에 의해 부당하게 쫓겨났으므로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되었다.52 왕안석과 관련된 고사는 중종 대 실제 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대응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사간원 및 사헌부를 중심으로 한 신진 관료들인 대간(臺諫)의 세력이 강해지며 이들과 원로 대신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대간이 ‘기구대신(耆舊大臣)’을 탄핵하는 일이 지나쳐서 수많은 대신이 물러나는 일이 매일 일어나기도 했다.53 이때 중종은 대간을 왕안석에 비유하며 이들의 과도한 개혁 추구를 지적하기도 했다.54
기로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중종의 그림 주문은 곧 사간원(司諫院)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사간원에서는 “기영회도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治道]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55 이들이 ‘기영회도’라는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실제로 문제 삼은 것은 기영회를 향한 국왕의 후원과 기로들의 결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영회에 참석할 자격을 가진 인사는 2품 이상, 70세 이상의 대신으로 대다수가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 대부터 핵심 직책을 맡아 온 관료들이었다.56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영회는 대신들만을 위한 자리였기 때문에 대간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간은 기영회의 중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57
기영회를 기념하기 위해 중종이 주문한 병풍들은 행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이상적인 기영회 고사인물화를 그리고 그에 부가된 글을 통해 정치적 의미를 보완한 그림이었다. 이처럼 국왕이 기영회 관련 발문과 그림을 직접 주문함으로써 기영회 및 측근 기로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사례는 이후 기영회도에서 국왕의 후원을 받는 고관으로서 기로의 표상이 확립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 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기영회도의 변화는 이후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대와 선조 대에도 계속되었다. 명종 대와 선조 대는 기영회 참석자들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강해졌다는 특징이 있다. 우선 명종 3년(1548) 9월에 개최되었던 기영회에는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1476~1549), 풍성부원군(豐城府院君) 이기(李芑, 1476~1552), 좌의정 황헌(黃憲, 1502~1574) 등이 참석하였다.58 이들은 을사사화(1545)의 공신이자 명종 초 집권 세력으로서 정국을 강력하게 주도하고 있었다. 명종 19년(1564)에는 기로소에서 〈기영회도(耆英會圖)〉 족자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홍섬(洪暹, 1504~1585)이 쓴 기문에 따르면 기영회 장면을 재현한 행사도였으며 참석자들의 관복과 품대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59 흥미롭게도 이때 제작된 〈기영회도〉의 모습을 당시 참석자였던 오겸(吳謙, 1496~1582)의 문중에 전해진 작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fig. 9). 〈기영회도〉에는 연회가 열린 기로소를 배경으로 참석자 일곱 명이 앉아 있으며 그 아래 홍섬의 기문이 적혀 있다. 좌목에 이름을 올린 기로는 윤개(尹漑, 1494~1566)를 비롯한 여섯 명이며 홍섬은 70세가 되지 않았지만 자리에 함께하였다.60

이처럼 관청의 대청이나 궁궐 공간을 좌우대칭으로 정면에 넓게 펼쳐 표현한 구성은 16세기에 유행한 산수 계회도와는 대조적으로 공적 권위와 격식을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명종 대의 〈기영회도〉와 같은 해에 그려지고 유사한 구도를 가진 작품으로는 명종이 친림한 사연을 기념해 명종 19년(1564)에 완성된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台親臨賜宴圖)〉가 있다(fig. 10). 〈서총대친림사연도〉의 화면 상단에는 가장 위계가 높은 국왕의 자리가 그려져 있으며 하단에는 국왕이 하사한 사악(賜樂)이 묘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영회도〉에도 가장 상단에 기로들이 위계에 따라 앉아 있고 국왕이 하사한 사악과 주준(酒樽)이 하단에 그려져 있으며 개별 인물의 모습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다.61 이는 〈기영회도〉가 국왕의 친림 행사를 재현한 궁중행사도처럼 높은 격식의 표현을 통해 기영회의 위상을 강화하는 기능을 했음을 알려 준다. 한편 이 시기 기영회도가 행사도로 제작된 것은 명종 대에 들어 궁중행사도가 활발히 제작되기 시작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62 조정에서 궁중행사도의 제작과 감상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 기영회 장면의 재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명종 대에 이어 선조 대의 작품에도 고위 관료로서 참석자들의 모습과 행사의 위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선조 대의 기영회도에는 앞서 명종 대의 〈기로회도〉와 동일한 구도와 도상이 계승되었다. 관청의 대청이 마찬가지로 좌우대칭으로 넓게 펼쳐져 있으며 기로들은 관모와 관복, 품대를 착용한 관료의 모습으로 위계에 따라 앉아 있다(figs. 1, 2). 이러한 표현은 현재도 조정의 중심에 있는 관료들의 공적 연회라는 모임의 성격을 드러낸다.63
또한 〈기영회도〉에 재현된 행사 기물들은 기로들에게 내려진 국왕의 후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로들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금지(金紙)에 화려하게 채색이 된 화조도(花鳥圖) 병풍으로 일본에서 조선 왕실에 보낸 외교 선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fig. 11).64 행사에 외교 예물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행사 공간의 위엄과 왕실의 후원을 드러낸다. 또한 국왕의 후원 사실이 선온(宣醞)과 사악의 묘사를 통해 강조되어 있다. 선조 대 기영회도에는 국왕이 내린 술이 담긴 주준과 꽃을 꽂은 화준이 모두 그려져 있다(figs. 12, 13).65 특히 주정(酒亭) 위의 화준이 화면 중앙에 위치하여 주변의 인물들보다 크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화준의 표현은 국왕의 후원을 상징함으로써 행사의 위상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도상은 기영회가 국왕의 지지를 기반으로 부각되던 상황에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기영회도는 더 이상 문인 아집의 도상을 차용해 기로를 이상화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의 후원 아래 거행된 공적 행사와 위계에 따라 엄격하게 자리한 원로 대신들의 모습을 통해 기영회의 공적 권위를 드러내는 그림이었다. 1585년의 〈기영회도〉를 기념해 지어진 시에는 “성은에 보답하는 것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태평한 치세에 누가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나”라고 쓰였다.66 즉 기로를 은퇴와 은거의 상징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노년까지 조정에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관료로 부각한 것이다. 기영회도는 처음부터 화려한 행사의 재현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이러한 재현 양상은 기영회가 공적 행사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영회의 권위를 강조할 수 있도록 구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결론
기영회도가 행사기록화로 재현된 것은 기로소가 설치되고 나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종의 ‘기영회도’ 병풍 주문 사례는 기영회를 기념한 그림이 행사도가 아니라 탈속적인 문인 아집을 재현한 고사인물화로 그려졌음을 알려 준다. 이는 고려의 〈해동기로회도〉, 〈원암연집도〉와 같이 아집도 형식으로 기로회도를 제작하던 관행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탈속적 문인의 표상은 기로의 실제 정치적 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로들은 은퇴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은거의 도상이 선호된 이유는 이들이 은퇴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은일하는 문인으로 표상하는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영회도에 관료로서 기로의 정체성과 국왕의 후원을 시각화한 요소들이 그려지게 된 것은 기영회의 제도적 확립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 기영회는 조선 초에 공식적 행사로 확립되어 갔으나 명분과 정당성이 충분히 확립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중종 대에는 ‘기영회도’ 병풍을 통해 기로대신의 정치적 중요성 및 왕권과의 긴밀한 관계가 강조되었다. 중종 대의 사례는 이후 명종 대와 선조 대에도 기영회도가 행사의 공적 위계와 국왕의 후원을 직접 시각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기로 도상의 변화는 조선 전기의 기영회도가 단순한 사실 재현을 넘어 기로 집단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위상을 시각적으로 구성해 간 결과였음을 잘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