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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Imagery of Reclusion to the Representation of Political Authority: The Transformation of Kiyŏnghoedo (耆英會圖) from Late Koryŏ to Early Chosŏn

Yoojeong Lee**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원 (Curatorial Assistant of Fine Arts Department, National Museum of Korea)

본 논문은 2025년 제68회 전국역사학대회 미술사부 한국미술사학회 분과 발표에서 발표한 내용 일부를 수정 및 보완한 글이다.

Published: June 2026·Vol. , No. 330·pp. 43-72

DOI: https://doi.org/10.31065/kjah.330.202606.002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iconographic transformation of the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 (耆英會圖) painting subject from the late Koryŏ dynasty to the early Chosŏn dynasty by analyzing examples from the perspective of changing modes of self-representation among retired officials (kiro, 耆老).

In the late Koryŏ dynasty, retired officials tended to represent themselves as recluses engaged in various literati activities in commemorative paintings of their gatherings. However, these idealized scenes of retirement revealed a discrepancy between representation and reality, as these individuals continued to participate in governmental affairs.

During the early Chosŏn period, the gatherings of retired officials began to receive institutional support from the state. Yet they were criticized by younger officials for retaining the character of private assemblies. Thus, it is highly likely that a demand emerged for new modes of commemoration that could justify the legitimacy of such gatherings as public events.

The Paintings of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 made in the reign of King Chungjong (中宗, r. 1506-1544) delivered a political message advocating the elderly elite’s key role within the court and their close relationship with the monarch through accompanied colophons and poems. Subsequently, such paintings increasingly emphasized the identity of participants as high-ranking officials under royal patronage. In extant works from the reigns of King Myŏngjong (明宗, r. 1545-1567) and King Sŏnjo (宣祖, r. 1567-1608), the political authority of elderly officials and the formal character of the event are clearly displayed through visual iconography.

These developments suggest that the transformation of the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 subject was not merely a stylistic evolution but rather the result of shifting perceptions of retired officials and the changing political significance of their gatherings.

Keywords:Painting of Gathering of Senior OfficialsGathering of Senior OfficialsGathering of Senior OfficialsHaedong Gathering of EldersGathering of Elders at WŏnamKing Chungjong

Ⅰ. 서론

조선시대의 기영회(耆英會)는 정2품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한 70세 이상의 원로 관료들이 참여한 모임으로 국가 원로 집단의 연회라는 상징적 성격을 지녔다. 이들의 모임을 시각화한 기영회도(耆英會圖) 중 가장 이른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의 작품들이다(figs. 1, 2).1 화면 속 기로(耆老)들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고 위계에 따라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어 행사의 높은 격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요소로 인해 그동안 기영회도는 고관(高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재현한 기록화로 이해되어 왔다.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158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41.4×104.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Fig. 1.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158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41.4×104.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1585,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12.4×62.0cm,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ed. Han’guk sŏhwa torok che 30 chip—Chosŏn sidae kyehoedo, p. 81)
Fig. 2.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1585,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12.4×62.0cm,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ed. Han’guk sŏhwa torok che 30 chip—Chosŏn sidae kyehoedo, p. 81)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특징은 단순한 행사 기록의 결과물이라기보다 기로들의 모임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했는지와 관련되어 있었다. 기록화는 기본적으로 실제 행사의 기록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지만 기념의 목적과 행사 주체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화는 제작 당시의 상황에 따라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창안되는 요소가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관료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기영회도가 어떤 전통을 배경으로 기인했으며 어떤 점에서 기존의 전통과 차별화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기영회도는 기로회도(耆老會圖)라는 장르의 발달 과정 속에서 논의되거나 계회도(契會圖)의 한 범주로 연구되었다.2 이 과정에서 기영회도는 고려시대의 기로회도 전통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결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기로의 자기 표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선조 대 기영회도의 관료적 위계가 부각된 구성은 이전 시기의 기로 관련 도상들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기록에 나타난 기로들의 자기 표상 방식을 살펴보면 이들은 관료로서의 공적 위상보다는 관직에서 물러난 은거자(隱居者)와 같은 이상적 문인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대개 자연을 배경으로 아회(雅會)를 즐기는 모습으로 재현되었으며 은거를 상징하는 고사(故事) 속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했다. 즉 기로의 시각적 표상은 정치적 권력과 거리를 둔 은일(隱逸)의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었다. 기로들이 이러한 은일의 이미지로부터 격식을 갖춘 관료의 모습을 추구하게 된 것은 기영회도의 성격과 표상 방식에 일어난 분명한 변화를 암시한다.

본 논문은 선조 대 기영회도에 나타난 기로의 자기 표상 방식과 그 이전 시기의 도상적 전통 사이의 단절과 변화에 주목하여 기로들의 모임이 어떻게 공식 관료의 이미지로 재구성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영회도를 단일한 도상 유형이나 장르의 발전으로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선택되고 구성된 이미지로 해석하고자 한다.

Ⅱ. 고려 말 조선 초 기로의 자기 표상과 은일의 이미지

고려 말의 기로회도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의 삶을 이상화한 은일적 처사(處士)의 모습을 시각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기로들의 모임을 주제로 한 그림은 자연 속에서의 아회나 야복 차림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이러한 그림들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거나 바둑을 두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도상은 은퇴한 원로가 추구한 문인적 이상을 상징하는 요소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은일의 이상을 전면에 내세운 기로의 이미지는 조선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1. 최당(崔讜)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와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 및 개인 초상

기록으로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기로회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 알려진 것은 1203년(신종 6)의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이다. 이 그림은 최당(崔讜, 1135~1211)이 은퇴한 후 거처하던 별서에서 열린 기로회를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공적 위계의 과시보다는 은퇴한 원로들의 교유로 모임을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3 〈해동기로회도〉는 표지(標識)를 보지 않고 인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자세히 묘사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각 인물의 초상적 특징이 강조되었으며 인물 옆에 이름이 적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또한 참석자들이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거문고와 바둑, 시와 음주를 즐기고 있었으며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며 누워 있는 자세로까지 그려졌다고 한다.5

이처럼 각 인물의 초상적 특징이 강조된 동시에 이들이 거문고, 바둑, 시와 술을 즐기는 모습으로 표현된 모습은 북송(北宋) 이후 이상화된 문인 아집도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본래 중국의 기로회도는 인물의 초상 입상(立像)이 일렬로 배열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당대(唐代)의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나 북송의 〈낙양기영회도(洛陽耆英會圖)〉는 원래 참석자들의 초상 입상이 나란히 배치되고 그 옆에 이름과 나이가 쓰여 있는 그림이었다.6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역시 이러한 전통을 따라 긴 횡권에 참석자 다섯 명의 초상 입상이 일렬로 배치된 구성이었다(fig. 3).7

작가 미상,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중 〈필세장 초상(畢世長肖像)〉 Unidentified artist, Portrait of Bi Shichang from the set Five Old Men of Suiyang, 1056,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40.0×32.1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www.metmuseum.org)
Fig. 3. 작가 미상,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중 〈필세장 초상(畢世長肖像)〉 Unidentified artist, Portrait of Bi Shichang from the set Five Old Men of Suiyang, 1056,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40.0×32.1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www.metmuseum.org)

그런데 북송대 이후로 이 그림들은 점차 산수나 정원 속에서 문인들이 거문고, 바둑, 시와 술을 즐기는 장면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향산구로도’, ‘낙양기영회도’라는 화제(畫題)는 인물들의 아회 장면과 금기시주(琴棋詩酒) 도상이 두드러진 구성으로 변화하였다(figs. 4, 5).8 〈해동기로회도〉에 거문고, 바둑, 시와 음주 도상이 그려진 점은 이 작품이 향산구로회, 낙양기영회를 묘사한 북송대 그림들의 도상을 수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특히 〈해동기로회도〉의 기지개를 켜는 도상은 휘종(徽宗, 재위 1101~1125) 전칭의 〈십팔학사도권(十八學士圖卷)〉에도 금기시주의 도상과 함께 그려져 있어서 북송의 ‘십팔학사도’ 도상 또한 〈해동기로회도〉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fig. 6).9 이는 퇴직한 원로를 아집도 속 은거하는 문인으로 표현하여 이상화한 그림이 고려 사회에 깊이 수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작가 미상, 〈회창구로도(會昌九老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Nine Elders of the Huichang Era (detail),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28.3×246.8cm, The Palace Museum (The Palace Museum, https://www.dpm.org.cn/collection/paint/229089.html)
Fig. 4. 작가 미상, 〈회창구로도(會昌九老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Nine Elders of the Huichang Era (detail),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28.3×246.8cm, The Palace Museum (The Palace Museum, https://www.dpm.org.cn/collection/paint/229089.html)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Gathering of Elders (detail),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32.2×258.5cm,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www.npm.gov.tw)
Fig. 5.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Gathering of Elders (detail),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32.2×258.5cm,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www.npm.gov.tw)
전(傳) 휘종(徽宗, 재위 1101-1125), 〈십팔학사도권(十八學士圖卷)〉 (세부) Attributed to Huizong (r. 1101-1125), The Eighteen Scholars of the Tang dynasty (detail), Song dynasty or after,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28.2×550.2cm,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www.npm.gov.tw)
Fig. 6. 전(傳) 휘종(徽宗, 재위 1101-1125), 〈십팔학사도권(十八學士圖卷)〉 (세부) Attributed to Huizong (r. 1101-1125), The Eighteen Scholars of the Tang dynasty (detail), Song dynasty or after,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28.2×550.2cm,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www.npm.gov.tw)

최당은 〈해동기로회도〉와 같은 집단적 기념화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의 자신을 표상하기 위해 개인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태위공기우도(太尉公騎牛圖)〉는 은퇴한 최당이 소의 등 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그려진 초상화였다.10 이처럼 치사(致仕)한 관료가 자신의 초상을 기우 도상으로 재현하는 행위는 동시대 북송의 사대부 사회에서 문인들이 은퇴 이후의 정체성을 소를 탄 모습으로 형상화하던 관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북송의 관료였던 유환(劉渙, 1000~1080)은 은퇴한 이후 일흔 살의 자신을 소를 탄 모습으로 표현한 〈유응지기우도(劉凝之騎牛圖)〉를 제작하고 주변 문인들로부터 찬문을 받았다.11 ‘기우’ 도상으로 유명했던 유환의 초상은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 은거를 택한 자신의 모습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서 세속적 관습에서 벗어난 존재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남송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춘사취귀도(春社醉歸圖)〉는 나이가 지긋한 관료가 소를 탄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이러한 시각적 전통이 송대 문인 사회에 확산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fig. 7).

작가 미상, 〈춘사취귀도(春社醉歸圖)〉 Unidentified artist, Returning from a Village Feast,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25.7×27.2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Museum of Fine Arts, Boston, https://collections.mfa.org)
Fig. 7. 작가 미상, 〈춘사취귀도(春社醉歸圖)〉 Unidentified artist, Returning from a Village Feast, Song dynasty, China, Ink and colors on silk, 25.7×27.2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Museum of Fine Arts, Boston, https://collections.mfa.org)

동시대 북송의 사례를 고려할 때 최당의 〈태위공기우도〉 역시 그가 은퇴한 사대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상하기 위해 선택한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집단을 표현한 기로회도와 개인 초상에서 모두 은거자의 상징적 도상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하였다. 특히 이러한 그림 주문이 모두 치사 이후라는 점은 당시 사대부 사회에 은퇴를 기념하여 기로를 이상적인 은일자로 표현한 그림이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2. 염제신(廉悌臣)의 〈원암연집도(元巖讌集圖)〉와 고려 말 기로회

최당이 은퇴 후 해동기로회를 결성하였듯이 고려 말에도 고관들은 치사 이후에 지속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고려 말에 개최된 기로회들 중 염제신(廉悌臣, 1304~1382)과 윤환(尹桓, 1304~1386)이 중심이 된 기로회가 대표적이다.12 이들은 다른 기로 및 현직 정승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으며 이를 기념해 서명을 쓴 첩이나 축을 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13 그런데 그림을 제작했다는 기록은 〈원암연집도(元巖讌集圖)〉가 유일하다. 〈원암연집도〉는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을 갔던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이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돌아오는 길에 왕을 호종한 원로들이 보령의 원암(元巖)에서 가졌던 모임을 주제로 한 그림이었다.14 당시 일곱 명의 원로 중 한 명이었던 염제신이 화공(畫工)에게 그림을 주문했으며 당시 이들이 지은 시와 이색(李穡, 1328~1396)의 서문을 함께 장황한 것으로 보인다.15

염제신은 완성된 그림을 이색에게 보인 뒤 서문과 시를 청했다. 서문에는 임금이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비록 이들이 나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더라도 국왕을 보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공민왕을 몸소 호종한 행위가 여러 관료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며 원암의 모임이 ‘국가의 원기’가 되었다고 서술되었다.16 특히 공민왕도 이들의 결의에 감동하여 극진히 예우했다는 대목은 이들이 원로 집단으로서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염제신과 윤환은 원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고 공민왕 대에 좌정승(左政丞)·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당대 최고위 관료였다.17 〈원암연집도〉에는 원로들의 형상을 그린 것이 마치 공신상(功臣像)과 같다고 표현되었을 정도로 인물 묘사 및 이들의 공훈이 강조되어 있었다.18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공훈을 강조한 서술과는 달리 〈원암연집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원로들이 아회를 즐기는 모습이 표현된 야외 아집도였다. 이색이 “산과 들의 나무숲이 천막을 가리고 비추는 모습이 눈앞에 완연하고, 여러 노인이 그 곁에서 연회를 베풀며 노니는 풍모가 한 시대를 압도한다”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산수 속 인물들의 교유를 중심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19 〈원암연집도〉에 표현된 이미지에는 글로 강조된 이들의 정치적 공훈과는 다르게 공적 위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모습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그림은 1362년 원암에서의 모임 당시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제작되었다. ‘공민왕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염제신이 그림을 주문하였으며 일곱 원로 중 둘만 남아 있다는 언급을 보면 이수산(李壽山, ?~1376)의 몰년 이후에 그림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20 원암에서의 모임 당시 참석자들이 지은 시만 존재하던 상황에서 그림은 상상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다.21 이는 기로의 모임을 표상하는 데 공적 위계와 행사의 격식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문인 교유의 도상을 드러내는 형식이 더 적합한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암시한다.

최당의 사례가 개인 초상과 집단 기념화 모두에서 은일적 상징이 활용되었음을 보여 준다면 염제신의 사례는 정치적 공훈을 지닌 고관 집단의 모임조차 야외 아집의 형식으로 시각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고려 말까지 기로 집단의 시각적 표상은 공적 관료의 위계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자연 속의 교유나 문인 아집의 도상을 통해 구성되는 경향이 강했다.

3. 이규보(李奎報)와 성석린(成石璘)의 기로 초상

기로가 은일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사례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초상화 제작도 주목된다. 이규보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초상화와 묵죽도(墨竹圖)를 사대부 화가인 정홍진(丁鴻進, 생몰년 미상)에게 주문하였다.22 이규보는 대나무는 본래 자신이 아끼는 대상이라고 밝히는 한편, 자신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며 “기꺼이 자원하여 은퇴하였고 즐기는 것은 거문고와 술뿐”이라고 읊었다. 그림 주문이 이루어진 1238년은 그가 1237년에 일흔의 나이로 치사한 직후였다.23 즉 초상과 묵죽도의 주문은 칠순 이후의 삶을 시각적으로 새롭게 표상하려는 의식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거문고와 술’을 즐길 뿐이라는 표현은 앞서 〈해동기로회도〉에 나타난 ‘거문고와 바둑, 시와 술’의 도상과 연결되어 은퇴한 문인을 표상하는 정형화된 시적 표현과 회화적 관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4

이규보는 정홍진의 묵죽도를 얻는 이들이 대부분 자신에게 시를 요청한다고 하며 “내 초상을 그려 준다면 내 몸이 도리어 내 시를 받게 되리라”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자신의 초상이 곧 대나무 그림과 같다는 의미로써 자신이 곧 대나무와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의도로 생각된다. 이규보가 묘사한 자신의 초상은 궤[隱几]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었는데 야복 또는 연거복(燕居服) 차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5 당시 기로회가 빈번하게 열린 정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초상 제작과 감상 문화는 기로 집단 내부에서 널리 공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은일 중심의 기로 도상은 고려 말의 관료들이 조선 개국 이후에도 활동하며 계속해서 활용되었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1421년(세종 3)에 궤장을 하사받고 은퇴 후 도성 근교의 ‘독곡(獨谷)’이라는 별서에서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 은거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독곡산보도(獨谷散步圖)〉와 〈독곡연좌도(獨谷讌坐圖)〉를 제작했다. 〈독곡산보도〉는 성석린이 복건을 쓰고 여장(藜杖)을 짚은 채 산책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26 복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홀로 거니는 모습은 고려시대부터 감상된 백거이(白居易, 772~846) 초상의 대표적인 도상이었다.27 즉 성석린이 백거이라는 기로의 대명사를 통해 자신을 표상한 것으로 해석된다. 〈독곡연좌도〉는 그가 깊은 골짜기 속 별서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독곡’이라는 당호(堂號)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별호도(別號圖)의 일종인 동시에 성석린의 초상이기도 했다.28 성석린의 사례는 조선 초기 관료가 은퇴 이후 자신을 은일의 이미지로 재현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이러한 이미지가 은퇴라는 삶의 중요한 사건을 시각적으로 기념하기에 적합한 도상이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Ⅲ. 기로의 정치적 위상과 기영회의 제도적 확립 과정

기로를 표상하기 위해 활용된 은일의 이미지와는 달리 기로들이 은퇴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기로들은 70세 이후에도 국정에 깊이 관여하거나 현직에 머무르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기로의 정치적 실상과 시각적 표상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했다.

해동기로회에 참석한 기로들은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최당의 가문은 고려의 문벌 가문이었으며 최당과 최선은 최충헌의 집권과 동시에 요직을 맡았다.29 다른 참석자들도 최충헌의 정변에 협력한 인물들로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30 이들은 퇴직 이후에도 고려 조정의 중요한 정치적 논의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최충헌은 해동기로회에 악사(樂士)를 보내 이들을 후원하기도 했다.31 이는 이 모임이 단순한 사적 교유에 머물지 않았으며 당시 고려의 집권 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기로들은 치사 이후 2품 이상의 관직에서 물러난 신하들로 구성된 치정재추소(致政宰樞所)에서 활동하며 외교와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32 따라서 〈해동기로회도〉와 〈태위공기우도〉에 나타난 한가로운 아집 장면과 기우 도상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표상하고자 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33

〈원암연집도〉를 제작한 염제신과 윤환 등도 당대 정치의 핵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원암의 모임에 참여했던 염제신, 윤환, 이암(李嵒, 1297~1364), 홍원철(洪元哲, 생몰년 미상), 황석기(黃石奇, ?~1364)와 같은 인물들은 원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했거나 고려 조정에서 고위 직급에 올라 큰 명성을 얻은 이들이었다.34 이들은 전직 고관들을 위해 설립된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의 일원으로서 외교와 같은 사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의 최고 정무 기구였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함께 회의하고 각사(各司)의 장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35 염제신과 윤환이 참석한 기로회에는 국왕이 신하를 보내 술을 하사하였다.36 즉 기로회는 단순한 노년 관료들의 친목의 자리라기보다 치사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한 원로 관료 집단의 네트워크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로회의 정치적 성격은 조선 개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고려의 관료 출신으로서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 공신이었던 이거이(李居易, 1348~1412)의 사례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기로회의 연속성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최당의 종외손(從外孫)으로서 태종 4년(1404)에 집안에 전해지던 「해동기로회도서(海東耆老會圖序)」를 보고 ‘해동기영회’를 계승한 기영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그는 현직 관료로 활동 중이었으며 57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정승 이상을 지낸 사람은 나이와 무관하게 기영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거이 본인과 우의정 성석린을 포함한 현직 정승들이 참여하게 되었다.37 즉 이 모임은 사실상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현직 정승들의 결집이었다. 태종은 이거이의 기영회에 술을 하사했는데 이는 고관들이 결성한 비공식적 성격의 모임을 국왕이 승인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38

이처럼 원로 관료들이 먼저 모임을 결성하고 왕권이 이를 지원하던 방식은 고려 말 기로회의 관행이 지속된 결과였다. 다만 조선 초에는 기로소가 설치되어 공식 기구가 되었다는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 태종 11년(1411)에는 기로소의 역할을 한 ‘전함재추소’가 설립되었다. 이때 태종은 기로소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세종 대에는 전함재추소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고 이후 약칭으로 ‘기로소’라고 불리게 되었다.39 따라서 원로 문인들이 사가(私家)나 향촌에서 결성한 모임과 다르게 국가의 지원을 받아 열리는 기로회가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도적 편입이 곧바로 기영회의 성격 전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그 공적 위상은 아직 안정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1433년(세종 15)에 좌의정으로 치사한 이귀령(李貴齡, 1346~1439)은 기영회를 매달 개최하는 것을 허락받고자 임금의 윤허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모임[私會]’이라고 지목될 것이 두렵다고 하였다.40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도 기영회를 향한 회의적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1473년(성종 4)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낙중기영회의 고사를 근거로 기영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참석자 대다수가 70세가 되지 않은 현직 고관이었다.41 이듬해의 기영회를 기록한 사신(史臣)은 “이름은 기영회였으나 실제로는 의정(議政)들의 연회”였으며 낙중기영회는 은퇴한 이들이 노인 공경을 위해 사적으로 결성한 자리였는데 지금의 기영회는 “국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당시 식자(識者)들이 웃었다”라고 하였다.42 이러한 비판은 당시 고관들을 위한 기영회가 국가의 예산과 인력으로 열리는 것이 충분히 정당화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43

Ⅳ. 중종 대 ‘기영회도’ 제작과 〈기영회도〉 속 고관으로서 기로 표상의 의미

이러한 상황에서 기영회도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높아진 시기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첩이나 축에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는 방식으로 기영회가 기념되었다.44 이는 기영회의 제도화가 곧바로 기념화 제작이나 시각적 표상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종이 ‘기영회도’ 병풍을 주문하고 문신들에게 ‘기영회도’를 주제로 시를 짓게 한 사실은 이 시기에 기영회도가 주목되기 시작했음을 알려 준다.45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지 않았던 기로소에 관한 정보가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점에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기로소의 중요성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46 이처럼 기로소와 기영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기념화의 제작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은 “양로는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는 이유로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 〈낙중기영회오로도(洛中耆英會五老圖)〉,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병풍을 제작하게 하였다.47 약 한 달 뒤 그림이 완성되자 중종은 예조판서(禮曹判書)이자 대제학(大提學)인 신용개(申用漑, 1463~1519)에게 이 그림들에 대한 발문과 시를 짓도록 명했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이 그림들 속 인물들은 자연 속에서 음주를 즐기며 자유롭게 교유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에는 “수풀 동산은 아름답고 꽃과 대나무 무성하여”, “봄날의 꽃들 언덕을 뒤덮는데 그대로의 모습 그림으로 들어와” 등과 같이 화면의 요소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48 특히 〈수양오로도〉가 이러한 문인 교유 아집도 형식으로 재현된 점은 흥미롭다. 북송대의 〈수양오로도〉는 원래 인물의 초상 입상이 나열된 형식이었으며 명대(明代)에 모사될 때에도 아집도처럼 변화하지 않고 원본의 형식이 유지되었다(fig. 8).49 이러한 차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기영회도가 기본적으로 은일 관련 도상과 결부되어 수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50

우구 (尤求, 1521년경-1595년경),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You Qiu (尤求, c. 1521-c. 1595), Copy of the Five Old Men of Suiyang, Ink and colors on silk, 16th century, Ming dynasty, China, 33.2×60.3cm, Shanghai Museum (Shanghai Museum, https://www.shanghaimuseum.net)
Fig. 8. 우구 (尤求, 1521년경-1595년경),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 You Qiu (尤求, c. 1521-c. 1595), Copy of the Five Old Men of Suiyang, Ink and colors on silk, 16th century, Ming dynasty, China, 33.2×60.3cm, Shanghai Museum (Shanghai Museum, https://www.shanghaimuseum.net)

중종이 주문한 그림들은 단순한 고사인물화가 아니라 당시의 실제 기영회를 기념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향산구로도〉와 〈낙중기영회오로도〉의 발문에는 조정에 덕이 높은 노신(老臣)이 많으며 중종이 해마다 봄가을에 기영회를 베풀어 술과 음악을 하사하니 지금이 태평성대라는 점이 강조되었다.51 즉 발문은 고사인물화에 대해 쓰인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중종 대 실제 기영회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림이 제작될 시점에는 기영회가 매해 개최되고 있었다. 또한 발문과 시문을 담당한 이가 예조판서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기로소는 예조(禮曹)에 소속된 관청이었으며 기영회 또한 예조에서 주관하는 행사였다. 예조의 최고 책임자가 이와 같은 글을 작성하였다는 사실은 이 그림들이 실제 기영회를 기념하고 그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한편 〈낙중기영회오로도〉의 발문에는 낙양기영회의 덕망 높은 구법당(舊法黨) 인사들이 왕안석(王安石, 1021~1086)에 의해 부당하게 쫓겨났으므로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되었다.52 왕안석과 관련된 고사는 중종 대 실제 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대응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사간원 및 사헌부를 중심으로 한 신진 관료들인 대간(臺諫)의 세력이 강해지며 이들과 원로 대신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대간이 ‘기구대신(耆舊大臣)’을 탄핵하는 일이 지나쳐서 수많은 대신이 물러나는 일이 매일 일어나기도 했다.53 이때 중종은 대간을 왕안석에 비유하며 이들의 과도한 개혁 추구를 지적하기도 했다.54

기로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중종의 그림 주문은 곧 사간원(司諫院)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사간원에서는 “기영회도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治道]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55 이들이 ‘기영회도’라는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실제로 문제 삼은 것은 기영회를 향한 국왕의 후원과 기로들의 결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영회에 참석할 자격을 가진 인사는 2품 이상, 70세 이상의 대신으로 대다수가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 대부터 핵심 직책을 맡아 온 관료들이었다.56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영회는 대신들만을 위한 자리였기 때문에 대간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간은 기영회의 중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57

기영회를 기념하기 위해 중종이 주문한 병풍들은 행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이상적인 기영회 고사인물화를 그리고 그에 부가된 글을 통해 정치적 의미를 보완한 그림이었다. 이처럼 국왕이 기영회 관련 발문과 그림을 직접 주문함으로써 기영회 및 측근 기로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사례는 이후 기영회도에서 국왕의 후원을 받는 고관으로서 기로의 표상이 확립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 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기영회도의 변화는 이후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대와 선조 대에도 계속되었다. 명종 대와 선조 대는 기영회 참석자들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강해졌다는 특징이 있다. 우선 명종 3년(1548) 9월에 개최되었던 기영회에는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1476~1549), 풍성부원군(豐城府院君) 이기(李芑, 1476~1552), 좌의정 황헌(黃憲, 1502~1574) 등이 참석하였다.58 이들은 을사사화(1545)의 공신이자 명종 초 집권 세력으로서 정국을 강력하게 주도하고 있었다. 명종 19년(1564)에는 기로소에서 〈기영회도(耆英會圖)〉 족자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홍섬(洪暹, 1504~1585)이 쓴 기문에 따르면 기영회 장면을 재현한 행사도였으며 참석자들의 관복과 품대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59 흥미롭게도 이때 제작된 〈기영회도〉의 모습을 당시 참석자였던 오겸(吳謙, 1496~1582)의 문중에 전해진 작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fig. 9). 〈기영회도〉에는 연회가 열린 기로소를 배경으로 참석자 일곱 명이 앉아 있으며 그 아래 홍섬의 기문이 적혀 있다. 좌목에 이름을 올린 기로는 윤개(尹漑, 1494~1566)를 비롯한 여섯 명이며 홍섬은 70세가 되지 않았지만 자리에 함께하였다.60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Chosŏn, Ink and colors on paper, Dimensions Unknown, Formerly in the collection of Naju O ssi Kŭm yanggun Chongjung (Naju O ssi Kŭmyanggun Chongjung, ed. Kugyŏk Kukchae Yujip, p. 8)
Fig. 9.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Chosŏn, Ink and colors on paper, Dimensions Unknown, Formerly in the collection of Naju O ssi Kŭm yanggun Chongjung (Naju O ssi Kŭmyanggun Chongjung, ed. Kugyŏk Kukchae Yujip, p. 8)

이처럼 관청의 대청이나 궁궐 공간을 좌우대칭으로 정면에 넓게 펼쳐 표현한 구성은 16세기에 유행한 산수 계회도와는 대조적으로 공적 권위와 격식을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명종 대의 〈기영회도〉와 같은 해에 그려지고 유사한 구도를 가진 작품으로는 명종이 친림한 사연을 기념해 명종 19년(1564)에 완성된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台親臨賜宴圖)〉가 있다(fig. 10). 〈서총대친림사연도〉의 화면 상단에는 가장 위계가 높은 국왕의 자리가 그려져 있으며 하단에는 국왕이 하사한 사악(賜樂)이 묘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영회도〉에도 가장 상단에 기로들이 위계에 따라 앉아 있고 국왕이 하사한 사악과 주준(酒樽)이 하단에 그려져 있으며 개별 인물의 모습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다.61 이는 〈기영회도〉가 국왕의 친림 행사를 재현한 궁중행사도처럼 높은 격식의 표현을 통해 기영회의 위상을 강화하는 기능을 했음을 알려 준다. 한편 이 시기 기영회도가 행사도로 제작된 것은 명종 대에 들어 궁중행사도가 활발히 제작되기 시작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62 조정에서 궁중행사도의 제작과 감상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 기영회 장면의 재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미상,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台親臨賜宴圖)〉 Unidentified artist, Sŏchongdae Chinlim Sayŏndo, 156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22.0×123.8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Fig. 10. 작가 미상,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台親臨賜宴圖)〉 Unidentified artist, Sŏchongdae Chinlim Sayŏndo, 156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22.0×123.8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명종 대에 이어 선조 대의 작품에도 고위 관료로서 참석자들의 모습과 행사의 위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선조 대의 기영회도에는 앞서 명종 대의 〈기로회도〉와 동일한 구도와 도상이 계승되었다. 관청의 대청이 마찬가지로 좌우대칭으로 넓게 펼쳐져 있으며 기로들은 관모와 관복, 품대를 착용한 관료의 모습으로 위계에 따라 앉아 있다(figs. 1, 2). 이러한 표현은 현재도 조정의 중심에 있는 관료들의 공적 연회라는 모임의 성격을 드러낸다.63

또한 〈기영회도〉에 재현된 행사 기물들은 기로들에게 내려진 국왕의 후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로들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금지(金紙)에 화려하게 채색이 된 화조도(花鳥圖) 병풍으로 일본에서 조선 왕실에 보낸 외교 선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fig. 11).64 행사에 외교 예물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행사 공간의 위엄과 왕실의 후원을 드러낸다. 또한 국왕의 후원 사실이 선온(宣醞)과 사악의 묘사를 통해 강조되어 있다. 선조 대 기영회도에는 국왕이 내린 술이 담긴 주준과 꽃을 꽂은 화준이 모두 그려져 있다(figs. 12, 13).65 특히 주정(酒亭) 위의 화준이 화면 중앙에 위치하여 주변의 인물들보다 크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화준의 표현은 국왕의 후원을 상징함으로써 행사의 위상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도상은 기영회가 국왕의 지지를 기반으로 부각되던 상황에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detail), 158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41.4×104.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Fig. 11.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detail), 158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41.4×104.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detail), 158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41.4×104.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Fig. 12.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detail), 1584,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41.4×104.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detail), 1585,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12.4×62.0cm,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ed. Han’guk sŏhwa torok che 30 chip—Chosŏn sidae kyehoedo, p. 81)
Fig. 13. 작가 미상, 〈기영회도(耆英會圖)〉 (세부) Unidentified artist, Kiyŏnghoedo (detail), 1585, Chosŏn, Ink and colors on silk, 112.4×62.0cm, National Museum of Korea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ed. Han’guk sŏhwa torok che 30 chip—Chosŏn sidae kyehoedo, p. 81)

이처럼 기영회도는 더 이상 문인 아집의 도상을 차용해 기로를 이상화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의 후원 아래 거행된 공적 행사와 위계에 따라 엄격하게 자리한 원로 대신들의 모습을 통해 기영회의 공적 권위를 드러내는 그림이었다. 1585년의 〈기영회도〉를 기념해 지어진 시에는 “성은에 보답하는 것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태평한 치세에 누가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나”라고 쓰였다.66 즉 기로를 은퇴와 은거의 상징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노년까지 조정에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관료로 부각한 것이다. 기영회도는 처음부터 화려한 행사의 재현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이러한 재현 양상은 기영회가 공적 행사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영회의 권위를 강조할 수 있도록 구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결론

기영회도가 행사기록화로 재현된 것은 기로소가 설치되고 나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종의 ‘기영회도’ 병풍 주문 사례는 기영회를 기념한 그림이 행사도가 아니라 탈속적인 문인 아집을 재현한 고사인물화로 그려졌음을 알려 준다. 이는 고려의 〈해동기로회도〉, 〈원암연집도〉와 같이 아집도 형식으로 기로회도를 제작하던 관행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탈속적 문인의 표상은 기로의 실제 정치적 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로들은 은퇴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은거의 도상이 선호된 이유는 이들이 은퇴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은일하는 문인으로 표상하는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영회도에 관료로서 기로의 정체성과 국왕의 후원을 시각화한 요소들이 그려지게 된 것은 기영회의 제도적 확립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 기영회는 조선 초에 공식적 행사로 확립되어 갔으나 명분과 정당성이 충분히 확립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중종 대에는 ‘기영회도’ 병풍을 통해 기로대신의 정치적 중요성 및 왕권과의 긴밀한 관계가 강조되었다. 중종 대의 사례는 이후 명종 대와 선조 대에도 기영회도가 행사의 공적 위계와 국왕의 후원을 직접 시각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기로 도상의 변화는 조선 전기의 기영회도가 단순한 사실 재현을 넘어 기로 집단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위상을 시각적으로 구성해 간 결과였음을 잘 보여 준다.

Notes

  1. 1임진왜란 이전의 기영회 관련 그림으로는 1584년(선조 17)의 기영회를 주제로 한 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84년(선조 17)의 〈기영회도〉(신수14888), 1585년(선조 18)의 기영회를 주제로 한 ②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기영회도〉(역246), ③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영회도〉(동원2910), ④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영회도〉(접수2762), ⑤광주 노씨(光州盧氏) 문중 소장 〈기영회도〉가 알려져 있다. 최경현, 「조선시대 耆英會圖의 일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본 〈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40 (2021), pp. 191-192. 본 논문의 Ⅳ장에서는 1564년(명종 19)의 기영회를 기념해 그려진 ⑥나주오씨 금양군 종중 구장(舊藏) 〈기영회도〉 또한 소개할 것이다.
  2. 2계회도 및 기영회도와 관련된 연구는 안휘준, 「高麗 및 朝鮮王朝의 文人契會와 契會圖」, 『古文化』 20 (1982), pp. 3-13; 유옥경, 「1585년 〈宣祖朝耆英會圖〉 考察: 東垣先生 寄贈 〈耆英會圖>를 中心으로」, 『東垣學術論文集』 3 (2001), pp. 29-57; 윤진영, 「朝鮮時代 契會圖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3); 오민주, 「朝鮮時代 耆老會圖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위의 논문 참조. ‘기영회(耆英會)’와 ‘기로회(耆老會)’의 개념 구분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 기영회와 기로회가 대체로 동일한 의미였다는 의견이 있는 한편 두 모임의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기로연에는 전직 당상관(堂上官)이, 기영연에는 70세 이상의 종재(宗宰)와 정1품 및 경연당상이 참석한다고 기록되어 조선시대에도 두 명칭을 구분하여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해동기로회’가 ‘해동기영회’로 혼용되거나, 1473년의 ‘기로연’에도 70세 이하의 현직 관료들이 참석한 경우가 확인된다. 1474년 이후에는 의정(議政)을 지낸 관료가 연령과 무관하게 참여하면서 ‘기영회’로 명칭이 수렴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명칭의 엄밀한 구분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료에 기록된 명칭을 존중하여 사용하되, 1474년 이후에는 사료에 특별한 명칭이 쓰이지 않은 경우 ‘기영회’로 통칭하고자 한다.
  3. 3해동기로회에 관한 연구는 박종진, 「고려시기 해동기로회의 결성과 활동」, 『역사와 현실』 66 (2007), pp. 303-335; 채웅석, 「고려 중·후기 기로회와 개경 사대부사회」, 『역사와 현실』 79 (2011), pp. 60-99; 오치훈, 「고려시대 海東耆老會의 성립과 ‘耆老’의 의미 변화」, 『史叢』 83 (2014), pp. 3-28 참조.
  4. 4李仁老, 『東文選』, 卷102, 「題李佺海東耆老圖後」,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윤진영, 앞의 논문, p. 18.
  5. 5李仁老, 『東文選』, 卷102, 「題李佺海東耆老圖後」.
  6. 6Scarlett Jang, “Representations of Exemplary Scholar-Officials, Past and Present,” in Arts of the Sung and Yuan: Ritual, Ethnicity, and Style in Painting, edited by Cary Y. Liu and Dora C. Y. Ching, 38-67 (Princeton: The Art Museum, Princeton University, 1999), pp. 53-55; 오민주, 앞의 논문, pp. 6-8.
  7. 7〈수양오로도〉에 관한 연구는 上海博物馆 编, 『再读睢陽五老: 艺术史的维度』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17) 참조.
  8. 8남송대(南宋代) 작품으로 여겨지는 〈회창구로도(會昌九老圖)〉(fig. 4)는 향산구로회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영회도〉(fig. 5)는 낙양기영회를 묘사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십팔학사도’, ‘향산구로도’, ‘낙양기영회도’가 초상 입상 형식의 원본으로부터 북송대에 문인 아집의 모습으로 변화한 양상은 Scarlett Jang, 앞의 논문, pp. 43-55 참조.
  9. 9홍선표, 『고려 회화』 (한국미술연구소 CAS, 2022), pp. 136-138에서도 거문고와 바둑, 시와 술,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는 도상이 당의 ‘십팔학사도’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다만 당 ‘십팔학사도’의 원본은 초상 입상 형식이었기 때문에 송대에 변화된 ‘십팔학사도’ 도상이 〈해동기로회도〉에 적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휘종의 전칭작인 〈십팔학사도권〉(fig. 6)은 후대의 모본으로 추정되나 적어도 북송대 이후 재구성된 아집도의 원형을 간직한 예로 이해할 수 있다.
  10. 10李仁老, 『東文選』, 卷50, 「太尉公騎牛圖贊」,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태위공기우도〉는 ‘기우(騎牛)’ 도상이 노자(老子)의 고사인물화 도상이라는 점에서 최당이 자신을 노자에 빗대어 표상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홍선표, 앞의 책(2022), p. 136.
  11. 11‘기우도’ 도상에 대해서는 Wen-Chien Cheng, “Drunken Village Elder or Scholar-Recluse? The Ox-Rider and Its Meanings in Song Paintings of ”Returning Home Drunk,” Artibus Asiae 65, no. 2 (2005), pp. 309-357 참고.
  12. 12고려 말 기로회의 대표적 사례들은 李穡, 『牧隱詩藁』, 卷23, 「四月廿六日 西隣吉昌君會客 領門下曲城公 門下侍中漆原公居中面南…」; 李穡, 『牧隱詩藁』, 卷16, 「曲城 侍中 漆原 同訪西隣吉昌公 鄭鷄林旣至…」; 李穡, 『牧隱詩藁』, 卷29, 「三月廿九日 領門下漆原府院君設讌 領三司曲城府院君 守侍中鐵城府院君曲坐…」; 李穡, 『牧隱詩藁』, 卷31, 「金光秀院使邀曲城 漆原兩侍中及鄭月城 權吉昌 韓政堂 永寧君 順興君 少韓政堂及穡…」; 李穡, 『牧隱詩藁』, 卷31, 「閏月廿又四日 廣平侍中 請耆老諸公 設讌于興國里第 晚歸高詠…」; 閔思平, 『及菴詩集』, 卷2, 「耆老席上 呈大菴金相國 承澤」 참조. 이상의 사료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13. 131610년(광해군 2)에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과거에 자신의 선조인 윤지표(尹之彪, 1310~1382)와 염제신, 윤환이 기로회에서 서명을 하여 만든 축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尹根壽, 『月汀集』, 卷5, 「耆老所契屛序」,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그가 커다란 축을 보내어 보여주었는데, 우리 8대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휘(諱) 지표(之彪) 공의 직함과 성, 그리고 손수 쓴 서명이 완연하였다. 당시 모임에 참여한 곡성(曲城) 염제신, 칠원(漆原) 윤환 두 정승의 서명도 그 위에 있었는데 삼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돌려주었다.”
  14. 14李穡, 『東文選』, 卷87, 「元巖讌集唱和詩序」; 李穡, 『牧隱詩藁』, 卷28, 「穡與韓柳巷同赴曲城招漆原侍中…」; 李穡, 『牧隱詩藁』, 卷28, 「曲城府院君命工作元巖讌集圖…」;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 「忠淸道」, 報恩縣 참조. 이상의 사료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원암연집도〉에 관한 내용은 김건곤, 「高麗時代 耆老會 硏究」, 『대동한문학』 30 (2009), pp. 214-217; 홍선표, 「조선 전기의 契會圖 유형과 해외소재 작품들」, 『美術史論壇』 36 (2013), pp. 10-12 참조.
  15. 15李穡, 『牧隱詩藁』, 卷28, 「曲城府院君命工作元巖讌集圖…」.
  16. 16李穡, 『牧隱詩藁』, 卷28, 「曲城府院君命工作元巖讌集圖…」; 李穡, 『牧隱詩藁』, 卷28, 「穡與韓柳巷同赴曲城招漆原侍中…」; 李穡, 『東文選』 卷87, 「元巖讌集唱和詩序」.
  17. 17염제신과 윤환을 포함한 기로회 참석자들은 공민왕 대의 정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공통적으로 원나라와의 관계가 깊었다. 채웅석, 앞의 논문, p. 94.
  18. 18이색은 “형상을 그려 후세에 모범을 보이니 운대와 같네(圖形垂範如雲臺)”라는 시구를 지었다. 여기서 ‘운대’는 공신각(功臣閣)을 뜻하는 말로써 고려시대에 국가적 공훈을 세운 신하들을 그린 공신상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색이 “(그림 속의) 닮은 모습이 말씀을 하시려는 듯하다(肖形如欲語)”라고 읊은 것을 보면 그림 속 원로들이 실제와 닮게 그려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李穡, 『牧隱詩藁』, 卷28, 「穡與韓柳巷同赴曲城招漆原侍中…」; 李穡, 『牧隱詩藁』 卷28, 「曲城府院君命工作元巖讌集圖…」.
  19. 19〈원암연집도〉는 산수의 비중이 비교적 크고 야외 모임 장면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홍선표, 앞의 논문, p. 12.
  20. 20李穡, 『牧隱詩藁』 卷28, 「曲城府院君命工作元巖讌集圖…」. 이 그림은 일곱 명의 원로 중 염제신과 윤환만 생존해 있을 때 제작되었다.
  21. 21당시 참석자들이 지은 시는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 「忠淸道」, 報恩縣 참조.
  22. 22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4, 「贈鄭秘監而安求墨君」;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4, 「次韻丁秘監寫墨竹四榦 兼和前詩來贈 幷序」;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4, 「又以長篇二首 求墨竹與寫眞 幷序」. 이상의 사료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23. 23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은 시간 순서대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규보가 은퇴한 해가 1237년이었으며 기해년(1239년) 새해 아침에 쓴 시 이전에 초상과 묵죽화를 주문했다는 시가 실려 있으므로 그림 주문 시점은 1238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가 1237년에 치사했다는 기록은 『高麗史』, 卷102, 列傳 15, 諸臣, 「李奎報」, 고려시대 사료 DB, 2026. 4. 13. 검색, https://db.history.go.kr/id/kr_102r_0010_0020_0030.
  24. 24금기시주와 같은 시적 표현 및 회화적 도상이 기로들만이 아닌 문인 사회 일반에 관습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기로들이 기존에 존재하던 여러 시적 및 회화적 요소 중 선택적으로 이들을 활용했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여러 기로 관련 문헌 및 회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은퇴한 문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도상이 일정 부분 정형화되어 있었던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25. 25이규보의 초상은 고려시대에 감상되었던 〈백거이 초상〉이나 〈소식 초상〉과 같이 야복 또는 연거복 차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홍선표, 앞의 책(2022), p. 134 참조.
  26. 26李詹, 『東文選』, 卷77, 「獨谷散步圖記」,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27. 27李齊賢, 『益齋亂藁』, 卷9, 「白樂天眞讚」,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28. 28河崙, 『東文選』, 卷51, 「獨谷讌坐圖贊」,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별호도’에 관해서는 Anne Clapp, Commemorative Landscape Painting in China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pp. 79-110 참조. 〈독곡연좌도〉가 별호도의 성격을 지녔음을 지적하고 이를 별서도의 범주에서 논한 연구는 조규희, 「朝鮮時代 別墅圖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pp. 26-28.
  29. 29박용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통해 본 무신정권기의 사회상과 이규보의 현실 인식: 이규보의 사례를 통해 본 최씨(崔氏) 집권기 관제 운영의 실상」, 『사총』 53 (2001), p. 75.
  30. 30박종진, 앞의 논문, pp. 325-334. 기로들의 정치 참여 양상은 오치훈, 앞의 논문, pp. 16-22; 채웅석, 앞의 논문, pp. 89-96 참조.
  31. 31李仁老, 『東文選』, 卷13, 「崔尙書命樂府送耆老會侑歡」,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32. 32선행 연구에서도 고려의 기로들이 은일을 지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원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개경의 저택에 머무르며 한적한 삶을 선망하였다고 파악되었다. 즉 기로회의 활동은 은일을 전면에 내세워 현실에서 실제로 벗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관료의 세계’와 ‘은일처사의 세계’ 중간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채웅석, 앞의 논문, p. 72 참조. 고려시대 치정재추소에 관한 내용은 박상환, 『朝鮮時代 耆老政策 硏究』 (혜안, 2000), p. 127 참조.
  33. 33문인들은 ‘자연스러움(naturalness)’이라는 자아상을 시와 그림에 드러냈으나 여기에는 항상 의식적 연출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러움’이라는 이상이 오히려 가장 인위적인 구상의 결과였을 수 있다는 점을 북송대 문인의 사례를 통해 분석한 연구는 Peter Sturman, “In the Realm of Naturalness: Problems of Self-Imaging by the Northern Sung Literati,” in Arts of the Sung and Yüan, edited by Maxwell K. Hearn and Judith G. Smith, 165-188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96) 참조.
  34. 34이색은 1381년(우왕 7)의 모임에 참석하여 “여러 원로들 모두가 원나라 조정에서 은명을 받은 분들이었다”라고 하며 그들이 원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역임했음을 밝혔다. 李穡, 『牧隱詩藁』, 卷32, 「金光秀院使邀曲城漆原兩侍中…」. 채웅석, 앞의 논문, p. 94 참조.
  35. 35李穡, 『牧隱詩藁』, 卷25, 「早興聞宰樞所會議諸君. 西隣吉昌君邀同往. 不知議何事. 吟成一首」; 李穡, 『牧隱詩藁』, 卷25, 「旣至宰樞所諸君皆不至」; 李穡, 『牧隱詩藁』, 卷29, 「合坐所招耆老閑良」. 이상의 사료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고려 후기 치사 관료들의 정치적 활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정훈, 「고려 후기 致仕制 운영의 변화 양상과 원인」, 『한국사학보』 65 (2016), pp. 276-280.
  36. 36李穡, 『牧隱詩藁』, 卷31, 「閏月廿又四日. 廣平侍中請耆老諸公, 設讌于興國里第, 晚歸高詠」,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37. 37權近, 『陽村集』, 卷19, 「後耆英會序」,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박종진, 앞의 논문, p. 326.
  38. 38『太宗實錄』, 태종 2년(1402) 4월 17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태종 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의 기로회를 계승한 모임이 추진된 것은 태종 즉위 이후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켰던 신하들이 정계에 복귀하였듯이 고려의 정치적 유산을 포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태종 대의 정치적 상황은 김윤주, 「조선 태조~태종 대 정치와 정치세력」, 서울시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p. 104-107 참조.
  39. 39『世宗實錄』, 세종 10년(1428) 2월 10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40. 40『世宗實錄』, 세종 15년(1433) 2월 21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김석현, 「조선시대 기로소 영수각 조영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49 (2023), p. 38; 최경현, 앞의 논문, p. 194. 이때 세종은 이귀령의 건의를 허락하지 않았다.
  41. 41『成宗實錄』, 성종 4년(1473) 9월 9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최경현, 앞의 논문, p. 197. 이 당시 성종은 17세에 불과했으며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명회 등 세조 대부터 활약한 훈구(勳舊)들이 조정의 대소사를 실질적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강제훈, 「조선 초기 勳戚 韓明澮의 관직 생활과 그 특징」, 『역사와 실학』 43 (2010), pp. 5-43.
  42. 42『成宗實錄』, 성종 5년(1474) 3월 3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43. 43성종 18년에 한명회 등이 기영회를 결성하고자 왕의 허락을 구하자 이에 성종은 기영회의 의도를 의심하였다. 『成宗實錄』, 성종 18년(1490) 1월 19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채웅석, 앞의 논문, p. 91 참조.
  44. 44尹根壽, 『月汀集』, 卷5, 「耆老所契屛序」,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평상시에는 모임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을 책에 적어 놓는데 새 것과 오래된 것이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생초(生綃)로 만든 커다란 축(軸)에 직함을 쓰고 서명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잃어버려 남아 있지 않아 마침내 근거 삼을 것이 없어졌다.”
  45. 45『中宗實錄』, 중종 7년(1512) 9월 20일; 『中宗實錄』, 중종 29년(1534) 10월 21일. 이상의 사료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46. 46『新增東國輿地勝覽』, 卷2, 「京都(下)」,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김석현, 앞의 논문, p. 37 참조.
  47. 47『中宗實錄』, 중종 7년(1512) 9월 20일; 『中宗實錄』, 중종 7년(1512) 10월 30일; 申用漑, 『二樂亭集』, 卷8, 「香山九老圖跋」; 申用漑, 『二樂亭集』, 卷8, 「洛陽耆英會圖跋」; 申用漑, 『二樂亭集』, 卷8, 「睢陽五老圖跋」. 이상의 사료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48. 48申用漑, 『二樂亭集』, 卷8, 「香山九老圖跋」; 申用漑, 『二樂亭集』, 卷8, 「洛陽耆英會圖跋」; 申用漑, 『二樂亭集』, 卷8, 「睢陽五老圖跋」.
  49. 49李兰, 「《睢阳五老图》及其摹分」, 上海博物馆 编, 앞의 책, pp. 10-27 참조.
  50. 50조선시대에 〈수양오로도〉의 원본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고려 말에는 〈수양오로도〉의 존재가 고려 문인들에게 인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양오로도〉는 원대 문인 관료였던 주덕윤(朱德潤, 1294~1365), 조맹부(趙孟頫, 1254~1322), 우집(虞集, 1272~1348)이 감상하고 찬문을 썼으며 주덕윤의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연경(燕京)에 있던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의 만권당(萬卷堂)에서 고려 문인들과 교유하며 그림을 품평하였다. 이를 통해 〈수양오로도〉의 존재가 고려 문인들에게 알려지고 영향을 미쳤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오민주, 앞의 논문, p. 12; 王连起, 「宋人《睢阳五老图》考」, 위의 책, pp. 28-47 참조.
  51. 51申用漑, 『二樂亭集』, 卷8, 「香山九老圖跋」; 申用漑, 『二樂亭集』, 卷8, 「洛陽耆英會圖跋」.
  52. 52申用漑, 『二樂亭集』, 卷8, 「洛陽耆英會圖跋」.
  53. 53중종 재위 초반에는 “대간의 탄핵이 지나쳐 조정이 불안해지고 있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제기되었고 영의정, 우참찬, 형조판서, 병조참판이 동시에 탄핵되기도 했다. 이때 탄핵된 병조참판이 중종의 기영회도 병풍에 글씨를 쓴 강징(姜澂, 1466~1536)이다. 중종 초반 대간과 대신의 갈등에 관한 내용은 김범, 「朝鮮前期의 王權과 政局運營: 成宗·燕山君·中宗代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pp. 124-162 참조.
  54. 54『中宗實錄』, 중종 19년(1524) 4월 10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55. 55『中宗實錄』, 중종 7년(1512) 11월 16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사간원이 비판한 ‘기영회도’는 중종이 주문한 세 병풍 그림을 의미한다. 당시 이 병풍들이 진상(進上)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중종이 열람한 책과 병풍들에 대한 지적이 제기될 때 이러한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56. 56중종 재위 초에 연산군 대부터 활동한 구신(舊臣)들이 도덕적 약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받았다는 내용은 윤정, 「조선 중종 전반기 정국구도와 정책론」, 『역사와 현실』 25 (1997), pp. 141-148 참조.
  57. 57흉년이나 재해를 이유로 기영회를 중단해야 한다는 대간의 상소는 『中宗實錄』, 중종 6년(1511) 9월 4일; 『中宗實錄』, 중종 8년(1513) 2월 24일; 『中宗實錄』, 중종 17년(1522) 2월 30일; 『中宗實錄』, 중종 24년(1529) 8월 28일. 이상의 모든 사료의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58. 58『明宗實錄』, 명종 3년 9월 8일,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59. 59洪暹, 『忍齋集』, 卷4, 「題耆老會軸」, 한국고전종합DB, 2026. 4. 13. 검색, https://db.itkc.or.kr/. “시험 삼아 그림을 펼쳐 보니, 창안과 백발은 장수[壽]로서 존경할 만하네. 서대와 금대를 두른 모습은 귀하게 공경할 만하도다(試展畫而觀之, 則蒼顏白髮, 壽可尊也. 犀金橫帶, 貴可敬也).”
  60. 60〈기영회도〉의 좌목은 나주오씨금양군종중, 『국역 국재유집』 (2018), pp. 117-121 참조. 홍섬을 제외한 참석자 윤개, 김명윤(金明胤, 1493~1572), 조광원(曺光遠, 1492~1573), 오겸, 심광언(沈光彦, 1490~1568), 채세영(蔡世英, 1492~1568) 모두 기로소에 입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洪敬謨, 『耆社志』, 卷3, 丙編, 「耆臣社案」, 太祖朝至 明宗十一朝入社諸臣,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시대 법령자료, 2026. 5. 14. 검색, https://db.history.go.kr/joseon/item/level.do?levelId=jlawb_600_0030_0020_0010_0020. 이 작품은 나주오씨 금양군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소재가 불분명하다. 도판으로 수록된 작품의 사진은 대략 50~60년 전 광주춘원사진관(光州春園寫眞館)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작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신 나주오씨대종회 오형근 사무국장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61. 61기영회에 내려진 음악은 국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림에 재현된 사악 도상 또한 국왕의 후원을 상징하는 요소로 읽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明宗實錄』, 명종 2년(1547) 윤9월 22일. “후일 대신(홍언필, 윤인경, 이기)에게 궤장을 하사하시면 반드시 음악도 하사하게 될 것입니다.”
  62. 62명종 대의 궁중행사도 제작 관련 기록은 조규희, 「명종의 친정체제(親政體制) 강화와 회화(繪畵)」, 『미술사와 시각문화』 11 (2012), pp. 171-185 참조.
  63. 631584년의 〈기영회도〉가 선조의 후원을 받은 동인(東人) 계열 대신들의 자부심을 반영한 그림이라는 해석은 조규희, 「김홍도 필 〈기로세련계도〉와 ‘풍속화’적 표현의 의미」, 『미술사와 시각문화』 24 (2019), p. 132 참조.
  64. 64다카기시 아키라, 「일본 중세시대 야마토에 병풍의 전개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영회도〉 속 병풍」, 리앤원 제14회 국제학술강연회 자료집: 동아시아 미술의 융합 陶와 畵 (재단법인 리앤원, 2025. 9. 6.), pp. 7-24.
  65. 65왕이 하사한 모든 사연에 화준과 주준이 진설되지는 않았다. 기영회, 궤장하사연(几杖下賜宴), 경수연(慶壽宴), 일부 방회연(榜會宴)에서만 화준과 주준이 모두 진설되었다. 즉 화준과 주준이 모두 진설된 사연은 드물었으며 다른 행사들보다도 높은 격식의 행사였다. 안세진, 「조선 16세기 기영연(耆英宴)에 사용된 사연용(賜宴用) 화준(花樽)·주준(酒樽)의 조형 특징과 진설 방식: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東洋美術史學』 14 (2022), p. 87.
  66. 66“報得聖恩猶未了 太平治世孰懸車.” 1585년 〈기영회도〉의 원문 및 번역문은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도록 제30집: 조선시대 계회도』 (2025), pp. 206-207 참조.

참고문헌

1. 사료

  1. 『高麗史』
  2. 『東文選』
  3. 『宣祖實錄』
  4. 『成宗實錄』
  5. 『世宗實錄』
  6. 『新增東國輿地勝覽』
  7. 『仁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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