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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cholarly Basis and Artistic Characteristics of Wich’ang O Se-Ch’ang’s Seal Carvings

In-geun Soung*

* 경기대학교 파인아츠학부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 Fine Arts Faculty, Kyonggi University)

Published: June 2026·Vol. , No. 330·pp. 105-129

DOI: https://doi.org/10.31065/kjah.330.202606.004

Abstract

This study reexamines the seal carving (jeongak, 篆刻) of Oh Se-ch'ang (Wich'ang, 葦滄 吳世昌) from the perspective of “convergent scholarship and art” (統攝的 學藝) and aims to systematically investigate the academic foundations and practical structures underlying his seal carving. To this end, the study primarily examines the Wi-Chang Library (葦滄文庫) housed in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focusing on Oh Se-ch'ang‘s philological studies (文字學), epigraphy (金石學), seal-carving theory (篆刻學), and the seal albums (印譜) he collected from Korea, China, and Japan.

The study reveals that Oh Se-chang’s seal carving transcended the level of mere formal artistry and was established upon an organically integrated structure combining philological verification, the embodiment of epigraphic learning, the internalization of seal-carving theories, and bibliographical practices mediated through seal albums. In particular, he extensively collected and consulted Chinese and Japanese seal-carving treatises and seal albums, thereby deepening his scholarly understanding of the East Asian seal-carving tradition while simultaneously shaping his own views on seal art.

Oh Se-ch'ang’s seal carving demonstrates both experimental diversity and systematic coherence in terms of seal materials, scripts, stylistic forms, inscriptions, and functional usage, while also revealing the characteristic of visualized self-narrative. Furthermore, his seal carving should be understood within both the temporal continuity and the spatial expansion of tradition in modern East Asia. It exemplifies a modern mode of seal-carving practice in which scholarship and art, collection and creation, and evidential research and artistic expression were integrally combined.

This study is significant in that it reinterprets Oh Se-ch'ang’s seal carving as the product of a convrgent scholarly-artistic practice and thereby sheds new light on the character of Korean seal-carving history during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Keywords:Wich'ang Oh Se-ch'angSeal EngravingConvergent Scholarship and ArtWich'ang CollectionModern Seal Engraving

Ⅰ. 서론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로 이행하는 격동기에 서예가·금석학자·교육자·독립운동가·언론인 등 여러 정체성을 아우른 전방위적 인물이었다. 그는 구한말의 문사적 교양을 계승하면서도 근대문물의 유입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방향을 탐색한 인물로 평가된다. 위창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단순히 서예가나 전각가의 범주로 규정하기 어려우며 학예 전반에 걸친 통합적 식견과 실천을 보여준다. 그는 단절과 변동의 근대사 속에서도 전통의 구축과 현대적 계승을 도모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근대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학술·예술 환경 속에서 금석학과 서화, 전각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의 편찬은 한국 근대 서화사 및 전각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성과로 평가되며, 전각 분야에서도 다양한 인보(印譜)와 금석 자료를 수집·연구하면서 독자적인 전각 세계를 구축하였다.

위창의 전각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주로 인풍(印風)의 형성과 전각사적 의의, 『근역인수』의 편찬과 한국 전각사 정리의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김양동은 위창 전각의 연원과 특질을 정리하면서 금석학적 기반과 조형적 특성을 분석하였고, 이승연은 위창의 실학적 서예관과 전각·인보 연구를 통해 그의 학예 활동을 조명하였다. 또한 김계성은 위창 전각의 양식과 전각관을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검토하였으며, 최근에는 근대기 한·중·일 서화가 교류 속에서 위창 전각의 성격을 조명하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1

그러나 기존 연구는 현존 인보와 작품 분석에 집중된 경향이 강하며, 위창의 전각이 어떠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검토가 부족하였다. 특히 문자학·금석학·전각 이론서·인보 등 위창이 실제로 수집·활용한 자료군과 그의 전각 활동 사이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아직 미진한 실정이다.

본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위창문고(葦滄文庫)2를 중심 자료로 삼아 위창 전각의 학문적 기반과 형성 배경을 검토하고자 한다. 위창문고에는 문자학·금석학·전각학·인보 관련 서적 및 필사 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위창이 전각을 어떠한 방식으로 학습하고 이해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군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위창문고 소장 자료를 중국본·한국본·일본본으로 나누어 검토하고, 문자학 자료와 금석 자료, 전각 이론서 및 인보류가 위창의 전각관과 실제 전각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위창의 전각 작품과 인보 자료를 함께 검토함으로써, 그가 진한(秦漢) 고인(古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청대 휘파(徽派)·절파(浙派)의 전각 양식을 폭넓게 수용하였으며, 금석학적 관심을 전각의 조형성과 결합시켰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위창 전각을 단순한 개인의 취미나 기예의 차원을 넘어, 근대기 동아시아 학예 전통과 금석학적 인식 위에서 형성된 전각 실천의 한 양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Ⅱ. 위창 전각의 학문적 구조

위창의 전각은 문자학·금석학·인보 연구와 긴밀한 관련 속에서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금석학이 문자와 금석 자료에 대한 고증과 서예적 관심을 함께 중시하였던 것처럼 위창 역시 전각을 통해 문자의 조형성과 고증학의 방법론을 결합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기반에는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가 있었으며, 그의 전각관은 이러한 문헌적 기반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위창의 전각은 단순한 조형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문자학·금석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기반으로 전개된 특징을 보인다.

1. 문자학 자료의 수집과 연구

위창은 전각의 근간이 되는 문자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한자는 의미와 형체, 음운의 변천을 반영하는 역사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위창문고에 소장된 주요 문자학 관련 서적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중국본: 『허씨설문(許氏說文)』(許愼 著, 商務印書官), 『단씨설문해자주(段氏說文解字注)』(段玉裁 注, 上海 文盛書局, 1914), 『설문해자통석(說文解字通釋)』(徐繫傳 釋, 1883), 『설문통검(說文通檢)』(黎永椿 編), 『전결가(篆訣歌』(朱之蕃 攷), 『자설(字說)』(吳大徵 撰, 1893)

  • 일본본: 『문자의변천(文字の變遷)』(顧實 著, 銅牛 譯, 1928),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商周遺文會 編, 1922)

위창은 문자학 관련 자료 외에도 전각의 자원(字源)이 되는 자전류도 상당수 확보하였다. 주요한 전자(篆字) 자전을 위창문고에서 추출하면 아래와 같다.

  • 중국본: 『전자정(篆字正)』(戴明說 撰, 劉夢 參定, 1657), 『전자휘(篆字彙)』(冬偉夫 編, 多山堂, 1691), 『선집한인분운(選集漢印分韻)』(袁予三 撰, 謝雲生 摹錄, 漱藝堂 開彫, 1797), 『육서통(六書通)』(閔齊及 著, 1888), 『중정전자휘(重訂篆字彙)』(閔齊及 撰, 掃葉山房, 1920), 『금석대자전(金石大字典)』(汪仁壽 著, 永古齋, 1926), 『무전분운(繆篆分韻)』(桂廣文 著), 『종정자원(鐘鼎字源)』(王立明 書)

  • 한국본: 『전운편람(篆韻便覽)』(景惟謙, 1651), 『전대학(篆大學)』(金振興, 1663), 『전해심경(篆海心鏡)』(金振興 書), 『금석운부(金石韻府)』(許穆 書, 許進 編, 1929), 『고문운율(古文韻律)』(許穆 書, 許進 編, 1929)

위창문고에는 문자학 관련 서적과 전서 자전류가 중국본·일본본·한국본으로 분산되어 있다. 이는 위창의 문자학 학습이 단일 지역·단일 판본이 아닌 동아시아 삼국의 이본·자전군을 횡단하는 구성이었음을 보여준다. 문자학 관련 자료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다음 두 층위이다. 첫째, 『설문』 계열의 기초층으로 『설문해자통석』, 『전자휘/중정전자휘』, 『육서통』 등은 전서의 자형과 부수, 육서 체계를 다루는 기초 참고군으로 전서에 대한 계통과 이체(異體) 비교의 출발점이 된다. 특히 일본에서 발행한 문자학 관련 서적으로 『문자의변천』·『귀갑수골문자』 등이 주목되는데, 전자는 문자의 기원·구조·변천을 개괄하는 변천사적 개론으로 일본어 역주가 실려 있다. 후자는 갑골문 탁본 도판, 자형, 목록과 간단한 해독을 제공하는 초기 갑골 문자 저록(著錄) 성격의 자료이다. 둘째, 운부·분운 자료의 보조층으로, 특히 송‧명대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 정리된 『전운편람』·『전해심경』·『금석운부』·『고문운율』 등은 분운(分韻)을 전제로 한 정리라는 점에서 전서 자형을 ‘소리’의 차원과 결합해 점검하는 보조 도구로 위치한다. 이러한 문자학 관련 자료군은 위창의 문자학적 관심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전서의 자형과 문자 구조를 이해하고 전각의 기초를 학습하는 데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위창은 이러한 문자학 자료를 단순히 수장(收藏)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전서 자형의 구조와 이체의 변화, 고문자의 조형성을 이해하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는 위창 전각에서 보이는 다양한 전서 계열 문자와 고문·와당문 활용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금석학 자료의 연구와 체화(體化)

위창의 금석학은 조선 말기 청나라로부터의 영향과 함께 직접적으로는 그의 부친 오경석으로부터 전해졌다. 오경석이 금석학에 심취한 사실은 『천죽재차록』에 보이는 증언에서 확인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서화를 좋아했다. 돌아보건대, 이 좁은 나라에 태어나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어서 매양 중국 감상가의 저술을 열람할 적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계축‧갑인년(1853(철종 4)~1854(철종 5))에 처음으로 중국에 유람 가서 그곳 동남(東南)의 박아(博雅)한 선비들을 만나 본 다음 견문이 더욱 넓어지게 되어 차츰 원‧명 이래의 서화 백여 점과 삼대(三代: 夏‧殷‧周)와 진‧한의 금석과 진‧당의 비판(碑版)을 사들인 것이 또한 수백여 종이 넘었다. 비록 당‧송의 진적을 얻지 못한 것은 유감이나 이만하면 스스로 우리나라에서는 자랑할 만하게 되었다. 내가 이것을 얻은 것은 모두 수십년 동안의 오랜 세월과 천리 밖을 다니며 크게 심신을 허비한 결과이니,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3

오경석이 청나라를 오가던 시기에는 관‧사인과 봉니를 비롯하여 대량의 비판(碑版), 기물(器物), 전폐(泉幣) 등 고대유물이 출토되면서 금석학과 새인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전각학과 관련한 관·사인과 봉니는 사서(史書)를 증명하는 1차 사료로써 고문자학은 물론, 고대의 관제, 문서제도, 지명의 변천 등에 대한 증거로 활용되었다. 또한 인장의 역사와 제도, 종류, 명칭 등을 재정리할 수 있었고, 다량의 고인보를 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4

위창은 선친으로부터 이어진 금석학 자료 수집과 연구를 계승하고 확대하였다. 그에게 금석학은 단순한 서예‧고증학이 아닌 역사‧문헌학이자 조형 미학의 근거였다. 수집 범위는 중국을 넘어 한국의 고대로부터 조선시대로 넓어졌다. 한국과 중국의 금석문 수집은 문헌적 서예학의 의미와 함께 ‘새김[刻]’의 역사적 감각을 길러준 핵심 자료로 작용했다. 특히 문자 자료를 탁본으로 수집하고 이를 쌍구(雙鉤) 방식으로 재정리하며 고대 서체의 형태와 미감을 몸으로 체득하였다.5

따라서 위창의 금석 자료의 수집과 연구는 단순 열람·감상이 아닌 형체와 구조를 옮겨내며 내 몸의 쓰기/새기기 감각으로 내재화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속·석재·도질(陶質)의 표면에 남은 새김의 질감은 전각에서 칼끝의 운용을 가늠하는 실제 감각으로 환원된다. 쌍구는 고대 문자의 형태와 질감을 몸에 익히는 단계이므로 전각에서 조형과 도미(刀味)를 얻는 데 긴요하게 작용한다. 위창의 전각은 이러한 금석학적 안목과 신체적 훈련의 상호적 차원 위에서 진전된 분야로 이해되며, 금석문 연구와 전각 창작을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 영역으로 인식한 그의 예술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금석학적 연구와 쌍구(雙鉤)를 통한 고문자 학습은 위창 전각에서 보이는 와당문·고문·전폐문자 활용의 배경이 되었으며, 인면의 구성과 도미(刀味)를 형성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3. 전각학 이론서의 수집과 연구

위창은 전각의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익히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전각 전문서를 폭넓게 수집하였다. 전각학 관련 서적은 단순한 참고문헌이 아니라 전각의 논리적 토대를 형성하는 교본이었으며 그의 전각이 학문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위창문고에 포함된 전각학 관련 이론서는 중국본과 일본본이 전하며 주요한 서적은 아래와 같다.

  • 중국본: 『예림품휘(藝林品彙)』(葦滄 寫, 1925), 『전각침도(篆刻鍼度)』(陳克恕 述, 1786)

  • 일본본: 『인설(印說)』(玄巧若拙 撰, 松山堂藏板, 1916), 『전각독학(篆刻獨學)』(澁谷鐵司 編, 1881), 『관지휘례(款識彙例)』(久米邦武 著, 談書會, 1928)

우선 1925년 위창이 선별하여 등사(謄寫)한 『예림품휘』가 전한다.6 이 책은 시(詩), 사(詞), 화(畵), 인(印) 네 가지 분야의 품격론에 대한 저작 7편을 엮어 만든 책으로, 당(唐)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시품(詩品)」을 제외하면 모두 청대의 저술이다.7 이 가운데 위창의 전각과 관련하여 정정로(程庭鷺, 1796~1858)의 「인품(印品) 12칙」이 주목된다.

「인품」은 모두 12편이며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도원(導源)’은 전각 예술을 관통하는 원류에 대한 내용이다. ‘포치(布置)’ ‘박식(剝蝕)’ ‘수삭(修削)’은 전각의 형식 및 기법에 관한 내용이며, 나머지 ‘정제(整齊)’ ‘고무(古茂)’ ‘혼박(渾樸)’ ‘초발(峭拔)’ ‘창망(蒼莽)’ ‘소활(疏濶)’ ‘수치(秀緻)’ ‘참변(參變)’은 풍격과 관련한 내용이다.8 위창이 문예의 품격론에 대한 저작을 등사한 사실은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며, 특히 당시 자못 생소한 전각 관련 품격론을 여기에 포함한 사실은 그의 전각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인식의 단면을 확인시켜 준다.

중국본 『전각침도』는 진극서가 지은 전각 이론의 총람으로 문자·재료·도구·각법·인면 설계·사용·보존까지의 전 과정을 체계화한 저술이다.9 주요 장(章)의 범주는 전체(篆體)·육서(六書) 등 기본 문자 이론을 비롯하여, 전각의 필법, 장법, 모고(摹古) 등 실기적 범주를 포함하였고, 유형별 인재(印材)의 특징 및 전각 관련 공구를 다루었고 보관 방법까지 망라하였다. 위창문고가 전각·인학 관련 서적을 폭넓게 모아 이론과 실기의 통합적 틀을 갖췄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각침도』는 그 가운데서 전각의 ‘실기 표준’을 제공하는 핵심 서적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창의 전각학 관련 서적의 한 축은 일본본이다. 우선 『인설』은 일본의 승려 겐코 자쿠세쓰(玄巧若拙, 18세기)가 지은 전각 관련 전문 서적으로, 위창이 이 책을 학습했음을 장서인 〔葦滄讀〕과 〔世昌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전서의 원류와 흐름을 삼대로부터 명대까지 정리하고, 인장의 재료인 옥부터 상아까지를 다루었으며, 인장의 제작 기법인 주인(鑄印) 및 각인(刻印), 인장의 내용인 성명인(姓名印), 호인(號印), 신인(臣印), 수장인(收藏印)을 비롯하여, 전각도의 사용법 및 운용법, 인장의 끈[印綬]까지 종합적으로 다룬 저술이다. 『인설』은 18세기 일본에서 인장의 역사와 기법을 통시적으로 접근한 이른 시기의 저술로, 위창은 이러한 서적으로 전각의 이론에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10 이러한 전각 이론서와 품격론은 위창이 진한 고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전각의 양식사와 품격론을 폭넓게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로 작용하였으며, 실제 그의 전각에서 보이는 정제된 장법과 고박한 인면 구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4. 인보(印譜)의 수집과 연구

위창 전각의 통섭적 구조를 구성한 중요한 축의 하나는 바로 인보이다. 인보는 전각학에 있어 역사적 가치, 참고적 기능, 수장(收藏) 의미, 심미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인장사의 전모를 비롯하여 시기별 인장의 변모 양상 및 개별 전각가의 인풍(印風)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자 다양한 층위의 인영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전각학의 실증적 교과서이다. 위창은 인보를 단순한 수집품으로 다루지 않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활용하였다. 위창에 있어 인보의 수집과 활용은 문헌학으로서 전각의식을 반영한다. 인보를 핵심 자료로 삼아 인장의 역사, 전각의 유파, 기법과 양식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데 활용하였다. 위창문고 소장 인보를 국가별 시기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중국본, 종합인보: 『집고인보(集古印譜)』(顧從德 集‧王常 編 1572), 『고금인칙(古今印則)』(程遠 撰, 1602), 『선집한인진적(選集漢印眞蹟)』(劉栻 編, 1829), 『소석산방인보(小石山房印譜)』(顧湘‧顧浩 共編, 1831), 『홍루화영인보(紅屢花影印譜)』(李正華 編, 1900), 『봉니고략(封泥攷略)』(吳式芬‧陳介棋 共編, 1904), 『둔암진한고동인보(遯盦秦漢古銅印譜)』(吳隱 編, 西冷印社, 1914), 『동파호왕회각인보(董巴胡王會刻印譜)』(吳隱 編, 1917), 『근대명현인선(近代名賢印選)』(錢厓 編, 1925)

  • 중국본, 개인인보: 『관자득재인집(觀自得齋印集)』(趙之謙 編, 1889), 『오성유선생인보(吳聖兪先生印譜)』(吳咨 編, 1910), 『추경암인보(秋景盦印譜)』(黃易 編, 1911), 『완백산인인보(完白山人印譜)』(鄧石如 刻, 丁仁‧吳隱 審定, 1916), 『오창석인보(吳倉石印譜)』(吳倉石 編, 民國時期), 『보라가실인보(補羅迦室印譜)』(趙之琛 刻, 周鴻達 編, 1934)

  • 한국본: 『보소당인존』(申緯‧趙斗淳 編, 高宗代 改修本),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李容汶 編, 1928), 『기고재인보(嗜古齋藏印譜)』

  • 일본본: 『송석산방동인고(松石山房銅印攷)』(鄕純造 編, 中井兼之 釋, 1905), 『일본인총(日本印叢)』(山本不大 編, 1906)

위창문고에 소장된 인보는 국가별로 중국본, 한국본, 일본본 등으로 대별되며, 고인 및 동일시기 여러 성격의 인영을 모은 종합 인보와 전각 작품집 성격의 개인 인보로 구분된다. 중국본은 진한인(秦漢印)을 비롯한 고인류를 모은 인보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발행 시기별로는 명대의 『집고인보』, 『고금인칙』 등이 보이고, 청대의 『선집한인진적』, 『소석산방인보』, 『홍루화영인보』, 『봉니고략』, 민국 시기의 『둔암진한고동인보(遯盦秦漢古銅印譜)』등이 확인된다.

위창문고에 소장된 중국본 개인 인보는 주로 청대에 국한되며 그의 전각적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군이 된다. 청대는 인학이 근대적 학술 체계로 완성되어 도달한 정점이자 문인적 심미 취향이 전각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학술화’된 단계로 규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전각의 유파적 분화와 그에 따른 인풍의 차별화에 있었다. 이러한 유파 구분은 이미 청대 건륭 말년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선구자로 등석여(鄧石如, 1743~1805)와 황이(黃易, 1744~1801)가 대표적이다. 이후 가경(嘉慶), 도광(道光) 연간에 들어서면서 절파(浙派)의 위세가 본격화되고, 정경(丁敬)을 계승한 황목보(黃牧甫), 오창석(吳昌碩) 등 거장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신인풍(新印風)’이 본격화되었다.11

위창문고에 소장된 개인 인보의 수는 청대에 발간된 전체 규모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다.12 그러나 위창문고에 소장된 중국본 개인 인보는 특정 유파를 의식적으로 선별한 결과로 보인다. 핵심은 두 갈래다. 첫째, 절파(浙派, 일명 西泠系)로, 창시자는 정경(丁敬, 1695~1765)이며 이후의 황이(黃易, 1744~1801)·해강(奚岡, 1746~1803)·진예종(陳豫鍾, 1743~1818)·전송(錢松, 1787~1848)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13 위창문고의 『추경암인보』는 이 계열의 전형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절파의 양식적 규범과 금석취향의 고감(古感)을 직접 대조·학습할 수 있는 자료였다. 둘째, 등석여(鄧石如, 1743~1805)를 축으로 한 ‘등파(鄧派, 혹은 완백계(完白系)/환파(皖派)’라 불리는 계통이다. 등석여는 서(書)와 인(印)의 일체[印從書出]를 천명하고 전서의 필의(筆意)를 전각에 이입함으로써 절파의 고졸미를 넘어 서예미와 금석취향을 통합한 문인전각의 신국면을 열었다. 위창문고의 『완백산인인보』는 이러한 변화를 추적하는 핵심 텍스트로, 절파의 규범에 서예적 운필과 공간 설계를 결합하는 후기 청대의 전환점을 가시화한다.

한편 조지겸(趙之謙, 1829-1884)은 절파의 전각 전통을 계승하면서 금석학적 고증성과 서화의 문인성을 접목하여 청말의 새로운 인풍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위창문고의 『관자득재인집』은 이러한 절파→등파→금석학적 경향으로 이어지는 양식사적 이행의 실증적 단서를 제공한다. 아울러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은 청말‧민국기 전각사에서 서령 계열의 전통을 문인적 감식과 금석비학(金石碑學)의 어법으로 재구성한 핵심 인물로, 위창문고에 전하는 『오창석인보』는 청말‧민국시기 전각의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준거본이다. 요컨대 위창의 중국본 개인인보 수집은 ①절파(서령계)의 법식과 고졸미 ②등파(등석여)의 서예미적 혁신 ③조지겸을 매개로 한 금석학적 심화 ④오창석의 금석비학을 융합한 신경향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의 수집 인보는 전각가로서 위창이 학습하고 지향한 전각의 방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해 주는 핵심 증거군이 되며, 이는 단순한 희귀본 수장의 차원이 아닌 유파의 연속성과 변모를 실증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위창은 인보를 통해 중국 인장‧전각사의 유파와 지역적 특성, 인풍의 변천, 양식사 등을 비교·분석하였으며 이를 조선과 일본의 전각 전통과 연계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결국 위창의 인보 수집과 연구는 전각을 문헌·고증‧예술의 세 영역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으며, 후대의 전각가와 학자들에게 인보를 ‘감상의 대상’이 아닌 ‘연구의 근거’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14

Ⅲ. 위창 전각의 예술적 특질

1. 전각관(篆刻觀)

위창의 방대한 전각 작업과 달리 그가 전각에 대해 쓴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의 인영을 엮은 몇 권의 인보 서문과, 제자 이기우(李基雨)의 『철농인보(鐵農印譜)』 서문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위창의 인보 가운데 기년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사례인 『찬화실인보(粲花室印譜)』(1900년)에 그의 자서(自序)가 있으며, 이후로도 『철필잔영(鐵筆殘影)』(1900년경), 『위노인고(葦老印槀)』(1928년), 『오씨단전(吳氏丹篆)』(1930년) 등에도 스스로 서문을 써서 붙였다.15 서문의 내용은 대략 자신이 전각을 좋아한 사실, 진한(秦漢)을 법으로 삼은 사실, 해외에 망명하면서도 전각을 놓지 않은 사실 등으로 시기에 따른 내용의 변화는 크지 않다. 다만 그의 전각관과 관련하여 ‘진한을 법으로 삼았다’는 점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전각관을 확인하기 위한 다른 자료로, 1949년 86세의 위창은 28세의 철농을 위해 짧은 글을 써주었다. 이 글은 그로부터 23년 후이자 위창 사후인 1972년 발간한 『철농인보』16의 서문으로 실렸다. 58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창은 청년 철농의 전각이 진전하는 모습을 목도하였고, 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짧은 글에 담았다.17

“철농(鐵農) 이군(李君) 기우(基雨)는 전각 익히기를 좋아한다. 기예는 비록 정교하나 도(道)가 아직 전진(前進)되지 못했다. 나와 교유한지 여러 해에 오래된 상자의 여러 옛 인보(印譜)를 읽고 그 장법과 도법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해서 마침내 진한(秦漢)을 소급(遡及)하고 휘절(徽浙)을 포괄했으니 가히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하겠다. 그러나 다시 가슴 속에 백 천권의 와당금석(瓦當金石) 문자를 간직하고 기(氣)와 신(神)이 조화하여 득심(得心) 응수(應手)하여야만 비로소 전각의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18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위창의 전각관은 그의 인보군에 실린 서문보다 상세하며 구체적이다. 첫째, 진한을 소급하고, 둘째, 휘절(徽浙: 중국 전각의 양대 유파인 휘파와 절파)을 포괄하며, 셋째, 가슴 속에 백 천권의 와당금석 문자를 간직하며, 넷째, 기(氣)와 신(神)이 조화하여 득심응수(得心應手)하여야 전각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밝혔다. 정리하자면 소진한(溯秦漢)→ 포휘절(包徽浙)→ 흉장와당금석문자(胸藏瓦當金石文字)→ 신기조화(神氣造化)‧득심응수(得心應手)의 단계를 전각예술의 범주이자 순서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위창이 제시한 네 가지 명제를 하나하나 짚어보자.

우선 전각예술에서 진한을 법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전각이 단순한 기술적 조각이 아니라 ‘법’과 ‘도’를 함께 추구하는 분야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진한의 인장은 전각예술의 원형이자 근원이며 후대의 모든 전각이 그로부터 법맥(法脈)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각에서 ‘진한을 법으로 삼는다.’는 인식은 단순히 옛것을 모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한 고인(古印)에 담긴 형식 속에서 전각의 원형성을 찾는 태도를 뜻한다.

둘째, ‘휘파와 절파를 포괄한다.’는 명제는 단순한 유파의 선호가 아니라 전각사의 형식미·정신사·기법사를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한 핵심 문제이다. 절파는 인법(印法)의 근원 회귀로서 한인(漢印)의 복귀를 주창했다. 따라서 절파의 인풍(印風)은 질박한 조형과 칼맛[刀味]를 중시한다. 전각에서 절파의 수용은 진한 인장의 본질인 박소(朴素), 혼후(渾厚), 천연(天然)의 미를 체화하는 과정이 된다. 한편 휘파의 전각은 절파의 질박함과 달리 정제된 조형감, 섬세한 운도(運刀), 구조적 안정성이 특질이다. 휘파는 균형과 질서를 중시한 조형미를 통해 전각예술을 시각적으로 확장했다. 위창은 전각예술을 깊이 체화하려면 절파의 정신적 기골과 휘파의 조형적 정제미를 모두 체득해야 한다는 통합적 구조로 이해했다고 하겠다.

셋째, ‘가슴 속에 백 천권의 와당금석문자를 간직한다.’는 의미는 전각의 금석학적 기반과 미학적 정당성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전각은 문자예술이자 고문(古文)의 재창조이며, 금석학은 그 문자의 근원과 변천을 탐구하는 학문이므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중국에서도 청대 후기 전각사의 만개(滿開)를 장식한 정경(丁敬)·황이(黃易)·조지겸(趙之謙)·오창석(吳昌碩) 등이 모두 금석문 수집가이자 연구자였으며, 그들이 실천한 전각에서 금석학의 이식은 전각예술을 더욱 풍부하게 확장한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말한 ‘흉장와당금석문자(胸藏瓦當金石文字)’는 단순히 금석문 자료를 많이 수집하거나 감상한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마치 문동(文同, 1018~1079)의 대나무 그림을 논한 소식(蘇軾)의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畫篔簹谷偃竹記)」에 보이는 ‘흉중성죽(胸中成竹)’처럼 와당과 금석문자의 자형과 기세, 조형 감각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체화하여,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전각의 조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위창에게 금석학은 단순한 고증학적 지식이 아니라 전각 창작의 조형 감각을 형성하는 내면화된 기반이었으며, 그의 전각에서 보이는 고문(古文)·와당문(瓦當文)의 활용과 고박(古樸)한 인면 구성 역시 이러한 금석학의 체화와 긴밀한 관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넷째, ‘신기조화(神氣造化)‧득심응수(得心應手)’의 문제이다. 우선 동양 예술에서 신(神)은 형(形) 너머의 정신, 즉 예술가의 내면적 영감과 생명력을 말하며, 기(氣)는 형상을 살아 있게 하는 생동의 힘, 곧 서예의 운필(運筆)과 전각에서 운도(運刀)의 에너지와 운율감을 말한다. 즉 ‘신기조화’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예술혼이 합일하여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득심(得心)은 마음속에서 원리가 완전히 체득된 상태이며, 응수(應手)는 손(혹은 칼, 붓)의 움직임이 의식적 통제 없이 자연히 반응하는 경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득심응수’는 손이 마음의 충실한 표현 도구가 되는 예술적 자재(自在)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전각에서는 형식적 기교의 단계[工]를 넘어 정신과 수공의 일체에 이르는 자유의 경지를 지칭한다 하겠다.

요컨대 위창의 전각관은 진한의 법을 근본으로 삼고, 휘절의 유파를 아우르며, 금석의 학문을 바탕으로 신기조화‧득심응수의 경지에 나가는 데 있었다고 정리된다. 그에게 전각은 전통에 근거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법을 통해 도를 구하고, 학문을 바탕으로 예술을 확장하며, 형과 신의 합일을 추구한 통섭적 미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2. 전각의 특질

위창의 전각은 그간 두 번의 특별전을 통해 공개되었다.19 전시를 통해 현존하는 실인(實印) 약 250여 과가 공개되었고, 부친 오경석 대와 위창의 인보를 비롯하여,20 위창 수집 한‧중‧일의 인보 자료가 확인되었다. 특히 2001년 전시에서 ‘위창 전각의 연원과 특질’을 처음으로 밝힌 김양동의 논문이 도록에 실려 위창 전각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위창 전각이 갖는 특질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21

  • (1) 역매로부터 이어받은 금석문자에 관한 자료와 지식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자법을 취택하여 조형성을 극대화한 장법으로 포치한 후, 완벽하고 정확한 도법으로 작품을 완성한 점.

  • (2) 인재(印材)에 대한 전문성을 띠고 고급화하여 문방사보처럼 품격을 높임과 동시에 인재의 대소, 뉴(紐: 꼭지의 조각)와 인신(印身), 인면(印面) 형태의 다양성을 취합하여 시각적 표현 효과와 조형미를 추구하고 있는 점.

  • (3)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전서 작품 내용과 인문(印文)이 상호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것을 인식하고, 낙관의 장소가 작품 구성의 중핵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점을 한국서예사에서 가장 선구적인 실천으로 선보이고 있는 점.

  • (4) 편도각을 선호하여 깨끗하고 단정한 작풍을 띄며 고급 인재에 대한 흠결을 남기지 않는다는 생각아래 방각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이 점은 동시대 중국·일본의 전각가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양동의 정리에 더해 위창 전각의 특질은 실험성과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특히 전각의 재료가 되는 인재(印材)로부터 서체, 양식, 인문 등에서 위창은 매우 광범위한 전각 예술을 구현하였다.

1) 인재(印材)

위창이 채택한 인재는 석질이 가장 많고 그 가운데 우수한 사례로 전황석, 계혈석, 청전석 수산석, 백부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상아, 나무, 옥, 도자, 동, 대나무 뿌리 등이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지 않는 도인(陶印) 계열이 주목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에 출간된 『도인관음경(陶印觀音經)』22과 『와인심경(瓦印心經)』23 등이 주목된다. 『도인관음경』은 당시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의 전각집이며,24 『와인심경』은 승려의 법호로 보이는 오공(吾空)이 펴낸 와인 반야심경 전각집이다. 이 인보의 권두에 ‘근정(謹呈) 위창선생(葦滄先生)’이라 묵서(墨書)되어 오공이라는 인물이 위창에게 증정한 서적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는 위창이 서화계의 대표적인 인사로 부각되고 서화협회전에 왕성하게 출품하던 시기에 해당하므로 위창의 도인 전각은 대량의 도인‧와인이 제작되었던 당시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table 1).

Table 1. 〈위창의 도인(陶印) 일괄〉 A Group of Ceramic Seals by Wich'ang

seal inscription12
seal body Table 1 〈위창의 도인(陶印) 일괄〉 A Group of Ceramic Seals by Wich'ang Table 1 〈위창의 도인(陶印) 일괄〉 A Group of Ceramic Seals by Wich'ang
seal impression Table 1 〈위창의 도인(陶印) 일괄〉 A Group of Ceramic Seals by Wich'ang Table 1 〈위창의 도인(陶印) 일괄〉 A Group of Ceramic Seals by Wich'ang

2) 서체와 양식

위창 전각에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질은 서체와 양식의 다양성에 있다. 서체의 측면에서는 인전(印篆)과 무전(繆篆)이 근간을 이루지만, 상주(商周)의 금문(金文)과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고문(古文), 진(秦)의 소전(小篆) 계열이 확인된다. 이 외에도 금석자료의 영향으로 와당문(瓦當文)이나 전폐문자(泉幣文字)를 활용한 사례도 있다. 위창은 고새(古璽)를 비롯한 역대 전서 계열의 문자들을 자신의 전각에 폭넓게 활용하면서도 이를 재현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안화하여 치밀한 구성과 도법(刀法)으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도출하고 있다.

위창 전각의 양식적인 측면은 인재의 형태미와 인면의 구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각은 정방형 인재에 새기는 방식이 보편적이지만 위창의 전각에서는 방형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한 형태가 확인된다. 위창 전각의 형태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71세 때인 1934년 제작한 〈융편(融扁)〉(오천득 소장)이 있다.25 여기에 찍힌 44과의 인장 가운데 정방형은 1과밖에 없고 모두 직방형, 원형, 타원형 등이며, 옛 인장의 형태를 본딴 고새형(古璽形)을 비롯하여 와당형(瓦當形), 천폐형(泉幣形), 동전형(銅錢形), 호로형(瓠盧形) 등이 확인된다. 그 외에 인재가 갖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여 제작한 부정형도 상당수 보인다. 위창이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사구인만을 모아 찍어 형태의 다양성을 확보한 측면도 있겠지만 위창 전각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보여준다. 특히 고새, 와당, 전폐, 동전 등 고기물의 형태를 채택한 사례들은 그의 전각이 금석학적 배경 위에서 이를 전각에 적극 이식한 실험적 선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table 2).

Table 2. 〈위창 전각의 다양한 형태미〉 The Diverse Formal Beauty of Wich'ang’s Seal Engraving

styleAncient Seal FormRoof-Tile FormAncient Coin Form
seal impression Table 2 〈위창 전각의 다양한 형태미〉 The Diverse Formal Beauty of Wich'ang’s Seal Engraving Table 2 〈위창 전각의 다양한 형태미〉 The Diverse Formal Beauty of Wich'ang’s Seal Engraving Table 2 〈위창 전각의 다양한 형태미〉 The Diverse Formal Beauty of Wich'ang’s Seal Engraving
seal inscriptionO-ssi SealChinjū-am SealSuyang

3) 인문의 내용 1: 성명자호별

위창의 전각은 근대기 동아시아에서 유례없이 폭넓은 인문을 보여준다. 그는 전각을 통해 이름과 자, 호와 별호, 당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칭 체계를 통해 자아를 재구성하며, 이를 다시 용도에 맞게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복합성은 단순히 인장의 수적 다양성을 넘어 전각을 매개로 한 ‘자기언표’의 구조가 위창 예술 전반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인문의 폭넓은 변주는 위창의 정체성이 문인·예술가·학자·수장가·불교신앙인으로 교차하는 다면적 존재였음을 드러낸다.

그의 인장 가운데는 우선 본명을 활용한 사례가 보인다. 「昌無咎」는 이름의 ‘昌(창)’을 중심으로 ‘허물이 없음[無咎]’을 덧붙여 도덕적 자각을 표명한다. 또한 이름의 음을 빌려 의미를 변주한 「蛻窗」·「蛻囱氏」와 같은 인문은 소리의 유희와 의미의 전이를 통해 존재적 상징을 드러낸 예이다. 자(字)인 ‘仲銘’은 글자를 달리하여 「中銘」·「重明」 등으로 새겼으며, 음훈의 전환을 통해 자아의 중층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는 위창의 성명인이 단순한 인장이 아니라 언어적 유희이자 내적 자화상임을 보여준다.

호의 사용에서도 그의 변신은 두드러진다. 「葦滄」을 비롯해 「韋倉」·「韙傖」·「爲蒼」 등은 동일 음을 변형하거나 가차하여 자신의 호를 음운적 유희로 확장한 예이다. 더 나아가 「葦老」·「老蒼」·「老葦」·「葦叟」·「葦頭陀」 등은 ‘노(老)’·‘수(叟)’·‘두타(頭陀)’ 등의 표현을 덧붙여 세속을 벗은 은일자의 자상(自像)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호의 다양성은 자아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명명하는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table 3).

Table 3. 〈성명자호의 변용 사례〉 Examples of Variations in Personal Name and Courtesy-Name Seals

Table 3 〈성명자호의 변용 사례〉 Examples of Variations in Personal Name and Courtesy-Name Seals Table 3 〈성명자호의 변용 사례〉 Examples of Variations in Personal Name and Courtesy-Name Seals Table 3 〈성명자호의 변용 사례〉 Examples of Variations in Personal Name and Courtesy-Name Seals
Sech'ang-ssi
(『Wi Noin Ingo』)
Wich'ang
(『Wi Noin Ingo』)
Widuta
(『Wi Noin Ingo』)

별호 또한 풍부하다. 「閒道人」, 「墨傭」, 「硏田農丈人」, 「天竹齋二世居」, 「小神仙」, 「洌上布衣」, 「竟沽主人」, 「旅泊盦主」, 「古柯樵」, 「日齋道人」, 「白眠子」, 「冽上白瞑子」, 「冽上老艸衣」, 「訶顚」, 「槿域墨農」, 「後夢生」, 「仙園」, 「櫟人」, 「天隱子」, 「印心老夫」, 「竹如意老人」, 「鶴皃鷗心翁」, 「保芝外史」 등은 모두 문인적 풍류와 자조의식이 어우러진 자칭이다. 이 가운데 「白眠子」는 ‘백발의 한가한 잠꾸러기’라는 자조적 뉘앙스와 함께 불교적 무집착의 태도를 암시하며, 「印心老夫」는 전각을 마음의 수행으로 본 그의 인학적(印學的) 자각을 보여준다(table 4).

Table 4. 〈별호와 당호의 사례〉 Cases of Multiple Pseudonyms

Table 4 〈별호와 당호의 사례〉 Cases of Multiple Pseudonyms Table 4 〈별호와 당호의 사례〉 Cases of Multiple Pseudonyms
冽上老艸衣
(『Ch'ŏlp'il Ch'anyŏng』)
旅泊盦主
(『Wi Noin Ingo』)

당호를 새긴 인문은 더욱 다양하다. 「瓦全山房」, 「石經硏齋」, 「竟沽室」, 「秦篆漢畵室」, 「小琅環仙館」, 「寶鏡堂」, 「新羅石經之硯齋」, 「高句麗新羅刻石室主人」, 「長壽石軒」, 「三分三水二竹一室主」, 「粲華室」, 「粲華室葦氏」, 「木蜜山下草廬」, 「奢摩他庵」, 「如是觀」, 「竹緣齋」, 「一漚居」, 「眞住庵」, 「劍虹堂分篆記」, 「高臥草堂」 등은 모두 서재와 거처의 이름이자 정신적 공간의 표상이다. 특히 「여시관」은 불교적 사유를 담은 당호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위창의 모습을 반영한다. 또한 「石經硏齋」·「秦篆漢畵室」·「寶鏡堂」·「新羅石經之硯齋」·「高句麗新羅刻石室主人」 등은 금석학자로서 위창의 정체성을 드러낸다(table 5).

Table 5. 〈금석학자로서 당호를 새긴 사례〉 Cases of Engraving Studio Names in the Capacity of an Epigrapher

Table 5 〈금석학자로서 당호를 새긴 사례〉 Cases of Engraving Studio Names in the Capacity of an Epigrapher Table 5 〈금석학자로서 당호를 새긴 사례〉 Cases of Engraving Studio Names in the Capacity of an Epigrapher
Koguryŏ Silla Kaksŏksil Chuin
(『Wi Noin Ingo』)
Silla Sŏkkyŏng ŭi Yŏnjae
(『Wi Noin Ingo』)

요컨대 위창의 전각은 이름과 호, 당호를 넘나드는 언어적·사상적 변주를 통해 예술가의 다층적 자아를 형상화한 자전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서예가·전각가·금석학자·불교신앙인이라는 상이한 자아가 공존하며 하나하나의 전각으로 형상화한다.

4) 인문의 내용 2: 용도별

위창 전각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질은 용도에 따른 기능적 분화와 체계성에 있다. 그는 고서화·금석·서간·장서·작품 등 각각의 활동 영역에 맞추어 전용의 인장군(印章群)을 구성하였다. 이는 전각이 단순한 자기 표식이 아니라 학예 전반을 포괄하는 ‘자기 체계’로 작동하였음을 보여준다.

우선 문장의 초고나 시초(詩草)에 찍은 「葦滄吟艸」는 자필 원고의 창작성을 나타낸다. 작품의 연대와 연령을 명시한 「韋倉六十歲後作」(1923, 60세), 「閒道人年六十以後所作」, 「六十一翁」(1924, 61세), 「甲子老人」(1924, 61세), 「再周甲子之年居然七十開一」(1934, 71세) 등은 시기별 예술 활동을 기록하기 위한 기년인(紀年印)으로 전각을 개인 연보의 지표로 활용한 사례이다.

소장한 서화에 찍은 「吳韋倉珍藏書畫記」, 「吳世昌所藏」, 「靑氈舊物」 등은 전형적인 수장인(收藏印)으로 수장가로서 위창의 위상이 드러나며, 「吳世昌所撫吉金樂石文字記」, 「吳氏世昌鑑藏金石文字印」, 「曾經吳世昌眼」, 「韋倉審定」, 「葦滄寓目」 등은 그가 감정한 금석문과 서화를 대상으로 한 감정인(鑑定印)이다. 이러한 인장들은 위창이 단순한 수집가를 넘어 근대기 최고의 감식가였음을 반증한다(table 6).

Table 6. 〈수장‧감식가로서의 전각 사례〉 Examples of Seal Engraving as a Collector and Connoisseur

Table 6 〈수장‧감식가로서의 전각 사례〉 Examples of Seal Engraving as a Collector and Connoisseur Table 6 〈수장‧감식가로서의 전각 사례〉 Examples of Seal Engraving as a Collector and Connoisseur Table 6 〈수장‧감식가로서의 전각 사례〉 Examples of Seal Engraving as a Collector and Connoisseur
O-ssi Sech'ang Kamjang Kŭmsŏk Munja In
(『Ch'anhwasil Inbo』)
Ch'ŏngjŏn KumuI
(『Wi Noin Ingo』)
Chŭnggyŏng O Sech'ang An
(『Ch'ŏlp'il Ch'anyŏng』)

자신이 직접 임서한 글씨에는 「吳世昌所臨金石文字」, 직접 탁본한 금석에는 「韋倉手拓金石」을 사용하였다. 또한 「葦滄藏書」, 「冽水吳氏小琅環室藏書印」, 「吳氏秘笈」 등은 그의 장서인(書藏印)이다. 이 밖에도 「閒道人墨戱」, 「吳世昌近作詩書畫印」은 자작 서화에 찍기 위해 특별히 새긴 인장으로 보이며, 「冽上白眠子緘」, 「葦滄頓首白牋」, 「吳緘」 , 「以手代口」 등은 서신용 봉함인(封緘印)으로 기능하였다(table 7).

Table 7. 〈봉함인의 사례〉 Examples of Envelope Seals

Table 7 〈봉함인의 사례〉 Examples of Envelope Seals Table 7 〈봉함인의 사례〉 Examples of Envelope Seals
Yŏlsang Paengmyŏnja Ham
(『Ch'anhwasil Inbo』)
Wich'ang Tonsu Paekchŏn
(『Ch'anhwasil Inbo』)

위창의 전각은 여러 활동 영역으로 구분되는 동시에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호칭의 다양화로 자아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용도의 분화로 학예의 체계를 구분하였다. 동일 인물로서 창작자·수장가·감정가·서화가·금석학자·신앙인의 다층적 정체성을 각기 다른 인장으로 표상하였다. 요컨대 위창의 전각은 단순한 표식의 도구가 아닌 자신의 삶과 예술 행위를 종합한 하나의 예술 문법이라 할 수 있다.

Ⅳ. 결론

위창 오세창은 근대기 동아시아 학예 전통 속에서 문자학·금석학·전각학·인보 연구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며 전각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위창문고에는 중국·일본·한국의 문자학 및 금석학 관련 문헌, 전각 이론서와 인보류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위창의 전각이 단순한 기예의 차원을 넘어 문자와 금석, 서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연구 결과, 위창의 전각은 크게 네 가지 층위의 학예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그는 한·중·일의 문자학 서적과 자전류를 폭넓게 연구하며 전서의 자형과 구조, 이체의 계통을 이해하였다. 둘째, 부친 오경석으로부터 이어받은 금석학 연구와 고문자 학습을 실천적으로 체화함으로써 금석취향의 조형 감각을 전각에 이식하였다. 셋째, 중국과 일본의 전각 이론서와 품격론을 수집·등사하며 전각의 양식사와 미학적 범주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넷째, 한·중·일의 인보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함으로써 진한 고인으로부터 청대 유파 전각에 이르는 인풍의 흐름과 장법의 변화를 학습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위창은 ‘소진한(溯秦漢)·포휘절(包徽浙)·흉장와당금석문자(胸藏瓦當金石文字)·득심응수(得心應手)’로 이어지는 전각관을 형성하였으며, 그의 전각은 문자학·금석학·서예학이 통합된 조형 실천으로 전개되었다.

아울러 위창에게 인보는 단순한 수장의 대상이 아니라 역대 인장의 장법과 인풍, 인문을 비교·연구하기 위한 실증적 자료였다. 이러한 관심은 『근역인수』의 편찬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조선시대 사인을 집성·체계화한 한국 인학사의 대표적 성과로 평가된다. 특히 위창은 중국과 일본의 인보 편찬 방식과 금석학적 연구 방법을 참고하면서 한국 인장을 문헌적·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위창의 전각과 인보 편찬 활동은 단순한 개인의 취미나 수장 활동이 아니라, 근대기 동아시아 학예 전통 속에서 한국 전각사를 재구성하고 체계화하려는 학문적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본 연구는 위창문고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전각의 학문적 기반을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현존 실인(實印)의 제작 시기와 양식 변화, 동시대 한·중·일 전각가들과의 영향 관계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다. 향후 위창의 실인과 인보 자료를 보다 정밀하게 비교·분석함으로써 근대기 동아시아 전각 교류와 위창 전각의 양식사적 위치를 더욱 구체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Notes

  1. 1위창 전각에 대한 주요 연구로는 김양동, 「위창(葦滄) 전각의 연원과 특질」, 예술의 전당 編, 『한국서예사 특별전―위창 오세창』 (2001); 이승연, 『葦滄 吳世昌의 實學的 書藝觀 硏究』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김계성, 『葦滄 吳世昌 篆刻 硏究』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김소영, 「19세기 말~20세기 초 한(韓)·중(中) 서화가들의 교류와 오세창(吳世昌)의 전각(篆刻)」, 『가족과 커뮤니티』 창간호 (2020); 이안나, 「일제강점기 인장을 통해 본 한·일 서화가의 교류」,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9집 (2025) 등이 있다.
  2. 2오세창의 장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1947년 ‘개인문고 1호’로 설치되었으며, 1972년 정식으로 ‘위창문고’라는 개인문고 명칭이 부여·지정되었다. 위창문고 목록은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 엮음, 『국립중앙도서관 선본해제 Ⅷ』 (2006)에 수록되어 있다.
  3. 3오세창, 「오경석 조」, 『국역 근역서화징』 下 (시공사, 1998), p. 1013.
  4. 4성인근, 「조선후기 印譜의 유입과 제작 양상」, 『역사와실학』 38호 (2009). p. 126.
  5. 5오세창의 쌍구본은 중국 자료로 《鐘鼎瓦當銘文臨摹原稿》일괄(오일육 소장), 《篆書六曲屛雙鉤案》(오일육 소장) 등이 있다. 『書之鯖』(국립중앙도서관)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 금석문을 대상으로 한 쌍구본이며, 김정희의 예서를 쌍구한 『阮堂隷古觀止帖』(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고대 금석문 雙鉤塡墨本이 현존한다.
  6. 6이 책의 표지 제목 아래에 ‘乙丑仲夏謄本’이 위창 자필로 필사되어 있어 1925년(61세)에 등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책의 판심에 해당하는 부분에 ‘韙傖鈔書之箋’이라는 표식이 인쇄되어 있으며, 본문 1면에 〔冽水吳氏小琅嬛室藏書印〕과 마지막 면에 〔葦蒼藏書〕가 찍혀 있어 위창 자필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7. 7수록된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詩品: 唐 司空圖 24則, 淸 袁枚 32則. 詞品: 淸 郭麐 12則, 淸 楊伯夔 12則. 畵品: 淸 黃鉞 24則, 淸 許乃穀 24則. 印品: 淸 程庭鷺 12則.
  8. 8『예림품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홍혜진, 「『藝林品彙』 연구」, 『중국학보』 97 (2021) 참조.
  9. 9『전각침도』의 초간본은 1786년 간본이며 이후 1877년 재간본이 확인된다. 현대의 영인으로는 중국서점(1984) 간행본도 있다. 위창문고 소장본은 1786년 초간본이다.
  10. 10위창문고본은 아니지만 이 외에도 겐코 자쿠세쓰의 전각 관련 저술 『석화인설(石華印說)』(도호쿠대학교 부속도서관 카노문고(狩野文庫) 소장(청구기호: 5/16249/1)이 확인된다. 전각의 이론을 다룬 해설서로 진한(秦漢) 고인(古印)의 원류를 거슬러 전각을 부흥시킬 것을 제창한 저술이다. 특히 ‘진한 고인 연구를 전각 발전의 근거로 삼는다.’는 주장은 위창이 진한의 고인을 인장의 종주로 삼았던 관점과 맞닿아 참조용 문헌으로 의미가 있다.
  11. 11陳振濂, 「中國印譜史硏究導論」, 西泠印史出版社 編, 『中國印譜史圖典(上)』 (杭州: 2011), p. 49.
  12. 12한천형(韓天衡, 『中國印學年表』 (上海書畫出版社, 1987))은 명·청·민국에 걸친 전체 인보 수를 약 1,400종으로 파악하며, 그 중 청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였고, 진진렴(陳振濂, 『中國印譜史圖典(上) (西泠印社出版社, 2011))은 청대 인보의 폭발적 증가를 지적하면서 건륭연간 이후 개인인보의 간행 수는 명대의 5배 이상에 달한다고 언급하였다.
  13. 13이들은 항주(杭州) 서호 일대의 교유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후대에 ‘서령팔가(西泠八家)’로 집칭되었고, 진한 고인을 원천으로 한 고졸·강건한 인풍과 치밀한 장법을 중시하였다.
  14. 14한국전각협회 초대회장 청강 김영기(1911~2003)는 『한국인사전집(韓國印史全集)』 발간을 위해 한국의 주제별 인보 총 165권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엮은 전집은 발간되지 못했고 거질의 인보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집의 서문으로 작성해 둔 글에서 김영기는 “광복이후 중국, 일본 등 국가에는 이 인장의 체계화 연구가 이미 성립되었으나 우리 한국엔 이가 아직 이루지 못했음을 탄식하던 나머지 오세창 선생의 『근역인수』에서 자극을 받아 본격적으로 이 연구에 착수한 것이다.”라고 기술하여 한국 전각의 수집과 체계화의 영향을 오세창으로부터 받았음을 적시하였다.
  15. 15개별 인보의 서문은 김양동, 앞의 논문, p. 225~256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16. 16이 인보는 보진재(寶晉齋)에서 1972년 500부 한정판 3권으로 간행하였다. 철농이 그간 새긴 전각 중에서 1,125과를 수록한 한국 최대의 개인 인보로 평가된다.
  17. 17성인근, 「철농 이기우의 삶과 작품세계」, 이천시립월전미술관 編, 『철필휘지: 철농 이기우의 글씨와 새김』 (2021), p. 12.
  18. 18이기우, 『鐵農印譜』 (寶晉齋, 1972) 跋文. “鐵農李君基雨, 耽習篆刻, 技雖精而道未進. 從余游者有年, 讀敝篋諸古譜, 悟其章法刀法之奧妙. 遂溯秦漢而包徽浙, 卽可自名一家. 然更須胸藏百千卷瓦當金石之文字, 氣與神化, 得心應手, 迺爲治印上乘也. 己丑中春 八十六翁 吳世昌”
  19. 19예술의 전당 編, 『위창 오세창: 역매‧위창 양세의 학문과 예술세계』 (1996); 예술의 전당 編, 『위창 오세창: 전각‧서화감식‧콜렉션』 (2001).
  20. 20오경석대의 인보

    1. 『해주오씨인보(海州吳氏印譜)』 1책, 오경석(吳慶錫) 37과, 유홍기(劉鴻基) 16과, 오천득 소장.

    2. 『천죽재인정(天竹齋政) 1책, 오경석 63과, 오경림(吳慶林) 12과, 오천득 소장.

    3. 『석년인정(石年印政) 1책, 오경윤(吳慶潤) 35과, 이창현(李昌鉉) 2과, 미상 3과, 오일육 소장.

    4. 『몽화루인보(夢華樓印譜) 1책, 이창현 50과, 오일육 소장

    오세창의 인보

    1. 『찬화실인보(粲花室印譜)』 1책, 1900년 自序, 오천득 소장.

    2. 『철필잔영(鐵筆殘影)』 1책, 1900년경 자서, 오천득 소장.

    3. 『위노인고(葦老印槀) 3책, 1928년 자서, 오천득 소장.

    4. 『오씨단전(吳氏丹篆)』 1책, 1930년 자서, 오천득 소장.

    5. 『위창인보(葦滄印譜)』 1책, 연도 미상, 한상봉 소장.

    6. 『수우단전(酬雨丹篆)』 3책, 연도 미상, 타인에게 새겨준 인장 모음, 오천득 소장.

    7. 『오씨인집(吳氏印集)』 1책, 연도미상, 오천득 소장.

    ※ 오경석대와 위창의 인보에 대해서는 『위창 오세창: 역매‧위창 양세의 학문과 예술세계』(예술의전당, 1996)에 상세한 해제가 있고, 『위창 오세창: 전각‧서화감식‧콜렉션』(예술의전당, 2001) 김양동의 논문에는 인보의 해제와 함께 서문의 번역문이 실려 있다.

  21. 21김양동, 앞의 논문, p. 227.
  22. 22加藤知良 編, 『陶印觀音經』, 1925년 이후, 장서각 (청구기호 PC10E).
  23. 23吾空 編, 『瓦印心經』, 국립중앙도서관 (위창古433-59).
  24. 24인보에 실린 總持 石禪이 쓴 서문에 의하면 제작자 加藤知良은 조선에 이주한 농민 출신 불자로, 병든 아내와 딸을 잃은 뒤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466과의 陶印 觀音經을 새겨 경성의 曹洞宗 사찰에 봉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5. 25〈융편(融扁)〉, 오천득 소장. ‘融扁’이라 고전(古篆)으로 쓴 글씨의 상하좌우 여백에 다양한 각풍의 인영 44과를 배치하였다. 위창의 수많은 자각인 가운데 길상(吉祥), 감계(鑑戒)를 비롯한 사구(詞句)를 새긴 인장들로 구성하였으며, 좌측 하단에 ‘오씨새(吳氏璽)’ ‘창무구(昌無咎)’ ‘위창장(韋倉章)’ 등을 찍어 자신의 작품임을 나타냈고, 마지막에 ‘갑술칠십일옹(甲戌七十一翁)’을 찍어 제작연대를 나타냈다.

참고문헌

1. 한국어 문헌

  1.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 편, 『국립중앙도서관 선본해제 Ⅷ』, 국립중앙도서관, 2006.
  2. 김계성, 「葦滄 吳世昌 篆刻 硏究」,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3. 김소영,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중 서화가들의 교류와 오세창의 전각」, 『가족과 커뮤니티』 창간호,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0, pp. 111-142.
  4. 김양동, 「위창(葦滄) 전각의 연원과 특질」, 예술의 전당 編, 『한국서예사특별전: 위창 오세창』, 2001, pp. 225-256.
  5. 성인근, 「조선후기 印譜의 유입과 제작 양상」, 『역사와실학』, 역사와실학회, 2009, p. 126.
  6. _____, 「철농 이기우의 삶과 작품세계」, 이천시립월전미술관 編, 『철필휘지: 철농 이기우의 글씨와 새김』, 2021, p. 12.
  7. 예술의전당, 『위창 오세창: 역매‧위창 양세의 학문과 예술세계』, 1996.
  8. _____, 『위창 오세창: 전각‧서화감식‧콜렉션』, 2001.
  9. 오세창 편, 『槿域印藪』, 국회도서관, 1968.
  10. _____, 홍찬유 감수, 동양고전학회 국역, 『국역 근역서화징』, 시공사, 1998.
  11. 이기우 편, 『鐵農印譜』, 寶晉齋, 1972.
  12. 이승연, 「葦滄 吳世昌의 實學的 書藝觀 硏究」,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3. 이안나, 「일제강점기 인장을 통해 본 한·일 서화가의 교류」,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9집,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25, pp. 7-42.
  14. 홍혜진, 「『藝林品彙』 연구」, 『중국학보』 97권, 한국중국학회, 2021, pp. 223-264.

2. 동양어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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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陳振濂, 「中國印譜史硏究導論」, 西泠印社出版社 編, 『中國印譜史圖典(上)』, 杭州: 2011, p. 49.
  3. 韓天衡, 『中國印學年表』, 上海: 上海書畫出版社, 1987.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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