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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Se-ch’ang and the Collecting of Joseon Painting and Calligraphy in Colonial Korea: Focusing on the Collections of Pak Yŏng-ch’ŏl and Chŏn Hyŏng-p’il

Kyung-hwa Lee**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Senior Research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본고는 2024년 11월 규장각한국학국제심포지엄 및 2025년 12월 역사문화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보완하였다. 두 발표 및 본고의 심사 과정에서 많은 조언을 받았으며 덕분에 오류를 바로잡고 논리적 정합성을 보완할 수 있었다. 제안 받은 의견을 최대한 논고에 반영하고자 하였으나 지면과 시간적인 제약으로 충분히 담지 못하였다. 오세창에 관한 고견을 공유해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별도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Published: June 2026·Vol. , No. 330·pp. 131-165

DOI: https://doi.org/10.31065/kjah.330.202606.005

Abstract

O Se-ch’ang(1864-1953) was a pioneering enlightenment thinker, independence activist, calligrapher, and leading intellectual of Korea's modern era. As the compiler of Geunyeok seohwi (Compiled Calligraphy of Korea) and Geunyeok hwahwi (Compiled Paintings of Korea), he exerte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shaping of traditional Korean art collections during the transitional period into modernity. O actively engaged in the collecting practices of his contemporaries directly in the field. However, despite his extensive influence, his role behind the scenes of the antiquities trade remains difficult to discern from today's perspective. By synthesizing scattered records including colophons (jebal) inscribed on artworks, contemporary publications, and the reminiscences of collectors, this study reconstructs O's activities and delineates his specific roles. In particular, it delineate O’s role by focusing on the collecting practice of Pak Yŏng-ch’ŏl and Chŏn Hyŏng-p’il, the two representative collectors in the colonial era who amassed grand-scale art collection under O’s guidance.

The 1930s, when Pak and Chŏn were most active, marked the “Golden Age” of the antiquities trade. Behind the burgeoning market lay a historical shift in which Korean collectors emerged at the forefront to establish monumental collections. As they built their new collections of traditional Korean painting and calligraphy, O provided a foundational bedrock by transferring ownership of his own prized pieces. Furthermore, rooted in his profound erudition, he offered the professional connoisseurship and authentication required by these collectors. At the center of network for art collecting, he also served as an intermediary, thereby catalyzing the formation of these collections. Ultimately, O’s multifaceted role carried profound significance for cultural transmission, preserving the rich tradition of collecting traditional Korean painting and calligraphy and passing it down to modern collectors. In this regard, O Se-ch’ang truly epitomized the “master of collecting traditional Korean painting and calligraphy.”

Keywords:O Se-ch’ang (Oh Se-chang)Kŭnyŏk sŏhwiKŭnyŏk hwahwiConnoisseurshipTraditional Paintings and Calligraphy Collection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21S1A5B5A16077116).

Ⅰ. 서론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 1903~1974)는 식민지 시기에 조선백자를 수집한 대표적인 수장가의 한 명이다. 백자에 심취하여 이를 수집하여 온 50여 년의 과정을 돌아보며 박병래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서화를 수집하였던 경험을 회고하였다. 그는 서화 감정은 도자기보다 어려운 점이 많아 반드시 ‘위창 선생께서 틀림없는 물건이니 차지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에 한하여 갖기로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이때 박병래가 거론한 위창 선생은 당대의 서예가였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을 가리킨다. 그는 동시대에 오세창의 지도를 받으며 서화를 수집한 대표적인 수장가로서 누구보다 다산 박영철(多山 朴榮喆, 1879~1939)을 손꼽았다.1

위창 선생을 모시고 서화를 수집한 사람으로서 다산 박영철 씨가 떠오른다. 호남의 큰 부자였던 그는 지금 경기고교의 정문 맞은편에 넓은 터전을 사서 여러 채의 양옥을 짓고 여러 친구와 교유하며 세월을 보냈는데 위창 선생도 그 집에 출입하면서 감정을 해주었다.

박영철은 식민지 시기에 조선상업은행장을 지낸 수장가였다. 박물관 설립을 염두에 두었던 그는 1930년대 동안 고서화 수집에 열중하며 수장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박병래의 글을 통해서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오세창이 지식과 안목을 갖춘 전문가로서 조력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오세창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조선말의 문명개화운동(文明開化運動)을 이끈 사상가이자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fig. 1). 선행 연구에 따르면 오세창의 생애는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된다.2 첫 번째는 역과에 합격하는 1879년(16세)까지의 성장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유대치(유홍기)(劉大致(劉鴻基))라는 인물에게 교육받았다.3 유대치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유길준(俞吉濬, 1856~1914) 등 뛰어난 사대부가의 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며 이들의 개화사상이 형성되는 데 실질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오세창이 보였던 사상가이자 운동가적인 면모는 유홍기에게서 비롯한 부분이 컸을 것이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47세) 이전까지로 관료인 동시에 개화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펼쳤던 시기이다. 1902년에 발생한 ‘개화당 사건’으로 오세창은 오랜 기간 일본에 망명해야만 했다.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조선의 국운이 기울던 이 시기에 오세창은 정치적 격동의 중심에 있었다. 세 번째는 1910년부터 사망에 이르는 1953년까지로 문화 활동에 전념한 시기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오세창은 언론인으로 활약하며 개화운동을 펼쳤으나 한일병합 이후로는 이러한 활동은 거의 단절되었다. 정치적 활동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오세창은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약 3년간의 복역 생활을 겪은 후에는 오직 서예가이자 저술가로서의 삶에 전념하였다.

〈오세창〉 Portrait of O Se-ch’ang (Konggongnuri, https://www.kogl.or.kr)
Fig. 1. 〈오세창〉 Portrait of O Se-ch’ang (Konggongnuri, https://www.kogl.or.kr)

한국미술사에서 오세창에 대한 평가는 바로 1910년 이후 나타난 미술계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이 시기에 편찬된 한국 미술사의 저작이었다. 오세창은 1,117명의 서화가에 관한 역대 문헌을 집성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과 서화가 850여 명의 인장을 모은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였다.4 현재까지도 미술사 연구의 입문서이자 필수서로 활용되는 두 서적은 한국미술사의 형성기에 인식의 근간을 마련해준 일종의 학술서이다. 동시에 서화 감식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참고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병래의 증언은 오세창의 역할이 자료의 집대성과 서적의 편찬 같은 명시적인 영역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고서화 매매의 현장에서 수장가들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이면에서 모종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본 연구는 식민지 시기에 개인 수장가들의 고서화 컬렉션이 형성되는 과정에 작용하였던 오세창의 역할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오세창이 지닌 독보적인 지식과 이력을 고려하면 고서화들이 역동적으로 이동하며 새로운 컬렉션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그가 모종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그려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고서화의 매매나 감정과 같이 서화 수집의 이면에 놓인 활동은 뚜렷한 기록을 남기기 어렵다. 수장가들도 거래에 관한 체계적인 기록을 남긴 경우가 드물었다. 이처럼 현재의 시각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오세창의 활약은 일화와 여담의 영역에서 회자되며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수집된 유물에 남긴 기록에서 오세창의 활동상을 추출할 수 있다. 동시대에 발간된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도 유의미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제발문, 신문, 잡지, 도록, 수장가들의 회고담 등 단편적으로 산재하는 다양한 성격의 문헌을 종합적으로 검토·분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근래에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대기 고서화 컬렉션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오세창의 활약상을 크게 고서화의 수집과 양도, 감정·감식 활동, 그리고 중개자라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재구성할 것이다. 서화 수집이라는 다층적인 실천 행위를 수집하고 개념화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이러한 한계를 전제하되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하여 당대에 오세창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독보적인 컬렉션을 형성하였던 박영철과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수장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오세창의 역할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5

Ⅱ. 조선고서화의 수집과 양도

1. 《근역서휘》와 오세창의 조선고서화 수집

식민치하의 고위 관료이자 실업가였던 박영철은 생전에 대수장가로 손꼽혔던 고미술 수집가였다.6 박영철의 사후에 유족들은 그의 유지에 따라 115점의 고미술 수집품과 2만원의 기금을 경성제국대학에 ‘다산문고(多山文庫)’라는 이름으로 기증하였다.7 지금은 서울대학교박물관의 수장품으로 전하는 박영철의 기증 유물 중 입수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로서 우리나라 역대 인물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휘(槿域書彙)》가 있다. 역대 회화를 모은 《근역화휘(槿域畫彙)》와 더불어 《근역서휘》를 처음 엮은 인물은 바로 ‘오세창’이었다(fig. 2).

오세창 편, 《근역서휘》 1책, O Se-ch’ang ed., Kŭnyŏk sŏhwi Vol. 1, 1916, 39.5×26.5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2. 오세창 편, 《근역서휘》 1책, O Se-ch’ang ed., Kŭnyŏk sŏhwi Vol. 1, 1916, 39.5×26.5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오세창은 동시대 수장가들의 고서화 수집에 조력하기에 앞서 스스로 광범위한 서화를 수집하였던 수장가였다. 그의 수집을 대표하는 《근역서휘》를 통해서 수장가로서 오세창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근역서휘》는 35권의 서첩과 여기에 수록된 모든 필자의 이름과 신원을 정리한 두 권의 《근역서휘인명고(槿域書彙人名考)》를 포함하여 37권으로 구성되었다. 35권의 서첩은 《근역서휘》 본첩 23권을 중심으로 정학교(丁學敎, 1832~1914)의 표제,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축화, 김응원(金應元, 1855~1921)의 축문 등이 수록된 수책(首冊) 1권을 비롯하여, 재속(再續) 2권, 삼속(三續) 3권, 사속(四續) 2권, 오속(五續) 4권으로 구성되었다. 35권은 한 시기에 성첩된 것이 아니었다. 《근역서휘》의 중심인 본첩 23권은 1911년에 1차로 완성되었으며 별권으로 만들어진 수책과 12권의 속집은 이후에 증보된 것이었다.8 본첩 23권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의 금니사경으로 시작하여 오세창 자신의 발문으로 끝을 맺으며 모두 693명의 필적이 차례로 배열되었다. 증보된 수책과 말미의 12권에는 426명의 필적이 수록되었다. 종합하면, 《근역서휘》에는 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역사적 실존 인물 1,119명의 필적이 망라되어 있다.

《근역서휘》의 본첩 23권은 통일신라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순서를 따라 배열되었다. 편성 체재를 살펴보면 한 면에 필적 1점, 혹은 좌우로 나누어 2점을 배치하였다. 각 면 상단에는 필자의 이름, 자호, 생년과 관직 등 인적 사항을 첨부하였다(fig. 3). 이후로 재속, 삼속, 사속, 오속은 속첩별로 독립적인 구성을 가지되, 전반적인 체재는 본첩을 따랐다. 35권 전체에 걸쳐 1인당 1점의 필적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중복되는 인물은 발견할 수 없다.9 내용 면에서 보면 본첩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편성하였으며, 반면에 속첩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마지막의 오속에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활약한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수록되었다. 이러한 서첩의 편성 방식은 《근역화휘》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

김생, 〈범망경〉, Kim Saeng, Pommanggyong, Kŭnyŏk sŏhwi Vol. 1, Leaf 1, Unified Silla, gold ink on paper, 22.6×9.0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3. 김생, 〈범망경〉, Kim Saeng, Pommanggyong, Kŭnyŏk sŏhwi Vol. 1, Leaf 1, Unified Silla, gold ink on paper, 22.6×9.0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근역서휘》를 감상한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오세창의 서화 수집을 ‘가전(家傳)의 사업’이라 하였다.10 이것은 오세창의 서화 수집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친 오경석(吳慶錫, 1831~1879)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미술가이기에 앞서 개화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의 학문과 사상은 오경석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fig. 4). 역관으로서 누구보다 빈번하게 중국을 드나들었던 오경석은 박제가(朴齊家, 1750~1805),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상적(李尙迪, 1804~1865) 등 19세기 이후 조청 교류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물들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입수한 새로운 문물과 서적을 조선에 소개하며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아울러 오경석은 스스로 상당한 수준의 서화를 구사한 서화가로서 서화 감식에 조예가 깊었으며 막대한 서화의 수장가로 알려져 있다. 오경석이 오세창의 서화 인식과 이를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서화 수집에 미친 영향은 상당할 것이다. 이 때문에 오세창의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는 오경석의 수장품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오경석〉 Portrait of O Kyŏng-sŏk, taken in the 1850s (Sŏnggyun-kwan Taehakkyo Pangmulgwan, Pyŏkch’igwangjak, p. 31)
Fig. 4. 〈오경석〉 Portrait of O Kyŏng-sŏk, taken in the 1850s (Sŏnggyun-kwan Taehakkyo Pangmulgwan, Pyŏkch’igwangjak, p. 31)

오경석은 수장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수집한 서화의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오세창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던 시기에 집안에 전승되던 수장품의 상당 부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오경석의 수장품 관련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수집가로서의 측면이 규명되고 있다.11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소장된 『천죽재서목(天竹齋書目)』, 『천죽재구장목록(天竹齋舊藏目錄)』 및 『천죽재고장금석서화연기(天竹齋攷藏金石書畫硯記)』는 오경석이 작성한 수장품 목록으로서 막대한 수집품의 규모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fig. 5). 오경석의 수장품 목록에서 관찰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 대부분이 중국의 서화와 전적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오경석의 수집 대상이 중국의 서화에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선 말기의 여항 화가인 전기(田琦, 1825~1854)와 교유하며 서화 감식을 익혔던 것으로 전하며 전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는 본래 오경석을 위하여 제작된 것이었다(fig. 6).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은 오경석이 작성한 일종의 서화 비평으로서 다수는 조선 서화를 대상으로 작성되었다.12 그 중에는 오경석이 안평대군(安平大君, 1318~1353)의 글씨, 혹은 이정(李霆, 1554~1626)의 묵죽도를 소장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가 상당한 수량의 조선 서화를 소유하였던 상황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오경석을 조선 서화의 애호가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장품 목록의 내용으로 보건데, 오경석은 중국 서화를 애호하고 집중적으로 수집했던 인물로 이해된다. 반면에 오세창의 저술과 수집품은 조선 서화에 집중되어 있어 두 수장가가 서로 다른 서화관과 수집의 지향점을 가졌음이 드러난다.

『천죽재구장목록』, O Se-ch’ang ed., Ch'ŏnjukchae Kujang Mongnok, 21.5×13.7cm, National Museum for World Writing System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5. 『천죽재구장목록』, O Se-ch’ang ed., Ch'ŏnjukchae Kujang Mongnok, 21.5×13.7cm, National Museum for World Writing System (Photography by the author)
전기, 〈매화초옥도〉, Chŏn Ki, Maehwa ch’ook-do, 19th century Chosŏn, Light color on paper, 32.4×36.1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6. 전기, 〈매화초옥도〉, Chŏn Ki, Maehwa ch’ook-do, 19th century Chosŏn, Light color on paper, 32.4×36.1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한 언론의 보도에서 오세창은 스스로 조선 서화를 수집하는 이유에 관하여, “십수 년 이래로 조선 고래(古來)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아 있지 않음을 개탄하여, 자본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東購西買)하여 수집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13 오세창이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를 편찬한 일차적인 목적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고서화를 보존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사회적으로 조선 서화의 존재와 가치를 알리고 관심을 환기하는 데 있었다. 오세창이 《근역서휘》를 엮으며 취한 수집 방식은 조선 서예사를 정립하고 보존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근역서휘》에 수록된 필적 중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이른바 ‘작품’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다수는 문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서간과 짧은 시문들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고려의 서희(徐熙, 942~998)와 강감찬(姜邯贊, 948~1031)처럼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포함되어 일각에서는 오세창의 감식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4

이처럼 일상적인 필적들은 《근역서휘》의 수집 목적을 예술적 맥락으로 한정하기 어렵게 한다. 오세창에게 고서화 수집의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근역서휘》에 수록된 방대한 필적은 역사적 인물들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역대 인물들이 직접 작성한 필적은 그들의 존재와 삶을 증명하는 물질적 기호이다. 따라서 이들은 후대와의 교감 속에서 역사적 기억을 매개하는 장치로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비록 진위는 불분명하더라도 외세를 물리치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던 서희와 강감찬과 같은 인물들이 수집품에 포함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오세창은 아마도 조선 서화의 보존은 곧 역사의 보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오세창의 서화 수집이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을 전후해서 시작된 점, 그리고 서화첩에 공히 사용된 ‘근역(槿域)’이라는 명칭은 오세창의 이런 의도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결국 오세창에게 조선 고서화의 수집이란 단지 심미적 차원의 활동이 아니라 역사 서술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2. 《근역서휘》와 《근역화휘》의 양도

오세창이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를 모두 완성한 시기는 1916년 무렵이었지만, 1915년 이미 언론에서 이들을 소개할 만큼 그의 서화첩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15 1916년 두 서화첩의 완성 소식을 접한 한용운은 3일 연속으로 오세창을 방문하여 이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그 감상 경험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였다(fig. 7).16 ‘고서화(古書畵)의 삼일(三日)’이라는 제목으로 5회에 걸쳐 게재된 한용운의 글은 오세창의 고서화 수집과 두 서화첩의 내용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오세창을 방문하는 첫날 한용운은 자신을 ‘서화배척당(書畵排斥黨)’이라 칭하며, 자신의 방문이 서화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인의 수택(手澤)을 접하고자 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서화의 열람을 마친 뒤 그는 “그 나라의 고물(古物)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말로 글을 맺으며 극적인 인식의 전환을 드러냈다. 한용운은 오세창이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를 엮는 동안 서화의 원본을 취합하기 위하여 2배의 가격으로 구입하기도 하였고 타인의 기증을 받기도 하였으며 빌린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동시에 아무리 먼 곳이라도 서화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며 고서화를 수집하는 오세창의 고군분투를 증언하였다. 이처럼 많은 공력을 들여 수집한 서화였지만 결국 이들은 동시대의 새로운 수장가들에게 양도되었다.

한용운, 「古書畵의 三日」, Han Yong-un, The Three Days for the Appreciation of Old Paintings and Calligraphy, Maeil Sinbo, 1917.12.07.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nl.go.kr)
Fig. 7. 한용운, 「古書畵의 三日」, Han Yong-un, The Three Days for the Appreciation of Old Paintings and Calligraphy, Maeil Sinbo, 1917.12.07.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nl.go.kr)

「고서화의 삼일」의 기록과 앞서 설명한 현재 서첩을 비교하면 그 구성과 내용 사이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한용운이 감상한 《근역서휘》는 본첩 23축에 추가적으로 더해진 속(續) 5축, 재속(再續) 2축, 삼속(三續) 3축, 사속(四續) 2축의 12축을 더하여 모두 35축, 즉 35권으로 구성되었으며 1,100여 편의 필적이 수록되어 있었다. 다산문고의 《근역서휘》는 《근역서휘 인명고》 2권을 제외하면 35권으로 일견 동일한 수량이다. 그러나 양자를 비교하면 다산문고본에서는 1916년 당시의 ‘속 5축’에 해당하는 부분이 사라졌으며 수책 1권과 오속 4권의 5권이 더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35권의 서첩은 낱장으로 파첩되었으며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반면에 두 권의 《근역서휘인명고》는 원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마지막에서 박영철이 기록한 부전지(附箋紙)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 기재된 《근역서휘》의 입수 시기는 ‘1931년 5월’이다(figs. 8, 9). 한용운이 오세창을 방문한 1916년부터 약 15년이 경과한 1931년 무렵에 이들은 박영철에게 양도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서첩의 일부는 새롭게 편성되었다. 수책과 오속을 제외한 30권은 한용운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며 오세창이 편성한 체재를 간직한 것으로 확인된다. 주목되는 부분은 마지막의 오속 4권이다. 오속은 장황에 사용된 재료, 별지를 사용한 인적 사항의 기입 방식 등 서첩의 만듦새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지녔다. 수록된 서간은 19세기 이후 인물들로 한정되며 그 중에는 박영철이 《근역서휘》를 소장한 이후인 1932년과 1935년의 서간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편성 방식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미루어 오속 4권은 박영철이 《근역서휘》를 양도받은 후 새롭게 부가된 부분으로 판단된다.

《근역서휘 인명고》, Kŭnyŏk sŏhwi Inmyŏnggo, 1931,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8. 《근역서휘 인명고》, Kŭnyŏk sŏhwi Inmyŏnggo, 1931,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근역서휘 인명고》 부전지, Kŭnyŏksŏhwi Inmyŏnggo Pujŏnji, 1931,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9. 《근역서휘 인명고》 부전지, Kŭnyŏksŏhwi Inmyŏnggo Pujŏnji, 1931,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다산문고에는 《근역서휘》 외에 천(天)·지(地)·인(人) 3권으로 이루어진 《근역화휘》가 포함되어 있다. 3권의 화첩에는 각각 25점, 21점, 21점 등 총 67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figs. 10, 11). 《근역서휘》와 마찬가지로 이들 화첩은 파첩된 상태로서 입수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각 그림은 흰색 태지에 부착되었으며 그 곁에는 화가의 이름과 호가 간략하게 적혀 있다. 화첩의 편성 방식을 살펴보면 천권(天卷)의 첫 면인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의 〈산수도〉에서 지권(地卷)의 마지막 면인 김용수(金龍洙,1901~1934)의 〈연지도(蓮池圖)〉까지는 화가의 활동 시기를 따라 배열되었다. 반면에 조중묵(趙重默, 생몰년 미상)에서 시작하여 유재소(劉在韶, 1829~1911)로 마치는 인권(人卷)은 19세기 화가들의 그림으로 구성된 별도의 화첩이라는 성격을 지닌다.17 기존에 다산문고의 《근역화휘》는 오세창이 《근역서휘》와 함께 양도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6년 한용운이 기록한 《근역화휘》와 비교하면 구성과 내용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근역화휘》, Kŭnyŏk hwahwi, 43.5×32.5㎝,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0. 《근역화휘》, Kŭnyŏk hwahwi, 43.5×32.5㎝,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이도영, 〈해도〉, 《근역화휘》 지권, Yi Toyŏng, Haedo, Kŭnyŏk hwahwi Chikwŏn, 1929, Light Color on Paper, 20.8×33.0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ed., Kŭnyŏk hwahwi, 2014, p. 99)
Fig. 11. 이도영, 〈해도〉, 《근역화휘》 지권, Yi Toyŏng, Haedo, Kŭnyŏk hwahwi Chikwŏn, 1929, Light Color on Paper, 20.8×33.0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ed., Kŭnyŏk hwahwi, 2014, p. 99)

한용운이 감상했던 《근역화휘》는 모두 7축이었으며 화가 199(191)인의 그림 250화(畵)가 수록되어 있었다. 오세창의 지도를 받았던 수장가인 전형필의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근역화휘》 7책본은 한용운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체재를 보인다(fig. 12).18 이 화첩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2~1374)의 〈양도(羊圖〉에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묵란〉에 이르는 244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었다. 각 면에는 1~2점의 그림이 부착되어 있으며, 우측 상단에는 화가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제7책에 수록된 오경석의 선면 산수화에는 ‘선군자(先君子),’ 즉 ‘부친’이라 표기되어 7책본의 인적 사항을 오세창이 직접 적었음을 알 수 있다(fig. 13). 전형필이 《근역화휘》를 입수한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고서화를 수집하였던 1930대에 입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근역화휘》 7책 전권에는 모두 이순명(李淳命)이라는 인물의 소장인이 남겨져 있다. 이순명은 중인 계층의 족보를 엮은 『성원록(姓源錄)』의 저자인 이창현(李昌鉉, 1850~1921)의 아들로서 오세창과 인척간이었다. 이순명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수장가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수장인을 통해 전형필이 이순명을 거쳐 오세창의 《근역화휘》를 입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 및 수장 이력으로 미루어 간송미술관의 《근역화휘》는 오세창이 엮은 7책을 그대로 입수한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기록과 많은 차이를 지닌 다산문고본의 경우는 별도의 화첩으로서 박영철이 직접 엮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9

오세창 편, 《근역화휘》 7책본, O Se-ch’ang ed., Kŭnyŏk hwahwi 7-Volume Edition, 1916, 41.7×28.3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12. 오세창 편, 《근역화휘》 7책본, O Se-ch’ang ed., Kŭnyŏk hwahwi 7-Volume Edition, 1916, 41.7×28.3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Photography by the author)
오경석, 〈추색청산〉, O Kyŏng-sŏk, Ch’usaek ch’ŏngsan, 1852 Chosŏn, Ink on Paper, 17.8×49.8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13. 오경석, 〈추색청산〉, O Kyŏng-sŏk, Ch’usaek ch’ŏngsan, 1852 Chosŏn, Ink on Paper, 17.8×49.8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Photography by the author)

간송미술관에는 7책본 외에도 천·지·인의 편성을 갖춘 3책본, 현대첩 1책본 등 3종의 《근역화휘》가 소장되어 있다(fig. 14). 다산문고와 간송미술관의 3종 《근역화휘》를 비교하면 동일하게 천·지·인으로 구성된 3책본은 유사한 체재를 보인다. 두 화첩은 제목을 공유할 뿐 아니라 표지에 부착된 제첨의 글씨 역시 동일한 필치로 보인다.20 두 화첩의 공통점은 양자가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제작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마지막의 현대첩 1책은 ‘근역화휘’ 및 ‘현대첩’이라는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7)의 제첨이 부착되었다. 현대첩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화첩에는 20세기 초에 활약한 화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근역서휘》 현대첩(좌) 및 《근역서휘》 3책본(우), Kŭnyŏk hwahwi Hyŏndaech’ŏp (left) and Kŭnyŏk hwahwi 3-Volume Edition (right), 41.7×28.3cm (left) and 45.0×34.2cm (right),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14. 《근역서휘》 현대첩(좌) 및 《근역서휘》 3책본(우), Kŭnyŏk hwahwi Hyŏndaech’ŏp (left) and Kŭnyŏk hwahwi 3-Volume Edition (right), 41.7×28.3cm (left) and 45.0×34.2cm (right),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Photography by the author)

동일한 명칭을 가진 4종의 《근역화휘》 중 오세창이 직접 엮은 7책본과, 박영철이 역은 다산문고본 외의 2종은 제작 시기와 주체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4종의 화첩은 ‘근역화휘’라는 오세창 고유의 명칭을 공유하며 오직 조선 회화만으로 구성되는 등 유사한 편성 체계를 지녔다. 유사한 형식을 지닌 여러 화첩에서 오세창의 《근역화휘》가 당시의 수장가들에게 고서화 수집과 화첩 제작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박영철은 《근역서휘》 35책을 소장한 이후 추가적인 필적을 모아 4권의 《근역서휘별집(槿域書彙別集)》을 엮었다.21 그 외에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는 《근역서휘총고(槿域書彙總考)》라는 7권의 서첩이 전하고 있다.22 오세창 또한 1,136명의 필적을 모아 34책의 《근묵(槿墨)》을 엮기도 하였다. 《근역화휘》뿐 아니라 《근역서휘》 또한 새로운 서첩 제작의 본보기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오세창이 엮은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는 박영철과 전형필이라는 근대의 수장가들의 소장이 되었다. 그들은 오세창의 고서화 수집과 서화첩 편성 방법을 전범으로 삼아 새로운 서화첩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두 수장가가 오세창의 서화첩을 양도받은 1930년대는 다수의 조선인 수장가들이 고서화 수집의 전면에 등장하여 새로운 한국 미술의 컬렉션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오세창은 당시의 유력한 수장가들에게 자신을 대표하는 수집품을 양도하며 새로운 컬렉션이 성립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오세창이 확립한 조선 고서화 수집의 전통은 근대의 서화 수장가들에게 계승되어 갔던 것이다.

Ⅲ. 고서화의 감정과 감식

박영철이 고서화 수장가로서 기반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오세창의 《근역서휘》는 그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었을 것이다. 그의 컬렉션 형성에서 오세창의 역할은 소장품의 양도에 그치지 않았다. 박병래는 “위창 선생은 박영철의 집에 출입하면서 감정을 해주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오세창이 서화 구입에 필요한 감정을 도맡아 주었음을 의미한다.

박병래 자신 역시 오세창의 도움을 받으며 고서화를 수집하였다. 일반적으로 박병래는 백자 수집가로 알려져 있으나, 동시에 백여 점에 이르는 서화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서화 감정은 도자기보다 어려웠으며 수집가들은 위작을 구입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는 서화를 구입할 때면 반드시 오세창의 감정을 거쳐 ‘틀림없는 물건’이라는 확답을 받은 경우에만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박병래가 소장한 서화의 태반은 오세창의 권유를 받아 구입한 물건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박병래는 상당한 수량의 서화를 수집하였지만 그 선택과 구입이 전적으로 수장가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세창의 의사에 따라 구입한 서화가 대다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오세창의 선택은 단순한 조언의 차원을 넘어 컬렉션의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23

오세창과 함께 서화를 구입한 수집가로서 그의 역할을 더욱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인물은 전형필이다.24 박병래는 전형필의 경우에 대하여, “간송도 물론 상당한 감식안을 가진 분이었으나 서화를 살 때만은 반드시 위창 선생의 의견을 듣고 난 다음에 결정하였다. 그래서 작가는 확실하나 낙관이나 자서가 없는 경우에는 위창 선생이 새로 제를 쓰는 일도 있었다.”라고 하였다.25 전형필은 스스로 고서화에 관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수장가였지만 그 역시 오세창이라는 전문가의 안목에 의지하였다. 이러한 검증 과정은 수준 높은 진품을 구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위작을 매입할 위험성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전형필이 서화를 구입하며 오세창의 의견을 따르는 태도는 여타의 수장가들에서 확인되는 바와 유사하다. 한편 오세창은 자신의 조언을 받아 구입하였으나 낙관과 제발이 없는 작품에는 새로운 제발을 적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형필이 설립한 간송미술관의 작품에 남은 오세창의 제발을 통해서 이 전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26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김정희의 작품 중 한대 동경의 명문(銘文)을 임서한 〈고예경명(古隷鏡銘)〉에서 박병래가 의미한 바를 찾을 수 있다(fig. 15). 1935년 전형필은 이 작품을 구입하고 오세창에게 감정을 요청하였다. 작품을 살펴본 오세창은 “완당고예일품(阮堂隷古逸品)”이라는 제목 하에 장문의 글을 적어 작품의 마지막에 첨부하였다.27

김정희, 〈고예경명〉(우) 및 오세창, 〈완당예고일품〉(좌), Kim Chŏng-hŭi, Koye kyŏngmyŏng (right) and O Se-ch’ang, Wandang yego ilp’um (left), Chosŏn 19th century (right) and 1935 (left), 38.5×69.4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Choe Wansu, Chusa myŏngp'um, pp. 120-121)
Fig. 15. 김정희, 〈고예경명〉(우) 및 오세창, 〈완당예고일품〉(좌), Kim Chŏng-hŭi, Koye kyŏngmyŏng (right) and O Se-ch’ang, Wandang yego ilp’um (left), Chosŏn 19th century (right) and 1935 (left), 38.5×69.4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Choe Wansu, Chusa myŏngp'um, pp. 120-121)

옥정연재(玉井硯齋) 주인이 이 글씨를 가져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완당 선생이 한나라의 경명을 집구하여 임서한 것인데, 선생의 예서 중 가장 뛰어난 득의필(得意筆)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니 마땅히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전에 선생께서 다른 사람에게 글씨를 써 줄 때 매번 쓰는 즉시 주었다. 사람들은 여기에 관서를 붙이거나 인장을 요청하였다. 선생이 웃으면서, “나의 글씨를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온 세상이 모두 나의 글씨가 기괴하고 험악하여 남들과 같지 않다고 나무란다. 내 글씨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옥정연재 주인은 전형필이다. 오세창은 이 글씨가 김정희의 고예(古隷)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하고 전형필에게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당부하였다. 그 뒤를 이어 김정희의 일화 한 편을 적었다. 그것은 김정희는 생전에 자신의 글씨에 의도적으로 낙관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가 낙관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풍만으로도 누구나 자신의 글씨임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세창이 이 일화를 적은 이유는 〈고예경명〉이 바로 서화가의 낙관이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서화의 진위를 판단하는 현장에서 낙관의 유무는 일차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오세창은 〈고예경명〉의 진위 판단은 낙관의 유무가 아니라 서풍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서화계의 권위자인 오세창의 제발은 비록 낙관이 없어도 이 글씨가 김정희의 진적임을 보증하는 일종의 증명서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고예경명〉의 사례에서 ‘낙관이나 자서가 없는 경우에 위창이 제를 썼다.’는 전언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오세창의 제발이 지닌 또 다른 역할을 간송미술관 소장의 〈호고연경(好古硏經)〉이라는 대련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fig. 16).28 ‘호고연경’이란 “옛 것이 좋아 때로는 깨진 비갈을 찾고 경전 연구 여러 날에 시 읊기를 파한다(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는 구절을 적은 예서대련(隷書對聯)으로 김정희의 만년기 서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예경명〉과 달리 이 대련에는 관서가 남아 있어 작품이 제작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대련의 여백에는 ‘석파 선생, 즉 이하응(李昰應, 1821~1898)에게 보이기 위하여 쓴다.’는 방서(傍書)가 적혀 있다. 오세창이 〈호고연경〉의 보관 상자에 적은 글을 보면, 먼저 겉면에는 “완당이 예서로 써서 석파에게 선물한 대련(阮堂隷贈石坡對聯)”이라 적혀 있다. 그 상자의 안쪽에는 “호고연경은 누구의 문구인지 모르겠으나 완당이 즐겨서 이를 썼다. 나는 일찍이 서너 틀의 대련을 보았는데, 이 예서 대련이 석파와 관계되어 그런지 가장 마음을 두고 썼다[着意作].”라는 제발이 적혀 있다.

김정희, 〈호고연경〉, Kim Chŏng-hŭi, Hogo yŏngyŏng, Ink on paper, 129.7×29.5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Choe Wansu, Chusa myŏngp'um, p. 198)
Fig. 16. 김정희, 〈호고연경〉, Kim Chŏng-hŭi, Hogo yŏngyŏng, Ink on paper, 129.7×29.5cm,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Choe Wansu, Chusa myŏngp'um, p. 198)

오세창이 제발을 적은 기축년은 해방 이후인 1949년이다. 오세창은 이미 3~4점의 유사한 대련을 본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증명하듯 현재 리움미술관에는 동일한 구절을 적은 유사한 작품이 전한다(fig. 17). 리움미술관본의 〈호고연경〉은 ‘죽완(竹琬)’이라는 미상의 인물을 위하여 적은 것으로 그 필법이 사뭇 다르다. 오세창은 전형필의 소장본을 여타의 본과 비교하여, ‘착의작(着意作)’이라 평가하였다. 이는 서화의 평어로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기에 일견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유사한 용어인 득의작(得意作)이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을 의미한다는 점에 비추어, 착의작은 최고의 기량은 아니어도 충분한 진정성을 담은 작품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오세창의 평가는 리움미술관본에 다소 미치지 못하는 간송미술관본의 격조를 충분히 보완하고 그 의의를 제고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정희, 〈호고연경〉, Kim Chŏng-hŭi, Hogo yŏngyŏng, Ink on paper, 124.7×28.5cm, Leeum Museum of Art (Choe Wansu, Chusa myŏngp'um, p. 199)
Fig. 17. 김정희, 〈호고연경〉, Kim Chŏng-hŭi, Hogo yŏngyŏng, Ink on paper, 124.7×28.5cm, Leeum Museum of Art (Choe Wansu, Chusa myŏngp'um, p. 199)

다산문고에는 오세창이 작품에 직접 제발을 남기거나 표제, 상서 등을 적은 작품이 드문 편이다. 그중 비교적 장문의 발문이 적힌 경우로서 〈신라왕정계비탁본(新羅王定界碑拓本)〉이 있다(fig. 18).29 ‘신라왕정계비’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로 알려진 신라 고비(古碑)의 하나로서 6세기 중반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을 무렵 영토 확장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박영철이 소장한 탁본은 함경남도 함흥군 황초령에 있었던 비석의 탁본이다. 1938년 북경을 방문한 박영철은 유리창(琉璃廠)에서 이 탁본을 구입하였다. 서울에 돌아온 후 탁본의 하단에 부착된 오세창의 제발을 받았다. 〈신라왕정계비탁본〉에 관한 박영철과 오세창의 기록을 대조해 봄으로써, 오세창이 전개한 감식 활동의 본질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30

〈신라왕정계비탁본〉, Sillawang jŏngkyebi t’akpon, Chosŏn 19th century, Ink on paper, 227×57.8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ulhu ŭi kirok, p. 251)
Fig. 18. 〈신라왕정계비탁본〉, Sillawang jŏngkyebi t’akpon, Chosŏn 19th century, Ink on paper, 227×57.8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ulhu ŭi kirok, p. 251)

신라 진흥왕 순수비 중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 세 곳이다. 첫째는 이원 만덕산비, 둘째는 함흥 황초령비, 셋째는 양주 북산비인데, 이는 함흥비의 탁본이다. 서체는 육조 해서의 법도를 따르고 있으며, 필치가 굳세고 힘 있다. 청나라 강남해(康南海: 강유위)가 지은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서 이 글씨에 관해 평하기를, ‘기이하고 고아하며 소박하고 두터워 마침내 고품(高品)의 반열에 들었다.’고 하였으니, 대개 중국 사람들이 이 비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깊었다. 약산 김상공이 연경에 사신 갔을 때 이 탁본을 가지고 가서 동예감(董藝龕: 동문찬)에게 주었다. ⋯⋯ 다산 인형(仁兄)이 봄 사이에 북경을 유람하고 이 족자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나를 찾아와 이를 보여주며 제사를 부탁하였다. 왕헌(王軒)과 번빈(樊彬) 두 선생은 모두 나의 선친과 교유하였으며 시를 쓴 간독이 상자에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또 이 글을 읽으니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더구나 박상공이 임신년 연행할 때 선친 또한 동행하였다. 이 탁본을 대하고 어루만지며 옛 생각에 잠기니 저절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세창의 제발은 진흥왕순수비의 금석학적인 가치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이 탁본이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사정을 기록하였다. 제발 중단의 작은 글씨는 탁본과 관련된 명사들의 인적 사항이다. 오세창은 중국에서 이 탁본을 감상하고 발문을 남긴 문사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인물별로 기록하였다. 제발의 마지막에서는 선친인 오경석이 이 탁본을 소장하고 글을 남긴 문사들과 교류하였음을 강조하며 마무리하였다.

오세창의 글은 탁본의 소유자인 박영철의 글과 대조를 이룬다. 박영철은 유리창에서 탁본을 구입한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수장가로서의 관심을 담았다. 반면에 오세창의 글은 황초령비 탁본의 금석학적인 가치와 탁본의 개별적인 내력을 설명하며 그 역사와 가치를 밝히고 있다.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서화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밝히는 오세창의 제발은 ‘감정’이기보다 ‘감식(鑑識)’이라 정의할 수 있다. 감정과 감식은 서로 통용되는 개념으로서 사실상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그러나 오세창의 제발에 대한 보다 정밀한 논의를 위하여 두 용어의 사용 방식을 비교해 보면, 감식은 객관적인 근거 위에서 판단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으며 일종의 고증(考證)의 과정을 포함한다. 반면에 감정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행위에 폭넓게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감식과 비교하여 감정은 상대적으로 보다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판단을 포함하는 식별 행위라 할 수 있다.31 이러한 구분을 적용해 보면 다양한 문헌적·금석학적 지식을 근간으로 〈신라왕정계비탁본〉의 가치를 다각적으로 설명하는 오세창의 제발은 수준 높은 감식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오세창이 식민지기 유력한 수장가들의 서화 수집 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감식 능력에 대한 두터운 신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서화 감정가인 서방달(徐邦達, 1911-2012)은 고서화를 감별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 축적된 경험뿐 아니라 실사구시의 과학적 태도를 꼽았다.32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미술품이 지닌 미묘한 차이를 간파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오랜 경험과 훈련을 통해 형성된 ‘안목’이다. 그러나 동양 서화의 정밀한 판단을 위해서는 감각적인 통찰에 더하여, 특별히 화가·소장자·감상자가 남긴 인장과 제발, 장황의 재료와 형식, 그리고 감상자들이 만들어온 역사적 내력 등 전문적인 정보에 기초한 고증학적인 분석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역대 문헌 자료에 근거한 축적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이와 같은 지식에 기반한 고서화 감식의 측면에서 오세창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서화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를 엮는 동시에, 역대 문헌을 조사하여 서화와 서화가의 기록을 모은 『근역서화징』, 그리고 인장 정보를 망라한 『근역인수』를 편찬하였다. 서화가 1,117명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문헌 정보가 망라된 『근역서화징』은 한국 서화사의 외연을 그리고 연구 기반을 구축한 역사서였다.33 광범위한 서화 지식의 편찬자로서 오세창의 감정과 감식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상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반면에 20세기 초의 사회 변동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수장가들이 조선 고서화의 감정과 감식을 위한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기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들이 지닌 오세창을 향한 신뢰는 조선 고서화의 전통에 대한 지식과 축적된 경험 위에 형성된 것이었다.

Ⅳ. 고서화 네트워크의 중개자

박영철이 141점의 역대 인물의 필적을 모아 엮은 《근역서휘별집》 4책의 마지막에는 정만조(鄭萬朝, 1858~1936)의 글을 포함하여 당시 명사들의 서간과 필적이 수록되어 있다.34 정만조의 글은 1931년 가을에 적은 것으로서 이듬해인 1932년 박영철의 한시를 모아 출간된 『다산시고(多山詩稿)』의 서문으로 작성된 것이었다.35 이 책에 수록된 동시대 명사들의 필적 사이에서 오세창이 박영철에게 보낸 서간 한 편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fig. 19).36

오세창, 〈서간〉, 《근역서휘별집》, O Se-ch’ang, A Letter to Pak Yŏng-ch’ŏl, Kŭnyŏk sŏhwi pyŏlchip, 1931, Paper, 22.6×17.8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Kŭnyŏk sŏhwi pyŏlchip, p. 286)
Fig. 19. 오세창, 〈서간〉, 《근역서휘별집》, O Se-ch’ang, A Letter to Pak Yŏng-ch’ŏl, Kŭnyŏk sŏhwi pyŏlchip, 1931, Paper, 22.6×17.8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Kŭnyŏk sŏhwi pyŏlchip, p. 286)

어제 방문하시어 남겨 놓은 향기가 지금도 짙게 우러나고 있습니다. 다시 보내 주신 편지가 도착하였으니 받들어 읽고 감사하는 마음 깊습니다. 영광스럽게 불러주시는 분부가 있으면 마땅히 달려가 모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모아 놓은 서화는 이미 눈앞을 지나간 구름과 안개가 되었으나 마음에 담아 둘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상하고 논하는 자리는 저 스스로 부끄럽고 얼굴에 땀이 나서 사람을 마주 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이 편벽된 마음을 용서해 주시면 지극히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저의 못난 글씨 축이 완성되었으므로 말씀하신 대로 형께 올립니다. 마침 감정을 요청받은 ‘완당(阮堂)’의 글씨가 있는데, 이는 바로 별세하신 해에 쓴 것입니다. 형께서 만일 생각이 있으시다면, 글씨의 주인에게 보여드리게 할 것이니, 하교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아우 세창은 머리를 조아립니다.

박영철은 자신이 소장한 서화를 감평하는 자리에 오세창을 초대하였으나 그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신을 보냈다. 서간의 발신일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서간이 수록된 『별집』 4책의 전후에 병렬된 동시대의 필적은 1931년의 연대를 지니고 있다. 오세창의 서간은 박영철이 가장 많은 고서화를 입수한 시기인 1931년을 전후하여 작성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오세창이 이 서간을 보낸 또 하나의 목적은 제3자가 소장한 김정희의 몰년 작품을 박영철에게 소개하고 감상 기회를 주선하는 것이었다. 그가 소개하는 작품이 김정희의 글씨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문고 내에는 김정희의 서화가 9건 포함되어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개별 유물 외에 《근역서휘》 및 《근역화휘》에도 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다산문고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소장 여부가 확인되는 작품도 다수이다. 1930년에 개최된 〈조선고서화진장품전람회(朝鮮古書畵珍藏品展覽會)〉의 출품작 목록에서 박영철이 김정희의 〈난혜(蘭蕙)〉 2폭, 〈예서병풍(隸書屛風)〉 8폭, 〈난(蘭)〉 1폭을 소장하였음이 확인된다. 그 외에도 박영철의 응접실에 걸린 김정희의 〈계산무진(溪山無盡)〉 편액을 보았다는 기사가 전하며, 1938년 12월 개최된 〈조선명보전람회(朝鮮名寶展覽會)〉에는 〈애호(艾虎)〉라는 김정희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37 이러한 소장의 면면을 보면 박영철은 김정희의 서화를 애호하였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다산문고에 포함된 김정희의 작품들은 부전지를 포함한 경우가 적어 정확한 입수 시기와 그 경위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앞서의 서간은 그가 오세창과 같은 전문가의 소개와 권유를 받으며 김정희의 작품을 수집하는 과정을 충분히 그려보게 해준다.

박병래도 오세창의 권유로 글씨를 구입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는 “좋은 물건이 있으니 박군이 차지하라.”는 오세창의 연락을 받고 서화를 구입하였다. 그것은 청조의 문사인 옹수곤(翁樹崑, 1786~1815)이 신위(申緯, 1769~1845)에게 보낸 그림의 발문이었다.38 이러한 사례를 미루어 오세창이 수장가들에게 서화를 소개하고 구입을 주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행간에 나타나는 오세창의 역할은 미술품 거래의 직접적인 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수장가들의 미술품 매매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고미술 수장가의 네트워크 내에서 고서화를 소개하며 감상의 기회를 마련해 주거나 구입을 권유하는 오세창의 행위는 일종의 ‘중개자(仲介者)’라 규정할 수 있다. 사회적인 교환 시스템 내에서 거래를 용이하게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중개자(intermediary)라 일컫는다.39 전통적으로 중개자는 ‘거간(居間)’으로 불렸으며 이 용어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화 거래의 현장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거간은 “어느 특정인에게 전속되지 않은 채 타인의 매매 및 기타 모든 거래를 매개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정의될 수 있다.40 서화포를 열어 전문적으로 거래를 담당하는 상인은 거간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 실재로 근대 수집가들이 남긴 여러 일화 속에서 거간의 존재와 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 골동상인 신보 기조(新保 喜三)의 활약은 고미술 거래에서 거간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보 기조는 혼마치(本町)에서 온고당(溫古堂)이라는 골동상을 운영하는 동시에 수장가들을 위한 중개인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전형필의 고미술 수집을 도우며 흥미로운 일화를 다수 남겼다. 그는 전형필이 〈고려청자천학매병(高麗靑瓷千鶴梅甁)〉을 입수하도록 도왔으며 후에 이를 구입하고자 하였던 일본인 고미술상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의 세화인(世話人)으로 활약하던 1936년 무렵, 일본인 수장가였던 모리 고이치(森悟一, 1881~1934)의 소장품 경매를 준비하며 출품 목록을 미리 알았던 신보 기조는 전형필에게 〈이조청화백자진사철채국문대병(李朝靑華白磁辰砂鐵彩菊紋大甁)〉의 가치를 알려주고 경매에 참여하여 이를 구입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fig. 20). 조선에서 저축은행장을 지낸 모리 고이치는 조선 고미술 수집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이 경매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국제적인 고서화상인 야마나카상회도 경매에 참여하여 전형필과 경쟁할 정도였다. 전형필은 이 경매에서 대병 외에도 정선(鄭敾, 1686~1759)의 〈고산유수도(高山流水圖)〉,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신품골치(神品鶻雉)〉, 일본화가인 사쿠마 데츠엔(佐久間 鐵園, 1850~1921)이 고종(高宗, 재위 1864~1907)의 명령으로 제작한 〈이백관폭도(李伯觀爆圖)〉 등 여러 점의 서화를 동시에 구입하였다.41 당시의 경매로 입수한 고서화는 간송미술관의 소장품 중에서도 높은 격조를 지닌 작품들이다. 전형필은 이 경매를 통해서 고서화 수집가로서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미술품의 정보를 제공하고 구입을 도왔던 신보 기조는 전형필의 컬렉션의 형성과 수장가로서의 위상 제고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유의미한 행위자였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White Porcelain Bottle with Grass and Insect Design in Underglaze Iron, Copper and Cobalt Blue, 42.3cm(H),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Kansong Misul Munhwa Chaedan, Kansong Munhwa 98, p. 42)
Fig. 20.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White Porcelain Bottle with Grass and Insect Design in Underglaze Iron, Copper and Cobalt Blue, 42.3cm(H),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Kansong Misul Munhwa Chaedan, Kansong Munhwa 98, p. 42)

여기에 나타난 신보 기조의 역할은 고서화의 유통 과정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수행되는 상인의 경제 활동으로는 규정되지 않는다. 그가 주선의 과정에서 수수료와 같은 어느 정도의 금전적인 대가를 얻었다고 해도 매매의 당사자는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미술 시장의 네트워크 내에서 정보를 제공하며 매매와 수집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미술 거래의 현장에서는 미술 시장에 참여하는 각 주체들의 관계망 내에서 수장가와 수장가, 혹은 수장가와 시장을 연결시키고 그들의 취미 형성과 의사 결정을 매개하는 가교 역할이 필요하였다. 앞서 언급한 소장가들의 전언은 오세창이 소장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박영철이 문화계에 남긴 업적으로서 그동안 학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조선의 대문호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을 출간한 일이었다. 1932년 발간된 박영철본의 『연암집』은 그간에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박지원의 저작을 망라하여 최초의 신활자로 간행한 문집이었다.42 다산문고에 포함된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은 이 문집의 간행과 깊이 관련되었다. 이 서첩에는 박지원의 서간 30여 통이 수록되었다. 그 말미에는 연암의 후손인 박기양(朴綺陽, 1876~1941)이 박영철에게 보낸 편지가 부착되었다(fig. 21). 박기양은 박영철이 선조의 문집 출간을 성사시켜 준 데 감사하며 가전되던 서간첩을 선물한다고 하였다. 『연암집』의 출간은 문화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지만 여타의 수장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행위이다. 박병래는 박영철에게 『연암집』의 출간을 주선한 인물이 오세창이었음을 전하였다.43 비록 문집 출간은 직접적인 고서화 수집 행위와는 다르지만, 이는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수장가로서 박영철의 사회적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 이면에는 서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문화계의 중개자로 활약하며 수장가의 활동과 위상 제고를 이끌었던 오세창의 역할이 자리하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전형필이 보화각을 개관하며 촬영한 기념사진에서 당대 문화인의 중심에 자리한 오세창의 모습은 당시 문화적 네트워크 내에서 오세창이 지녔던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다(fig. 22).

박기양, 〈서간〉, 《연암선생서간첩》, Pak Ki-yang, A Letter to Pak Yŏng-ch’ŏl, Yŏnam sŏnsaeng sŏganch’ŏp, 1935, 46.5×28.7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Fig. 21. 박기양, 〈서간〉, 《연암선생서간첩》, Pak Ki-yang, A Letter to Pak Yŏng-ch’ŏl, Yŏnam sŏnsaeng sŏganch’ŏp, 1935, 46.5×28.7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y by the author)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이순황 등 제씨〉 i Sang-bŏm, Pak Chong-hwa, Ko Hŭi-dong, An Chong-wŏn, O Se-ch’ang, Chŏn Hyŏng-p’il, and Yi Sun-hwang in attendance on the anniversary of the opening of Bohwagak (Posŏng Chung-godŭng hakkyo ed., Kansong Chŏn Hyŏng-p'il, p. 32)
Fig. 22.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이순황 등 제씨〉 i Sang-bŏm, Pak Chong-hwa, Ko Hŭi-dong, An Chong-wŏn, O Se-ch’ang, Chŏn Hyŏng-p’il, and Yi Sun-hwang in attendance on the anniversary of the opening of Bohwagak (Posŏng Chung-godŭng hakkyo ed., Kansong Chŏn Hyŏng-p'il, p. 32)

Ⅴ. 결론

한국미술사에서 20세기 초 식민지기는 대규모의 한국미술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였다. 이전 시대 왕실과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고서화는 사회적 변동에 따라 새로운 수집 주체들에게로 이동하였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을 비롯해 다양한 성격의 수집가가 등장하여 한국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으나, 고서화 분야에 한정하면 한국인 수장가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것은 수장가들의 활약이 고서화의 유출과 산실을 막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본 연구는 식민지 시기 조선 고서화의 컬렉션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오세창의 역할을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동안 오세창의 미술사적 업적은 『근역서화징』이나 『근역인수』의 편찬과 같은 저술 활동에 집중되어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고서화 컬렉션 구축은 이면에서 미술시장에서의 상업적 매매, 감정·감식 등의 실천적 행위가 수반되며, 비공개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수행되는 부분이 컸다. 따라서 그 과정은 명확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당대 수장가들의 회고, 작품의 제발문, 동시대의 출판물 등 다각적인 문헌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오세창이 서화 감식의 현장과 수장가 네트워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며 새로운 고서화 컬렉션 형성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근대기 고서화 컬렉션의 성립 과정에서 나타난 오세창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오세창은 고서화에는 과거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는 역사 인식을 근간으로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라는 독보적인 서화첩을 완성한 수장가였다. 오세창이 고서화를 수집한 일차적인 목적은 식민 통치의 상황 속에서 소실되어 가는 조선의 고서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으며, 나아가 사회적으로 조선 서화의 존재와 가치를 알리고 관심을 환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화첩을 1930년대 고서화 수집의 전면에 등장한 박영철과 전형필 같은 신흥 수장가들에게 양도함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컬렉션을 형성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조선 고서화의 수집 행위에 방법론과 지향점을 제시하는 등 전범의 역할을 하였다. 둘째, 『근역서화징』으로 대변되는 한국 서화 지식의 집대성자였던 오세창은 단순한 진위 판별의 차원을 넘어 객관적 고증과 학문적 깊이를 갖춘 권위 있는 감식안이었다. 낙관이 없는 작품의 가치를 보증하고, 금석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유물의 문화사적 내력을 밝혀준 그의 제발은 수장가들이 구축한 컬렉션의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격상시키는 보증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셋째, 그는 고미술 시장과 수장가 집단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세창은 수장가들에게 고서화를 소개하고 구입을 권유하는 등 그들의 안목을 이끌며 컬렉션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나아가 박영철의 『연암집』 간행을 주선하거나 전형필의 보화각 설립에 조력했던 행적에서 드러나듯, 서화 수집을 넘어 수장가들이 문화적 구심점으로서 사회적 권위를 확립할 수 있도록 전방위적으로 조력하였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시기 조선 고서화 컬렉션의 형성은 자본력을 지닌 수장가들의 단순한 구매 행위로만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니었다. 오세창은 그 중심에서 독보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고서화 수장가들을 조력함으로써 컬렉션 형성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였다.

박영철과 전형필이 오세창과 더불어 조선 고서화 컬렉션을 형성했던 1930년대는 고미술품 거래의 황금기였다. 당시 활발했던 고서화 매매의 이면에는 조선인 수장가들이 전면에 등장하며 대규모 컬렉션을 구축했던 시대적 배경이 존재했다. 오세창은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고서화의 수집과 양도, 감정과 감식, 수장가 간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며 고서화 수집을 주도한 적극적인 행위자였다.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는 식민지 시기에 오세창의 역할이 지닌 의의는 조선 고서화 수집의 전통을 보전하고 이를 근대의 수장가들에게 전수하는 일종의 문화적 전승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세창의 역할을 ‘조선고서화 수장의 스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Notes

  1. 1朴秉來, 『陶磁餘滴』 (中央日報社, 1974), pp. 116-120.
  2. 2이승연, 『위창 오세창』 (이회, 2000), pp. 26-30.
  3. 3오세창이 유홍기에게 교육받은 일은 아들인 오일육 선생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유대치에 관해서는 박은숙, 「유대치, 중인 근대화 주역론이 낳은 오류」. 『내일을 여는 역사』 28 (2007), pp. 134-144 참고.
  4. 4吳世昌, 『槿域書畫徵』 (京城: 啓明俱樂部, 1928); 吳世昌, 『槿域印藪』 (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68); 오세창, 동양고전학회 역, 『국역 근역서화징』 (시공사, 1998).
  5. 5본 연구는 미술시장에서 오세창의 역할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2024년 이후 간송미술관에서 공개한 자료와 논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문화』 94~98 (간송미술문화재단, 2024~2026).
  6. 6서화수장가로서 박영철에 관하여는 이경화, 「다산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과 박물관 인식」, 『미술사학연구』 321 (2024), pp. 39-68; 이경화, 「다산 박영철과 경성제국대학진열관」, 서울대학교박물관 編, 『거두다 간직하다 돌아보다』 (2018), pp. 149-158; 김상엽, 「제국주의의 협력자이자 문화 애호가 박영철」, 돌베개 編, 『미술품의 컬렉터들』 (2015), pp. 159-179; 김상엽, 「『故朴榮喆氏寄贈書畵類展觀目錄』을 통해 본 다산 박영철의 수장활동」, 『헤리티지: 역사와 과학』 44 (2011), pp. 70-85 참고.
  7. 7박영철의 기증품은 당시 ‘多山文庫’라 불렸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이 기증품에 특별한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컬렉션의 역사성을 되살려 다산문고로 명명하고자 한다.
  8. 8《근역서휘》의 구성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진준현, 「근역서휘에 대하여」, 서울대학교박물관 編, 『근역서휘』 1 (2016), pp. 7-11 참고.
  9. 9Lee, Jawon, “Visualizing “National Art”: O Sech’ang’s Art Collection and Connoisseurship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The Art Bulletin 105, no. 4 (2023), pp. 116-133.
  10. 10韓龍雲, 「古書畵의 三日」, 『每日申報』, 1916년 12월 12일.
  11. 11오경석의 소장품 목록은 후손가에 전승되어온 것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설립 당시에 구입하였다. 김영욱, 「위창 오세창, 1864~1953의 서화 감식과 《근역화휘》」, 『간송문화 95: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재단, 2024), pp. 163-192; 권지영, 「위창 오세창 컬렉션」, 『간송문화 97: 보화비장』 (간송미술문화재단, 2025), pp. 32-59.
  12. 12성균관대학교박물관, 『癖痴狂作; 수집과 컬렉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2025).
  13. 13「瞥見書畵叢」, 『每日申報』, 1915년 1월 13일.
  14. 14Lee, Jawon, 앞의 논문.
  15. 15「瞥見書畵叢」, 『每日申報』, 1915년 1월 13일.
  16. 16韓龍雲, 「古書畵의 三日」, 『每日申報』, 1916년 12월 7일 외 4회.
  17. 17진준현, 「《근역화휘》에 대하여」, 서울대학교박물관 編, 『근역화휘 천지인』 (2014), pp. 149-151.
  18. 18간송미술관 소장 《근역화휘》의 명명 방식은 선행 논고를 따라 7책본, 3책본으로 하였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근역화휘》 3종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김영욱, 앞의 논문(2024), pp. 163-192 참고.
  19. 19김영욱, 앞의 논문(2024.10), p. 180 표2. 하버드엔칭도서관 소장의 『續姓源錄』에는 ‘이순명 구장’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 20다산문고본의 경우 3권 모두 제첨 말미의 종이가 의도적으로 刪削되었다. 선행 연구에서는 이를 방형 인장의 흔적으로 보았다. 간송미술관의 3책본 표지에도 인장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진준현, 앞의 논문, pp. 149-151.
  21. 21서울대학교박물관 編, 『槿域書彙別集』 (사회평론아카데미, 2018).
  22. 22《槿域書彙總考》에 관해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 『카이로스의 서고』 (고려대학교도서관, 2020) 참조.
  23. 23박병래는 한국전쟁 시 피난 이전에 서화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귀환 후 모두 훼손된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24. 24김영욱, 「보화각 설립과 간송 컬렉션 형성」, 『간송문화 94: 보화각 1938』 (2024), pp. 144-152.
  25. 25박병래, 앞의 책, p. 120.
  26. 26간송미술관의 유물 상자에 남은 상서는 모두 258건인데 이 대부분은 오세창의 글씨라고 한다. 유물에 적은 제발을 제외한 상서만 200여 건이 넘을 것이다. 김영욱, 앞의 논문(2024), pp. 176.
  27. 27최완수, 『추사 명품』 (현암사, 2017), pp. 119-122.
  28. 28위의 책, pp. 197-199.
  29. 29이경화, 「新羅王定界碑 탁본과 19세기 조청 문인의 만남」, 서울대학교박물관 編, 『불후의 기록』 (2019), pp. 302-309.
  30. 30“新羅眞興王巡狩碑之今在域中者. 睹是以三焉. 一曰, 利原萬德山, 二曰, 咸興黃草令, 三曰, 楊州北山, 而此則咸興碑之拓本也. 書體爲六朝楷法, 筆致遒勁. 淸國康南海有爲著, 『廣藝舟雙楫』 評此書曰, ‘奇逸古厚遂窴諸高品之列,’ 蓋中州人士之於此碑愛重也深矣. 金藥山相公之使燕時, 携此拓贈董藝龕文燦. …… 多山仁兄, 春間遊燕市, 擭此幀歸. 以示余願屬題語. 蓋王樊二先生均與我 先人交斿 其詩牘尙餘篋間. 今又讀此文字 不禁悵然. 況朴相公之壬申使燕也. 先人亦同行焉. 對此而撫古㝠想, 但自默然.” 印: 東涂窓抹, 吳氏作, 臣昌, 葦記.
  31. 31대부분의 경우에 감정과 감식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며 명확하게 규정된 정의를 찾기 어렵다. 필자는 두 용어의 언원적인 의미, 미술 외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례 등을 고려하여 구별을 시도하였다.
  32. 32徐邦達, 『古書畵鑑定槪論』, 郭魯鳳 譯 (동문선, 2004), pp. 9-10.
  33. 33홍선표, 「오세창과 『槿域書畵微』」, 『미술사논단』 7 (1998), pp. 331-336.
  34. 34서울대학교박물관, 『槿域書彙別集』 (사회평론아카데미, 2018).
  35. 35박영철, 『多山詩稿』 (京城: 발행처 미상, 1932); 박영철, 『多山詩稿』 (京城: 朱日印刷所, 1939).
  36. 36“日昨留香, 尙爾馥郁, 又拜雲翰墜案, 奉讀鳴謝. 況有寵速之敎, 誼當趨陪. 然自恨書畵之彙集, 已屬煙雲過眼, 本不足掛懷. 而若於玩此論賞之席, 弟自媿汗顔, 無面對人. 幸望恕此衷曲, 至感至感. 今作軸已塗鴉故順呈. 而適有阮堂書請監定者, 係是下世之年所書者. 兄若有意, 則使其主送覽矣, 敎之若何? 弟世昌頓首.”
  37. 37「朝鮮古書畵珍藏品展覽會出品目錄」, 『東亞日報』, 1930년 10월 18일; 滄浪客, 「百萬長者의 百萬圓觀」, 『三千里』 7-8, 1935년 9월 1일, pp. 44-52; 朝鮮美術館, 『朝鮮名寶展覽會圖錄』 (東京: 朝鮮美術館, 1938), 도 68.
  38. 38박병래, 앞의 책, pp. 117-118.
  39. 39Cahill, James. The Painter's Practice: How Artists Lived and Worked in Traditional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p. 39-45; 제임스 케힐, 장진성 역, 『화가의 일상』 (사회평론 아카데미, 2019), pp. 108-120.
  40. 40이민희, 「서적 중개인의 역할과 소설 발달에 관한 시론」, 『관악어문연구』 29 (2004), pp. 399-438.
  41. 41전형필이 경매를 통하여 구입한 고미술에 관해서는 이경화, 「식민지 시기 정선 회화의 담론 형성과 수집」, 『미술자료』 103 (2023), pp. 32-66;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문화』 98 (간송미술문화재단, 2026); 京城美術俱樂部 編, 『古森悟一氏遺品書畫竝ニ朝鮮陶器賣立』 (京城: 京城美術俱樂部, 1936) 참고.
  42. 42박영철본의 『연암집』에 대한 평가는 김혈조, 「燕巖集 異本에 대한 고찰」, 『한국한문학연구』17 (1994), pp. 157-189 참조. 《燕巖先生書簡帖》에 관해서는 박지원 저,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연암 박지원이 가족과 벗에게 보낸 편지』 (돌베개, 2005), pp. 1-187 참조.
  43. 43박병래, 앞의 책,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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