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Silla Transformation and Characteristics of Vairocana Buddha Statues in the Unified Silla Period
Published: January 2006 · No. 250·251 · pp. 39-82
Full Text
Abstract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상은 8세기 중엽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9세기 중엽 이후의 통일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불상형식이다. 그 연원은 인도와 중국에 두고 있는 것으로 원래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의 법신불에서 발전한 개념이나 지권인의 수인은 중기밀교의 경전인 『금강정경』에서 채용하여 형상화된 것으로 밀교의 양계만다라 중에서 금강계의 본존불인 대일여래와 관련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금강계 대일여래의 도상이 화엄의 비로자니불상에 수용되어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신앙되었다는 점은 화엄사상과 밀교가 융합되는 당시 불교사적인 배경에 따른 것으로 신라적인 변용의 한 예로 해석된다.*br*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은 766년명의 석남사상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대부분 독존의 여래형 지권인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현재 약 50점이 알려져 있다. 그중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조상기를 가지고 있는 상으로는 859년명의 보림사 비로자나불상과 865년명의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상 2구밖에 없었으나 최근에 불상 복장물에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883년의 조성연대가 밝혀진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상 2구가 있다. 반면에 불상의 대좌나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 간접적으로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예는 766년의 석납사 비로자나불상을 비롯하여 863년경의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상 및 금동사리함의 비로자나불상, 867년경의 취서사 비로자나불상등이 있다. 또 드물지만 법수사와 불국사의 삼존불상이나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과 청암사 수도암 삼층석탑의 초층탑신에서 볼 수 있듯이, 五方佛의 하나로 등장하는 예도 있다.*br*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은 법의를 통견 또는 우견편단으로 입었든지 간에 지권인상이 좌권인상보다 많이 나타나고 있어 법의의 착의법이 수인의 형태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 사이에 표현된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은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비로자나불좌장에 대부분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항마촉지인 불좌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시대적인 특정이다. 입상의 경우는 그 예가 매우 적지만 예외 없이 통견의 법의에 지권인을 하고 있다.*br*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의 형태에 따라 크게 4가지 유형별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경전상의 의궤를 기본적으로 따르면서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형식이 있어 시대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둘째손가락 끝부분만 쥐고 곧바로 세운 것으로 두 손 사이의 간격이 많이 벌어진 지권인을 Ⅰ형식으로 하고, Ⅱ형식은 Ⅰ형식과 기본적으로 같으나 두 손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 지권인, Ⅲ형식은 오른손과 왼손을 맞붙여서 비스듬히 쥐고 있는 지권인, Ⅳ형식은 두 손의 손바닥을 모두 밖으로 향한 채 지권인을 하고 있는 형태 등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Ⅰ형식은 석남사상과 불국사 불상 등 8세기의 여래형 지권인상에서 볼 수 있는 반면에 보관여래형의 지권인상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은 여래형보다 늦게 출현하였음을 말해준다. Ⅱ형식과 Ⅲ형식은 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9세기 중엽 이후의 통일신라 후기 비로자나불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동화사 비로암 불상과 취서사 불상 계통의 지권인상은 법의의 옷주름 표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Ⅳ형식은 약간 변형된 지권인 형태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의 불상에 주로 나타나고 있어 시대가 내려가는 요소가 있다. 이와 같이 4가지 유형의 지권인은 대체로 Ⅰ형식에서 Ⅱ, Ⅲ형식으로 변하면서 함께 공존하였으며 Ⅳ형식과 같은 변형을 거쳐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면 오른손으로 왼손 전체를 감싸면서 합장하고 있듯이 오른손 둘째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거나 양쪽 둘째손가락만 곧추 세우고 있는 지권인 형태로 변형되면서 이어졌다.*br* 현존하는 유물을 보면, 보살형과 보관여래형의 지권인상의 예가 매우 적은 데 반하여 여래형의 비로자나불상이 통일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하게 되는 데에는 당시의 불교정책이나 불교신앙의 흐름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7세기 신라 때부터 왕실이나 귀족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던 華嚴이나 瑜伽, 戒律 등을 비롯한 대승불교가 크게 성행함에 따라 8세기 중엽에 전해진 중기밀교와 그 도상이 독립된 하나의 종파로서의 이론적인 체계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화엄사상에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9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문왕대의 왕권강화 정책과 함께 화엄 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비로자나불이 집중적으로 조성되면서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br* 중기밀교는 화엄사상과 교리적인 면에서 유사정이 많을 뿐 아니라 통일신라 후기에 전래된 선사상에 화엄적인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고려한다면, 중기밀교와 교학불교로서의 대승불교 사상은 쉽게 융화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융화현상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상은 화엄종과 선종 사찰의 본존으로 예배되었던 것이다. 이는 통일신라 비로자나불상이 법신불의 개념으로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여 비록 지권인을 취하고 있더라도 밀교의 금강계 대일여래로 발전하지는 않았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이렇듯,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상은 불교신앙의 시대별 추이에 따라 화엄사장과 융화하면서 그 성격과 의미가 신라적으로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