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A Study on Akdun's 'Painting of an Imperial Mission' (阿克敦 《奉使圖》)
Published: January 2005 · No. 246·247 · pp. 201-245
Full Text
Abstract
《奉使圖》는 淸나라 사신 阿克敦(1685-1756)의 조선사행의 견문을 묘사한 畵帖과 그 그림에 대한 題詩와 跋文을 모은 書帖으로 구성되었다.*br* 阿克敦은 1685년(康熙 24) 滿洲 正藍旗 태생으로, 字는 沖和, 立恒, 恒巖이며, 堂號는 德蔭堂이다. 1709년에 진사가 되어 翰林院掌院學士, 協辦大學土와 太子少保에 이르렀고, 准?爾의 전장에 봉사로 파견되어 전쟁을 막은 공이 컸다. 1756년 향년 72세로 별세하였고, 시호는 文勤公이며, 유작으로 『德蔭堂集』이 있다.*br* 아극돈의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인연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阿克敦의 제1ㆍ2ㆍ3차 조선사행은 상칙사로 파견되었는데, 제1차 사행은 1717년 9월 숙종의 眼疾 치료제인 空靑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극돈은 1차 사행 후 환국한 지 불과 3일만인 1717년 12월에 淸 順治帝(재위 1644-1661)의 貞妃였던 孝惠章皇太后(1641-1717)의 訃音을 알리기 위해 다시 조선에 오게 된다. 제3차 사행은 1722년 4월, 조선 경종의 동생 연잉군 李昑의 王世弟 책봉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조선 경종의 조부사제를 위한 부칙사로서 1725년 1월 上馬하여 제4차 조선사행을 하였다.*br* 《봉사도》는 현재 中國民族圖書館 善本部에 수장되어 있다. 樟木으로 만들어진 보관함은 서책과 화첩을 나누어 넣을 수 있도록 2층으로 구분되었다. 서첩과 화첩의 크기는 세로 46.5cm, 가로 29cm로 일치하며, 표지는 紙版 위에 花紋의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현재는 표지의 가장자리가 닳아 황색 지판이 노출되어 있고, 표지 위에 제목을 썼던 부분이 이미 마모되어 외관상 화첩과 서첩의 구분은 어렵다.*br* 서첩은 史貽直의 20수 酬唱詩를 비롯하여 沈德潛, 錢維城 등에 이르기까지 《奉使圖》화첩에 대한 16인의 제시와 발문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들의 글은 1749년에서 1881년 사이에 첨가되었고, 뒷 부분의 몇 장은 빈 여백 상태로 남아있다.*br* 《奉使圖》화첩은 鄒一桂(1686-1772), 董邦達(1699-1769). 于敏中(1714-1779). 介福 등 청대 문인서화가 4인이 序詩를 썼으며, 1748년에서 1756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于敏中의 서시 20수는 《봉사도》화면 위에 아극돈이 쓴 제시와 각각 상응한다. 또한 1725년 12월에 서법에 능한 王澍(1668-1739)가 ‘奉使圖’라는 內題와 관지를 썼다.*br* 본고에서는《봉사도》의 화첩을 중심으로, 미술사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봉사도의 제반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먼저, 《봉사도》를 그린 필자가 鄭璵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봉사도》의 제1폭 위에 정여가 제작하였다고 기록한 관지와 20폭 전체 화면 위에 찍힌 정여의 인장을 비롯하여, 北京故宮博物院 소장 〈阿克敦 過庭圖〉(132×70.2cm)를 그 근거로 들었다. 〈阿克敦 過庭圖〉는 정여가 莽鵠立(1672-1736)이 먼저 그렸던 소상을 바탕으로 《봉사도》와 같은 해에 다시 제작한 것으로, 두 화폭 위에 그려진 아극돈 소상의 화풍이 사실상 일치하며 공통된 인물들이 제작에 참여한 점에서 《봉사도》화첩의 필자 연구에 결정적 근거를 제시하였다.*br* 『承政院日記』를 비롯하여, 《봉사도》 서책에 쓴 蔣溥의 제발에서도 나타나듯 《봉사도》는 제4차 사행시에 아극돈 자신이 조선의 화공에게 직접 그리도록 주문한 畵題와 상당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조선화원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청국에 돌아간 아극돈이 정여에게 제작을 의뢰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봉사도》화첩을 구성하는 20폭의 그림 중 북경의 紫禁城을 배경으로 한 아극돈의 초상화, 鳳凰城(現 요녕성 봉성시) 외경을 그린 2폭을 제외한 18폭이 조선의 사행여정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봉사도》 화풍에 나타나는 당시의 중국화풍과 조선적인 요소의 상호 개입 여부를 보면, 풍속은 조선의 시대상을 비교적 잘 반영한 반면, 산수는 청대 화풍이 더 강하고, 건축의 세부 묘사 역시 조선적 특징과 차이를 보여 청국 화가 정여의 자의적 해석이 반영되었다.*br* 《봉사도》의 서첩은 그 流轉 과정에서 그 순서가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견본채색으로 제작된 화첩 그림 20폭에는 아극돈의 題詩 16首가 그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그 순서는 아극돈이 제3차 사행에서 완성한 『東遊集』에 실린 제시 16수와 그 내용 및 순서가 동일하다. 또한 이 제시들은 于敏中과 史貽直의 수창시 순서와 동일하여 현재의 장첩 순서는 아극돈이 화첩을 제작했던 당시와 일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봉사도》 화첩은 제4차 조선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극돈이 제3차 조선사행 이후 스스로 완성한 『동유집』의 제시와 상응하는 그림을 鄭璵에게 의뢰하여 적어도 1725년 6월 이전에 그려졌다.*br* 이 논고에서는 그동안 미공개되었던 《봉사도》의 笏記와 문헌기록을 통해 그럼에 나타난 칙서 관련 의례가 진행된 장소 및 내용을 비교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봉사도》에 묘사된 궁중 의례 장면은 아극돈이 제1차 조선사행 때 편전인 熙政堂에서 행했던 受勅書儀와 제3차 사행에서 행했던 仁政殿 宣勅書儀와 관련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궁중기록화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 국왕과 왕세자의 모습이 그림에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br* 그밖에 《봉사도》의 사행기록화적 측면을 감안하여 화면의 내용을 분석하여 사행노정의 순서에 따른 각 장소를 비정하였다. 세부적으로는 陰陽魚太極, 開城 내 객사 주변의 거리, 그리고 慕華館에 사열한 호위 군대 등 그동안 《봉사도》의 도상해석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모색하였다.*br* 《봉사도》의 화첩 그림 20폭은 1123년 徐兢(1091-1151)이 제작한 『高麗圖經』이래, 중국 사신의 조선 사행 관련 기록화로는 현존 유일본으로, 18세기 朝鮮과 淸의 대외 관계사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18세기 초 조선을 네 차례나 사행한 청국 사신 관점에서 솔직하게 기록한 조선의 풍속은 물론, 칙서의식과 관련한 궁중행사를 시각화한 使行記錄畵로서 그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