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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Article

Identifying Works of Goryeo Sutra-Copying Monks Dispatched to the Yuan Dynasty

장충식

Published: January 2005 · No. 246·247 · pp. 4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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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13세기 이후 고려는 몽골의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自救의 길을 선택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외부적으로는 몽골의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여타 피지배 족과도 다른 실용적 노선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경미술을 통하여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몽골의 지나친 조공과 착취는 새로운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는 동아시아 최고의 사경 종주국으로서의 고려의 위상을 확인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특히 고려사경의 지질이나 제작기술은 중원을 능가하였는데 이는 계속된 사경지의 요청이나 사경승의 차출에서도 잘 나타났다.*br* 원나라에 차출된 고려 사경승 작품으로 추정된 이들 사경의 제작시기가 元統연호를 사용하던 매우 짧은 시기에 한정되어 있었다. 원통연호는 불과 2년이고 혼란의 시기였으나 鄭禿滿達兒와 安賽罕 발원의 이 사경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그 체재는 고려의 일반사경과 다소간의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권수의 형식, 특히 발원문의 위치나 내용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발원자는 사경의 발문에서 몽골명을 쓴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鄭’이 賜姓인지 또는 고려인으로서 이름만 몽골명을 사용하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움으로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출현과 함께 더욱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br* 그리고 원통연호가 사용된 이들 사경에 앞서서도 차출된 사경승에 의하여 제작된 작품에 대해서도 더욱 추구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뜻에서 이들 사경 발견의 의의는 자못 크다 하겠다. 다만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원나라 차출 고려 사경승 작품의 작은 일부를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사경의 대외 영향관계나 당시 동북아에 있어서 고려사경의 국제성 해명에 일조가 되리라 본다. 또 발견된 사경이 금자경 위주이면서 화엄경이 주종을 이루었던 점 역시 당시 원의 경제력이나 몽골의 정복정책과도 연관될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