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The Painting World of Dalleung Yi Yun-yeong (1714-1759)
Published: January 2004 · No. 242·243 · pp. 255-289
Full Text
Abstract
본 논문은 평생 出仕를 거부하고 벗들과 낭만적인 詩文과 書畵활동을 하며 명승명소를 유람하는 등 隱者的 삶을 살았던 文人畵家 丹陵 李胤永(1714-1759)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살펴본 것이다.*br* 李胤永은 字가 胤之이며 號는 1741년경에 지었던 서재 이름을 따라 澹華齋, 1748년경에 明紹先生 그리고 단양에 은거한 이후로 丹陵山人, 丹丘處士라 했다. 단양에 은거하는 동안에는 蒼露亭과 棲碧을, 서울로 돌아와서는 水品樓라는 정지를 세웠다.*br* 이윤영의 집안은 조선 후기 문예와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金昌翕(1653-1722) 등 安東 金氏 집안과는 혼인으로, 李喜朝(1655-1724) 등 延安 李氏 집안과는 학맥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가계의 배경은 이윤영의 문예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br* 그는 시인이자 서회수장가로 잘 알려진 族大父 李秉淵(1671-1751), 정치적으로 영향이 컸던 仲父 李台重(1694-1756), 處士的 삶을 살았던 스승 尹心衡(1698-1754) 등에게 학문과 서화 등 문예 전반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윤영은 스승 윤심형이 주장한 문장의 궁극적 목표는 道를 깨치는 것에 있다는 因文悟道를 계승하여 文을 통해 道로 나아가는 문예관을 문학, 서화 등 문예활동 전반에 적용하였다. 그는 그의 문예활동을 ‘대나무를 傅神하고 눈속의 芭蕉에 寫意한다.’라는 회화와 관련된 傅神과 寫意로서 요약하였다. 이것은 대상물의 외양을 배제하거나 요약하여 그 안에 정신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창작자의 기교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하는 寫意的 藝術觀이다. 이윤영은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詩文을 교환하고 서화를 함께 감상하고 제작할 만큼 절친했던 친구 李麟祚(1710-1760)과 이러한 사의적 문예관을 함께 추구하였다. 이윤영의 사의적 문예관은 그에게 周易을 배우면서 학문적으로 영향 받았던 朴趾源(1737-1805)을 비롯한 19세기 北學派의 사의적 예술관에 일정한 영향을 주게 된다.*br* 이윤영은 진흙에서 피어났음에도 아름다움을 뽐내는 연꽃을 혼탁한 세상에 홀로 서 있는 君子의 모습으로 보았다. 그는 〈西池白連圖〉를 비롯한 〈蓮花圖〉 등을 즐겨 그러면서 평생 소망했던 군자의 삶을 연꽃을 통해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芽亭圖나 峻石을 주제로 한 山水圖 등 절개를 상징하는 소재에 지신의 내면세계를 담아내었다. 그는 趙榮?(1686-1761) 등의 선배화가와 畵譜類, 明代 吳派와 安徽派 등 다양한 畵風을 섭렵하여 개성있고 문기있는 작품세계를 보여 주었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峻石의 표현에 안휘파의 암석 표현을 적극 수용하였다. 은거 이전의 〈樹石圖〉, 〈皐蘭寺圖〉에서는 굵은 필선의 둥근 윤곽선과 각이 진 형태의 암석으로 나타낸 반면에 1751년 단양 은거 이후의 〈龜潭圖〉. 〈道譚三峰圖〉에서는 거칠고 단단한 느낌의 필선으로 괴석과 같은 암석에 자신이 지향하는 정신성이 드러나도록 화면을 재구성하였다. 安徽派 화풍의 수용은 사물의 형태보다 작가의 정신성을 추구하는 그의 寫意的 藝術觀의 표현에 적절하였던 것이다.*br* 이윤영은 조선시대 18세기 회단의 중요한 경향이었던 寫意的 文人畵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인물이다. 자신을 완성하는 道의 길과 문학, 서화 등 예술의 길을 동일시하였던 그의 예술관과 작품들에 대한 이해는 18세기는 물론 19세기 北學派의 寫意的 文人畵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