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초록
Research Article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금동아미타불좌상의 조성과 의미

정진영

발행: 2018년 1월 · 298호 · pp.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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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금동아미타불좌상은 비로자나와 아미타가 한 쌍으로 조성된 이례적인 조합을 보인다. 손 모양에 있어서도 지권인, 아미타인의 전형과 반대로 양손을 결하고 있다. 때문에 비슷한 시기의 다른 불상들과 차별성을 보이며, 동시에 한국 불교미술의 특수성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를 주목한 연구는 많지 않으며, 조성시기에 관해서도 여전히 연구자 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이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시작되었다. 먼저 두 상의 조성시기를 검토한 후, 왜 비로자나와 아미타가 한 쌍으로 조합되었는지, 이 이례적인 도상 출현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제작 당시 신앙의 형태에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br* 조성 시기는 9세기 중반에서 후반 무렵으로 결론하였다. 형식 및 양식―긴 이등변삼각형의 신체비례, 얼굴의 양감 및 耳目口鼻의 과장, 반대로 된 수인―이 9세기 불상과 유사할 뿐 아니라, ‘왕실과 연결된, 그리고 왕경(경주)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이라는 특이성은 8세기 유행했던 의상계 화엄학과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의 불교는 8세기 중반 경덕왕대를 기점으로 법상에서 화엄으로 그 사상이 교체된다. 하지만 주존 비로자나불이 하나의 시각매체로 유행하는 시기는 훨씬 늦다. 특히 신라 왕실과 연결된 비로자나불상은 약 100여년의 공백을 만들며 9세기 중후반 처음으로 확인되고, 왕경봉안 비로자나 불상은 이보다 좀 더 늦은 861년 숭복사 불상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 공백은 당시 화엄의 주류였던 의상 화엄학의 독보적 위치 및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 등을 고려해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의상은 화엄학승이면서도 화엄의 願刹 부석사에 촉지인의 아미타불상을 봉안하고, 일생 동안 서쪽을 등지지 않는 등 ‘아미타불’에 유독 무게를 두는 실‘ 천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이 유효한 시기, 적어도 9세기 중반까지는 의상의 특이성이 그대로 답습되어 화엄사찰에 비로자나불상이 아닌 아미타불상이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br* 그렇다면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 조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두 상이 제작된 9세기 화엄의 성격을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9세기 신라의 화엄은 선사상의 흥기, 羅末의 혼란, 그리고 종파 내부의 매너리즘이 더해져 교학적인 면에서 일대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특히 대중과의 거리는 화엄학승들로 하여금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도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이 변화의 구심점으로 9세기 말 화엄의 중심 도량으로 성장하는 ‘해인사’의 성격에 주목하였고, 해인사를 중심으로 유포, 확장된 다음의 두 서적이 그 변화의 典據로서 역할 하였다고 보았다. 799년 唐 유학승 梵修에 의해 국내로 유입된 『40華嚴經』, 그리고 澄觀의 『華嚴經疏』는 분명 화엄관련서적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서방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소원하고, 나아가 비로자나와 아미타, 연화장세계와 극락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결국 9세기 화엄이 제시한 구체적 실천도는 ‘稱名念佛’함으로써 ‘極樂往生’할 수 있다는 ‘미타신앙’인 셈이며, 불국사의 두 상은 이를 형상으로 구체화시킨 현전하는 실체라 볼 수 있다.
키워드: 불국사(佛國寺Bulguksa Temple)통일기 신라(統一期 新羅Unified Silla)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Vairocana)40화엄경(40華嚴經40-fascicle Avataṃsaka Sūtra)경문왕(景文王King Gyeongmun)지권인(智拳印BodhaŚrī-mudrā)